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2023년 계묘년 새해를 맞아 시산제를 겸한 답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3년만에 준비하는 시산제이고 보니 많이 기다려 집니다.
2009년 수원시 광교산下 사직단
2010년 충주시 몽산下
2011년 대전시 금병산下
2012년 강화도 고려산下
2013년 제천시 소라니골下
2014년 음성군 수정산下
2015년 평택시 오봉산下
2016년 이천시 설봉산下
2017년 시흥시 마산下
2018년 화성시 두견봉下
2019년 10주년 수원시 광교산下 사직단
2020년 진천군 매산下
,
2023년 용인시 부아산下에서
회원님들 모두의 정성어린 마음을 담아 시산제를 지내려 합니다.
답사때마다 아무 일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했듯이
올 한해도 무탈하게 자연을 공부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사 간절함을 담아 기원합시다.
따뜻한 밥상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총무 김 은희 올림*
1. 답사일 : 2023년 1월 8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30분 출발
3. 답사지
1) 부아산(아이 업은 산)下 시산제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려 합니다.
3년만에 올리는 정성입니다. 계묘년 소원성취 하시길 바랍니다.
2) 이재 선생 묘역 (용인시 이동읍 천리 산58번지)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이유겸(李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숙(李숙))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만창(李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4년 설서, 이듬해 사서가 되어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2년 장악원정·수원도호부사, 1713년 형조참의·대사성,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1719년 형조참판·승문원제조·부교리 등을 거쳐 경상도에 균전사(均田使)로 파견된 뒤, 당면한 토지 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2년 임인옥사 때 중부 이만성(李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고,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그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도암과시(陶菴科詩)』·『사례편람(四禮便覽)』·『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재 [李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박원형 선생 묘역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산 48-1)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증조부는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박문보(朴文珤)이고, 할아버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박영충(朴永忠)이며, 아버지는 병조참의를 지낸 연흥군(延興君) 박고(朴翶)이다.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이한(李澣)의 따님이다. 아들은 찬성사(贊成事) 박안성(朴安性)이다. [활동사항] 1432년(세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1434년(세종 16)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계공랑(啓功郞)을 제수 받고, 이어서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도염서령(都染書令)·병조좌랑(兵曹佐郞)·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사복시소윤(司僕寺小尹)·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1444년 사복시판관이 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고, 이듬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453년(단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좌부승지·우승지를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함길도 도순찰사로 나가서는 부령진(富寧鎭)을 설치하여 관방(關防)을 튼튼히 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야인(野人)에게 관작을 준 데 대하여 힐책하러 나온 명나라 사신 진가유(陳嘉猷)의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주문 겸 사은사(奏聞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1년(세조 7) 홍문관(弘文館)이 설치되자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으며, 1464년(세조 10)에 우찬성(右贊成)을 제수 받았고, 1466년에는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함길도존무사(咸吉道存撫使)가 되어 함길도에 가서 백성을 존무하고,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1468년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承政院)에 나가서 서무(庶務)를 의결하였으며,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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