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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자료실 스크랩 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14 / 고린도전서 4:14-21 / 2015.04.22/ 박영선 목사
수호천사 추천 0 조회 40 18.05.01 12: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14
 

 고린도전서 4:14-21 / 2015.04.22 / 
http://lamp.kr/lamp-sermon/?p=9755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 교회의 신앙적인 가장 중요한 본질과 책임들을 오해하고 있는, 거르치고 있는 교회를 깨우치는 서신입니다.
저들을 여전히 성도라 부르는 것 기억하고 읽으셔야 됩니다.

 `잘못하면 잘라버리면 그만인데` 가 아니고, 

`그 속에서 신앙생활이 영위되고 투쟁하고 그리고 모두를 같은 은혜로 몰고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한다`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같이 갈지언정 각각의 역할, 잘못 아는, 그래서 오해를, 왜곡을, 혹은 그릇된 일을 유발하는 자와 그들과 맞서 교회를 지켜야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 양쪽을 권면해야되는 일이죠.

그 일에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는다는 것은, 믿음의 어른, 믿음이 좋고, 믿음이 크고,, 하는 일들은 가장 중요하게 나이로 분명하게 드러나야 됩니다.

오래 믿으셨고 오래 사셨으면 어른 노릇을 해서 `나를 본받어라` 고 얘기를 해야됩니다.

 `나를 본받어라` 는 것은 말 그대로 삶의 많은 시간 속에서 그래서 많은 경험 속에서 많은 도전 속에서 많은 경우를 어떻게 반응해야 되고, 어떻게 책임져야하는 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해야 합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실생활과 떨어진 명분과 옳고 그른 이야기와 이상과 기대와 많이 아는 것들로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는 할 수없이 상대방을 잡는 것 외에는 자기 증명의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각자의 인생을 각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으면, 여러분들이 어떤 한사람의 실패나 모자람과 혹은 오해에 대하여 

하루 아침에 그를 무너뜨리거나 꺽어 버리거나 외면할 수 없다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생에서 제일 많이 배우는 것은, 내가 그때 잘모르고 잘못 결정했으나 하나님이 그것으로 은혜를 담으셨다,, 그런 고백이 마땅합니다.

그 분별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너는 왜 못해? 너는 왜 못났어?` 이렇게 얘기하라고 그 교훈을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실패한 자리, 내가 몰랐던 자리에서 나를 지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어른이 되어 내 뒤를 좇아오는 현실을 사는 신앙인에게 격려하며 기다려주는 것으로 일하지 못하면, 

그것은 감히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가 보시면, 이 중요한 말씀에서 앞의 모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목적과 일하심과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운명이 되게하신 모든 일을 설명하심으로,,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니 영적인 예배는 기도원 가서 기도하는 것같이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형편, 현실, 실존 속에서 일어나는 책임있는 

증언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한계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매일 만나는 시험과 매일 확인하는 절망을 어떻게 믿음에 묶을 수 있는가? 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정답을 얘기하면, 내가 회개를 하면 모든 것이 정상화 되고 형통화 되고 확인이 되고,, 더 이상 뭘 할 필요없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실패하고 회개하고 실패하고가 거듭되고, 그러니까 회개를 더 진하게 하게 되죠.

그냥 하던 회개에서 철야로 가게 되고, 금식으로 가게 되고, 무슨 집팔아 헌금하고,, 하는 식으로 이 모든 일의 부작용은 그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오해에 있습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내 힘으로 못 일어나고 하나님이 나를 일으켰다는 것을 증언하는, 그래서 믿음을 가지는, 용서할 수 있는, 기다릴 수 있는 것으로 증언되지 않고, 더 무서워지고 더 경직되고 더 시퍼런 것으로 우리를 몰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가 두고두고 아직까지도 교회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는, 그리고 공격하는 말들 중 하나가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 입니다.

사랑은 뭘까요? 만나면 막 껴안고 좋아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는 더더욱 특별하게 비난과 정죄가 급하고 무섭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다려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기다려 주는 자가 어른 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의 가장 중요한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교회 안에서 넘어갈 수 없고, 교회 안에서 용서할 수 없고, 교회 안에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세상은 어디에서도 답을, 답을 제시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의 가치입니다!

교회는 많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그 공격을 우리가 멋지게 받아야 됩니다!

그걸 쉽게 답할려고 그러지 마십시요!
욕 안먹는 것이 답이 아니라,  그 욕을 어떻게 먹느냐 입니다.

초대교회는 순교를 당했죠. 순교는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어 나갔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십시요!

 `예수님은 여기까지 갔다,,` 이렇게 도덕성을 가지고, 윤리성을 가지고 극화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어떤 것인가? 보십시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죄인으로 몰지 마십시요! 저들을 위하여 내가 죽습니다,,` 이게 바울이 말하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 너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 라는 성경의 권면들 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놀라운 것이죠!

이렇게 함부로 무슨 수학 하듯이, 무슨 암기하듯이, 무슨 명분을 외치듯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깊이 신성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뭐죠? 용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기다림! 이걸 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를 본받어라` 는 더 구체적으로 유익을 위해서 `본받어라` 는 것입니다.

어떤 유익? 조급함,, 한계,, 우리의 한계 내에서 판정을 내리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보시면 누구나 경험하신 것처럼, 부모가 자녀 한테 만은 집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녀를 잡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 다 공감하실 것이죠. 자녀를 위하여 부모가 집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훌륭하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잡아서 훌륭한 것을 만들지 않고, 훌륭한 것은 언제나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역할을 말합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시죠.

모세는 출애굽에서 그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 만나러 올라간 그 사십일 동안 기다리던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듭니다.

하나님 진노하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에게 얘기하죠.

 `이 민족을 멸종시키고 너로 내가 새민족을 이루겠다` 모세의 반응이 대단히 놀랍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려면 내 이름도 빼 주십시요!` 이게 뭇슨 뜻일까요?

우리는 전에 시편 90편을 하면서, 시편 90편이 모세의 기도인데, 모세의 기도가 이스라엘의 못난 것을 실컷 얘기해놓고, 

 `하나님, 그러나, 그러나 이 백성을 기억하시고, 주께서 이루려던 뜻을 기어코 이루어 주십시요!` 이렇게 끝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억이 안나는 표정이니까, 가보십시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이 탄식은 그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써 겪은 인생의  못난 것, 그 절망, 좌절에 대한 솔직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끝은 앞하고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을 복주시고, 이 백성으로 하여금 그 행하는 일들이 영원한 일이 되도록 그 손길, 그 발길을 지켜주옵소서` 이렇게 끝이 납니다.

모세의 기도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의 독특함을, 혹은 특별함을 백성들과 구별하여, `쟤네들은 다 잘못했지만 나는 아닙니다` 이렇게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보내진 사람인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유능하고 잘났으면 잘났을수록 그것은 전부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의 모든 독특한 것들, 기가 막힌 칭찬받을 모든 일은 다 모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 하시듯,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그가 지은 백성들에게 배반을 당한 분이시며, 마땅히 심판을 하셔야할 분이, 

공의와 거룩으로 그 본질을 삼으시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참으신 것같이, 그 백성들을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같이,

그가 세운 모든 종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도록 하나님의 손길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적은 전부 이 백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하고싶은 얘기는 뭘까요? 

 `고린도 교회에서 큰소리 치는 이들이여, 생각해 보라! 당신들의 자랑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며, 무엇을 위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자신을 증명하고, 그러기 위하여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교회를 세운 목적과 예수가 죽은 일과 무관하다! 나를 보라!`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그러니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유능하고 특별하다고 느끼시면 여러분 모두가 유익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뭘 흠을 잡고 시비를 걸어 갖고는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덮고 더많은 짐을 나눔으로써, 교회의 가치를, 그리스도 십자가의 가치를 증명해 내는가가, 그게 모두의 관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되어서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런 윤리적 완벽으로 경도되어 시비를 걸고 정죄하는 것이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할 줄을 몰라서 부정적으로 확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 안짓는 것, 틀리지 않는 것, 사심이 없는 것, 부정이 없는 것이 전부로,, 그러면 `긍정적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는 답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건 뭐가 있냐고요?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기적을 베푸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함께 가겠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쟤는 틀렸고 나는 옳았습니다` 로 나누지 않고, 같이 가겠다고 모세같이 구는 겁니다! 

그건 바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로마서 9장,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런 의리!
이건 그리스도와 끊어져도 좋다는 걸로 `그럼 넌 예수보다 네 골육이 더 우선하냐?`이렇게 물어보는 건 바보들 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하신 방법이고, 진심이고, 예수 안에서 보이신 증거다! 를 내가 알고 있습니다!` 입니다!

제가 예수 믿고 살면서 우리 동료들, 목회자들과 만나서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면, 이 옳고 그른 게 최우선 순위라서, 의리는 두번째 입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그때 쌈마다 공감을 하면 친구고 반대를 하면 적이 됩니다. 그러니 이게 믿을 수가 있나요?
이거 뭐 대통령 뽑는 선거도 아니고, 그때마다 마음이 왔다갔다 하면 안되서, 내가 누구에게 "김 목사, 나랑 지옥까지 같이 가는거야" 이러니까,

"아, 지옥까지는 못갑니다!" ㅋ 그러니 여기까지 못 온거죠. 알아들으세요?

로마서 9장에 죽었다가 깨도 못오는 거죠.

`내 골육친척을 위하여는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모세가 `내 이름도 빼주십시요!` ,, 그렇게 빼서 예수가 죽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습니다. 죽어버린다고요!

그걸로 하나님이 죽음까지도 붙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죽음까지도!! 
죽음이란 하나님 외면하고, 하나님 밖으로 쫓겨나는 자리까지 예수로 묶었다! 그렇게 역사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십자가요, 예수의 죽음입니다!!

거기서도 생명이 살아날 수 있다고,,! 그게 기독교요! 그게 교회입니다!!
죄는 부패요 왜곡입니다! 
교회가 가장 치사하게 나오는 이유는, 진짜가 아닌  가장 가장 영광된 것이 썩으면 더 냄새가 고약한 것같이,  

교회가 부패를 가지면 도덕적인 부패로 나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본질! 예수, 십자가, 구원, 용서, 은혜, 기적, 부활이 썩어 나갑니다!!!

말들은 도덕 외에 할 줄을 모르고, 기독교의 진실한 본질들, 가장 중요한 내용들,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무엇을 주셨는가! 라는 근본이 녹아나 버리고, 싸움은 도덕만 남습니다!!!

도덕으로 싸우는 것은, 그건 입이 진 것입니다. 그건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틀린 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요새는 잠잠해졌지만, 아마 작년, 재작년, 한 삼년 동안은 한국교회 제일 공격을 받은 게 세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큰 교단에서도 이제 세습을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총회에서 가결되곤 했죠.

우리 교단에도 그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주 중요한 발언을 했죠. 그때 결정적으로 (뭐 제가 한 두번 훌륭한게 아니지만, )

 "세습문제를 다루는 건 교회 챙피다!! 그건 창피다!! 그걸 법으로 세워야한다는 거는 기독교를 부정하는거다! 그건 그다음 문제다! 아들이 하냐마냐가 아닌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 거기 복음이 있고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우선하고 전부이지, 권력으로 이해하여
세습이 문제가 된 것 아니냐? 거기가 어떻게 권력의 자리냐? 목사라는 게 어떻게 권력의 지위냐?

그래서 우리는 제기도 안했어요! 

우리 교단 목사들도 또 때로는 몹시 훌륭해요! 말을 알아들은 걸 보면,, ^^

그래서 밖에서 시비를 걸은 사람들이 있어요. 

`다른 총회들이 세습반대결의를 했는데, 법을 총회에서 가결을 했는데, 너희 교단은 왜 문제제기도 안하냐?`

우리가 뭐라고 그랬겠어요? 속으로만,, 속으로만 뭐라 그랬어요. ^^
그러니까 우리 모든 교회들에게 어디서 웃음이 사라졌는가 보세요.
왜 예수를 불러서 무서워 지는지,, 왜 기도를 동원해서 무서워 지는지,, 왜 웃음이 없는지,, 왜 용서가 없는지,, 왜 반갑지 않은지,,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내용,,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우리를 살찌게 하고 우리를 웃게 하는 것, 그것이 회복되어야죠!

그게 바울의 얘기예요. `나를 본받아라, 나를 본받아라,,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있냐?` 그런 의미예요!

뭐라고 되어있죠? 본문에 오시면,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부모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권세와 권력이 아니고, 우월감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너 나 대신 죽어라! 넌 평생 내 쫄따구다!" 그렇게 말을 하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그러니 잘 생각하십시요. 언제나 부모가 자식에게 져야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리고 믿음이고 자신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무얼 겁을 내십니까!

인생의 말년,, 나이들어서 외롭고 무력하고 외면당한다고요?
예수님이야말로 철저히 그렇게 당하셨죠! 바울도 그렇게 철저히 당합니다.

고린도 전후서는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고린도 교회가 제기하는 사도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도전 때문에 서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에 하나님의 종이 맞다면 왜 그모양 그꼴인가? 왜 하나님이 천상적인 능력으로 보호하고 확인시켜주지 않고, 그런가?` 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메시야에 대한 증언, 

`그가 마침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볼 때 메시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라나기는 연한 순 같고, 마른 줄기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곳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당하여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죠! 하나님이 일 그렇게 하신다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고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모가 되신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십니다!

그 신비와 그 위로와 그 감사를 누리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으로써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가 교회 안에 오시면, 뭐가 눈에 보이고, 뭐가 앞서 생각이 되면, 어른 노릇을 하십시요!

모두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능력 안에서 모두에게 복이 차고 넘치게 하도록, 여러분이 누구에겐강 덕을 보고, 누구의 희생과 기다림 속에서 여기 온 것같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후손에게 일을 하시고, 여러분의 이웃에게 이 역할을 하셔야 하는 것! 그게 기독교 신자의 마땅한 자랑입니다!! 권리입니다! 이 기쁨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마십시요!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15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나눈 이 얘기가 로마서 15장에서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아주 구체적,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을 보복하시거나 정죄해서 자신이 억울하지 않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시고, 비난을 감수하셨답니다.

기가 막히죠! 비난을 감수하셔서 우리를 참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지고 시간을 끕니다!

우리가 알아보고 알아듣고 깨우쳐 그 발 앞에 무릎 꿇어 감사와 경탄을 올려드릴 때까지! 그렇게 될 때까지 예수께서 기다리십니다!

참으십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그런 은혜를 받은 현실적 구체적 지위와 그런 걸 나누어져야할 시간적 역사적 자리에 있습니다!
나이가 그렇습니다. 최우선적으로, 먼저 믿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 영광 누리십시요! 그 영광 누리십시요!

 `너희는 나를 본받어라` 가 잘난 척하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여 시간을 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연장하는 귀한 책임을 맡은 것인가! 기억하시는 그런 인생을 자신에게서 확인하셔야 억울하지가 않습니다!

위대하고 경쟁을 벌여야하는 일들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위대한 것입니다!
누구나 누구의 부모거든요! 
누구나 누구의 자녀이고,, 박혁거세같이 뭐 알에서 태어났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귀한 기회와 지위와 자리를 주셨는가를 기억하여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라 되라`라는 말이
자신의 책임과 영광인 것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현실적인 여러분의 지금의 지위, 지금 여러분이 붙잡혀있는 정황, 현실이 여러분에게 허락하는 
기회요, 구체적인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그 기쁨, 그 특권, 그 자랑, 그 기대가 여러분의 삶에 늘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지위와 삶의 정황들이 이렇게 이렇게 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독특하고 너무나 귀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리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곳, 내가 처한 그 형편이야말로 성육신의 연장이요 하나니의 찾아오심의 확실한 구체적 자리입니다.

책임있게 굴어야죠! 명예롭게 굴어야 됩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참으로 기이한 일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그 기쁨 누려 우리가 사는 우리의 시대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교회가 가지는 영광,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책임, 귀하게 열매맺는 그 결과도 보는 우리의 인생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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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수요예배설교 녹취록 이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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