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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창세기 39:7~12. 마태복음 1:18~25)
해마다 교단 총회를 개최하는 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총대들에게 숙소를 알선하는 일입니다.
전국에서 여러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올라오시지만→ 고급 호텔은 숙박비가 비싸서 부담이 큽니다.
그래서 교회에 근접한 모텔에 투숙하도록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모텔은 3일 , 4일 동안의 연일 숙박을 거부합니다. 경제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낮과 밤으로 손님을 받아야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데, 3일 연속 숙박하면 자기들은 손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웃돈을 주고 사정사정해서 모텔에 숙박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제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모텔이 숙박을 위한 시설인데, 우리나라는 숙박보다는 불륜의 장소로 돌변한 상태입니다.
한겨레신문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2만2천개의 모텔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 이용자가 33만 명이나 되어 투숙 율이 75%~ 성업 중입니다.
우리나라 불륜인구가 500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해마다 4,700만 건의 성매매, 즉 매일같이 12만7천명이 성매매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인터넷 성매매나 해외원정 성매매까지 합하면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가장 미묘하게 나타난 부작용이→곧 정욕이라고 하는 죄 성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욕은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욕구’ 또는 ‘통제할 수 없는 과도한 성적 욕망’ 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정욕은 성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강렬한 육체적 욕망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탐식이 절제되지 못한 식욕이라면, 정욕은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라고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은 흡입력이 매우 강한 욕망이기 때문에 어떤 죄 보다도 물리치기가 어렵다.”고 현실적으로 정의해 줍니다.
사실 오늘 이 설교→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 교인들에게 이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할까?
그런 고민도 해 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가면 갈수록 성적인 많은 유혹과 현혹과 그리고 부도덕과 무질서로 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잘 못된 정욕이 무엇인가?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정욕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만족을 →잘못된 곳에서 찾는 갈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욕의 감추어진 특성은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현대인들은 갈수록 오히려 성적인 무질서속에 살고 있는가?
그 원인?
1) 정욕은 현실도피의 죄악입니다.
사람들이 성적으로 타락하는 요인 중 하나는→현실에 대한 스트레스, 현실의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적인 역작용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유흥가를 갔다가 거기서 현혹됩니다.
또 홧김에 부도덕한 행동을 하거나, 심지어 매춘을 하기도 합니다.
옥스퍼드의 석학 C. S. 루이스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냉랭하고 황량할수록 성적 유혹을 훨씬 더 쉽게 받는다고 구명해 줍니다.
즉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할수록 정욕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사람일수록 음란물에 중독되는 현상이 지배적입니다.
특히 포르노에 빠지는 사람들의 배경에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음란물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아야만 했던 인정과 칭찬과 격려와 그리고 친밀함, 사랑의 결핍 때문에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자~ 음란매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내면적 공허에 대한 현실도피로→ 성적인 부도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감정’은 갈수록 메말라가고, 그 대신 정욕과 같은 짜릿한 감정에 쉽게 매혹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만큼 현실도피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정욕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더 깊은 외로움과 그리고 고독에 빠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적 부도덕은 언제나 씁쓸하게 끝나고 맙니다.
2) 정욕은 인간을 도구화하는 죄악입니다.
정욕에 빠진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인격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수단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단지 자신만의 쾌락을 목적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욕은 사랑이 없는 비인격적 관계로 끝납니다.
자신의 욕구만 채울 뿐이지~ 인격적인 교감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말합니다.
인격 없는 성은 매춘의 수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말씀하시는 음락, 음욕, 정욕은 →상대의 인격과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상대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대상으로 취급하는 죄악이라고 적나라하게 지적하십니다.
상대방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중세의 신학자 에바그리우스라는 정욕을 ‘잔인한 죄’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신성하게 만들어주신 축복된 성을 →비인격적 도구로만 사용하는 가장 잔인한 죄이기 때문에 저는 맞다. 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우리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규범이 있고, 기준이 있지만 갈수록 이제는 상업화가 되어서→젊은 세대일수록 갈수록 참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결혼 전에 순결을 지키고 있는지→
너무나 현대문화는 상업성에만 눈이 어두워서~ 인간의 순결한 성을 저속한 상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상품화 시키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소설, 만화, 영화, 자동차, 가전제품, 각종 패션디자인, 심지어 스마트폰 선전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과 문구가 너무너무 선정적입니다.
제가 차를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틀으면~요즘 스마트폰 광고 하는 거보면→너무너무 성적이고 선정적입니다.
대부분의 상업광고 내용은 너무나 선정적입니다.
너무너무 노골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오염되어 버리는 거여
심지어 지식인들의 모임이나 신앙인들의 모임에서도 음담패설을 거침없이 즐겨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줍니다.
영화에서 그 영화가 ~예술이냐? 외설이냐? 구분하는 방법이 간단하답니다.
그 영화의 전체 모든 내용이 다 기억이 나면 그것은 예술적인 영화이고, 어떤 특정 한 부분만 기억나면 ~그건 외설이라고 합니다.
아주 정확한 진단 같아요.
여하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떠난 성적 부도덕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지→ 오늘 저는 한~ 두 가지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첫째, 결말이 비참합니다.
얼마 전에 녹음돼 있는 한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2080 이라고 하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보는 내내 너무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한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서~ 80억 원의 거대한 재산을 다 날려먹고~ 노숙자로 전락한 한 남자의 비참한 상황을 그대로 재현 시켜서 보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텔레비전을 보면서~‘아 저분이 나한테 80만원만 주고 상담을 했어도~80억 잃지 않았을 건데~’
옆에 분에게 한번 인사합시다.
‘꽃 뱀 조심 혀!’
우리 여성들도 인사하세요.
‘제비 더 조심 혀’
이처럼 정욕에 현혹되면 잠언 6장 26절에서는 얼마나 현실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한 조각 떡만 남을 정도로 패가망신한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잠언 6장 28절에서는 사람이 숯불을 밟으면 화상을 입는 것처럼 큰 상처를 입는다고 더욱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상처가 크고, 가족들마저도 힘든 상처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 5장 4절 말씀은 더 실제적입니다.
정욕에 빠질수록 쓰라린 고통을 톡톡히 치루며 산다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정욕은 몸과 영혼을 동시에 죽이는 불행을 가져올 뿐입니다.
결말이 비참합니다.
2)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귀하게 쓰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존경하는 요셉은 순결한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얼마나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되고 존귀한 자가 됩니까?
이방 문화에서도 성결을 잘 지켰습니다.
그야말로 세속문화 속에서도, 세속 도시에서도→ 성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뿐만이 아니라
오늘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다가 일평생 상처와 회한 속에 사는 씁쓸한 인생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는 정욕과 방탕과 음행에 빠져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침에 같이 고민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순결하고 성결하게 사는 거→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정욕을 육체적인 죄의 수준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인격과 영혼을 함께 병들게 합니다.
사람의 범죄 중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영혼을 가장 피폐하게 하는 것이→ 성적 부도덕입니다.
우리가 다른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 집니다.
부도 날 수도 있고, 돈관계도 서운할 수도 있지만 오래되면→ 잊혀 집니다.
그런데 성적인 부도덕은~본인도 잊혀 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인격과 영혼을 너무너무 피폐하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순결하고 성결하게 살기 위해서는→ 영적 수준을 높여야합니다.
영적 수준이 곧 도덕적 수준을 결정해주기 때문에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내 경건생활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여러분
오늘 이 설교 주제가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
이렇게 결론 내리지 마시고~
얼마나 저와 여러분은 내 영성의 수준, 영적 수준을 높여 가느냐에 따라서~
내 경건생활의 quality 가 달라진다는 것을 염두 해 둬야 합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한 해를 시작하면서~내 경건생활의 영성지수가 과연 얼마나 향상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적 수위를 높여갈 수 있는가?
저는 성결의 개념을→아주 간단하게 적극적인 개념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1.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적 유혹을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피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셉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요셉이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특별히 12절에 가보면
그는 피할 정도가 아니라 뿌리치고 도망쳤다고 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유혹이 있을 때 일단 토끼고 본다.’
요셉은 거부하는 이상적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훌륭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유혹이 있을 때, 현혹이 있을 때~단순히 성적인 유혹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면에 있어서 그들의 강조점은 뭐냐면→피했다는 겁니다. 거부했다는 겁니다.
제가 이 단어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divine no→ 거룩한 거절을 할 줄 알아야합니다.
어떤 유혹의 손길이 있을 때, 나를 현혹할 때, 내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할 때, 나를 어떤 어두움의 자리로 몰고 갈 때→우리 마음으로부터 divine no→ 거룩한 거절 →이게 얼마나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
목사님, 저는 divine no→이 단어 하나 때문에 학교에서 학장까지 되었습니다.
원불교 재단의~ 원산지인 대학에 ~약학대학의 교수인데~결정적인 순간 때마다 divine no를 했더니 그 학교 역사상 최초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밖에 없다 해가지고~학장이 된 거여
얼마나 음해가 많고, 비난이 많고 시기질투가 많은데~그 분이 학장이 되니까~그 대학이 흑자 경영이 된거여
그래서 다시 학장을 재임하게 됐어요.
할렐루야~
남이 축복 받은 얘기해도 아멘 좀 크게 허쇼
거룩한 거절
오늘 요셉을 꼬이고 있는 그 보디발 아줌마좀 보십시오.
요셉→ 얼마나얼마나 그 마음에 거룩한 NO 라고 하는 단호함이 정리가 잘 돼 있는지?
그냥 보디발의 아줌마가 권력만 가지고 유혹 했겠거요?
어느 날 요셉을 보더니~‘헬로우 요셉!’‘메리 크리스마스’‘아~요셉 핸섬 핸섬’
그리고는 어느 날 요셉한테 이렇게 얘기했을 거여
‘요셉, 내가 양복 한 벌 맞춰줄게~
그리고는 양복 잴 때 요셉의 어깨부터 탁 만지면서~ 어떻게 이렇게 우람하냐고~
오늘 8절 보세요?
8,9,10,12절→
요셉은 끊임없이 거절하는 모습, 피하는 모습~나중에는 어떻게 합니까?
뿌리치고 나가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줘요~
남성이 됐건, 여성이 됐건~ 우리 모두가 똑 같다고 생각해요.
한 번 더 합시다.
일단 토끼고 본다.
많은 회식자리가 있을 거여
얼마나 내가 신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지혜로우면서도 덕스럽게 divine no을 할 수 있는가?
승리자가 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거절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19절에서 살인, 간음, 정욕은→「마음에서 온다.」고 규명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지켜 나가야합니다.(잠언 4:23)
2.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좋지만→ 거룩한 일에 적극적인 열심을 품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바치는 것이 성결의 극치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코 추상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액면 그대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향한 헌신뿐만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 있으면→결코 외도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헌신 할 뿐만 아니라~사랑하는 마음으로 배우자에게 헌신 한다면→외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에로스 사랑에서 아가페 사랑으로 헌신하며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부부사이에 서로에게 헌신하고, 가족들에게 헌신한다면→우리는 결코 부도덕에 빠지지 않습니다.
동의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부부 사이에, 가족들을 위해 헌신 하는 사람은→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 관리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가 아니라→얼마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 단어가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 가족에게 헌신하는 사람→결코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3.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인간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사실 우리 영성의 도약이라는 것이 뭔가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나 혼자서도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사는 사람→
사람들이 보느냐? 안 보느냐? 그 수준을 초월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적 행복의 극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우리를 신부로까지 비유합니다.
영원한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 나 자신을 순결한 신부로 바치며 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일순간적인 행복이 아닌 차원이 다른 행복~
저는 성경의 단어가운데→이 이상의 단어가 있겠는가?
우리에게 가장 핵심적인 대답을 주는 하나의 표현이 있습니다.
시편 43편 4절에 보면 같이 하십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극락의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고의 기쁨, 최대의 기쁨, 가장 큰 기쁨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는 어떤 유혹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는 승리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정개역 성경은 큰 기쁨이라고 번역돼 있는데~
저는 옛날 개역성경 번역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닫습니다.
『극락의 하나님』
금세기 최고의 성경 번역가 유진 피터슨도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my exuberant God-『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신 하나님』
이것이 성화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경건 생활이 일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인생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며 산다면→그 사람은 경건한 행복자로 하루하루를 흡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결코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얘기도 아닙니다.
극락의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고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육체적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산다면 →이 세상 것들은 별게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어떤 것이 됐건 별 거 아니예요.
오늘 아침의 주제인 어떤 성욕뿐만 아니라→저와 여러분이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고 산다면→왠만한 일은 초연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지향해야 될 영성향상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대표적인 죄 성 7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한번 복습해 보겠습니다.
「회개대상 1호 교만, 녹색 눈을 가진 시기, 품을수록 위험한 분노, 영혼의 병 나태, 우상이 되는 탐욕, 영혼을 텅 비게 하는 탐식, 그리고 인격적 사랑이 아닌 정욕」
오늘도 내 안에 잠복하고 있는 근본적인 죄 성이 무엇인가?
그 죄 성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살 수는 건강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복습하십시다.
~~
무엇이 아직도 내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근본 죄 성인가?
살펴볼수록 우리는 날마다 근본적인 진정한 변화를 갈망하며 추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될 경건생활 「수덕 신앙」입니다.
우리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훌륭한 애씀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옛 사람의 죄 성을 벗어버리고, 덕을 쌓아가고, 인격의 성숙과 영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그 분들은→ 애썼습니다.
신앙생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됐는데, 목사 안수 받은 지가 얼마나 됐는데, 직분 맡은지가 얼마나 됐는데~권사 되고, 안수 집사 받은 지가 몇 년 째인데~
아직도 죄의 유혹에 대해서 divine no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면 →
저는 1월이 가기 전에 내 영적 도약의 분깃점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경건생활에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이번 한 주간 사이에도 당신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divine no 거룩한 거절을 할 수 있는 순결한 신앙의 용기~
하나님만으로 즐거움을 삼는다면→이 세상에서 별것 아닌 것처럼 새롭게 여겨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부부 사이에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한다면→우리 그렇게 쉽게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1월을 보내면서
제가 게을리 했던 수덕신앙, 갈수록 죄 성을 벗고, 덕성과 영성을 쌓아가는 일에 진보가 있길 원합니다.
경건생활 영적수위가 달라지는 은혜를 갈망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성령님 저를 도와주시고, 다스려 주시옵소서.
영적수위를 높입시다.
경건한 생활로 승리합시다.
오직 주님만
(기도 초청 : 오직 주님만 나의 마음의 갈급함 채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