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은 철저하게 평가 절하됐다. 최근에는 성군으로서의 자질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나 당시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일은 반정의 명분이 됐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은 폐위를 반대하고 자객이 난입해 인목대비를 시해라려 할 때 많은 하인을 끌고 가 이를 막아낸 인물이다. 광해군 시절 영화를 함께 했으나 탁월한 외교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인물로 당대의 평가를 받았다. 박승종은 반정 직후 광해군의 장인이기도 했던 아들 박자흥과 스스로 자결해 목을 매 현재 고양시 두응촌 선영에 모셔져 있다.
/취재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선조는 인원왕후가 사망하자 나이 쉰에 바로 후처를 맞이했다. 후처로 들어온 인목왕후 김씨는 갓 19살이었고 세자 광해군은 스물 여덟이었다. 어린 인목왕후가 공식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를 기화로 그렇지 않아도 광해군을 질시하던 선조는 영창대군으로 후계자를 바꾸려고 했으나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영창대군이 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은 후궁에게서 출생한 선조의 둘째 아들. 서자에 둘째아들에 지나지 않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 된 것은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 때문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후계구도를 확정해야 했던 것. 이는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몽진하게 되자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 밤 신료들의 인망을 얻고 있던 광해군이 세자로 지명됐다. 광해군은 임란 중 탁월한 역할을 했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와해된 정부기능을 회복한 것은 가히 광해군의 공이었다. 전란 초반의 연속되는 패전 속에서 광해군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바로 이것 때문에 광해군은 부왕 선조의 질시를 받았다. 선조는 임란 중에 수십 차례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수를 치기도 하면서 광해군을 곤경으로 몰아넣곤 했다.
선조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왕위에 오르게 된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과 적자인 영창대군이 1차 대상자였다.
인목대비 시해 위기에서 건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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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후 제주도에 유배돼 18년을 살다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 아들과 친정식구들을 모두 잃은 인목대비나 만년을 유배지에서 처절하게 살다 죽은 광해군이나 모두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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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워 제거하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 했다. 이에 왕후 김씨는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이 겨루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아버지 김제남은 사사된 뒤 부관참시 됐으며 오빠와 동생 등 셋도 살해되는 슬픔을 겪었다. 다만 어린 동생 천석만이 숨어살아 목숨을 보전했고 친정 어머니 부부인은 제주도로 유배돼 유리걸식하며 술을 팔아 여기서 유명한 모주(母酒)가 유래됐다.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는 대비 자신도 서궁에 유폐되고 왕후에서 폐위되는 폐모(廢母)의 변을 당했다. 이보다 앞선 1612년(광해군 4)에는 정인홍 일파의 사주를 받은 자객 윤인 등에 의해 시해될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한다. 다음은 연려실기술에 나온 당시의 기록이다.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이 이이첨, 한찬남 등과 상의하기를 “대비가 만약 살아 있게 되면 우리들은 마침내 땅에 묻히지도 못할 것이다”하니, 정조·윤인·이위경이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먼저 일을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12월 그믐날에 백대형과 이위경은 ‘역귀를 쫓는 굿을 한다’며 도적의 무리를 많이 거느리고 징과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경운궁으로 난입해 대비를 해치려고 했다.
이날 초저녁에 대비의 꿈에 선조가 슬픈 기색으로 와서 “도적의 무리가 지금 들어오고 있으니 피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고 했다. 대비가 꿈을 깨고 나서 울고 있으니 궁인이 그 이유를 물으므로 상세히 설명했다. 이에 궁인이 “선왕의 혼령이 먼저 타이르시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대신 대비의 침전에 누워서 기다리겠습니다”하여 대비가 잠시 후원으로 피했는데, 도적이 궁에 들어가 찾아서 해쳤다.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대비가 몸을 빼서 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이때 영의정 박승종이 사변을 듣고, 곧 하인을 많이 거느리고 서궁에 이르러 고함을 치면서 도적을 쫓으니, 백대형이 끝까지 대비를 찾지 못했다. 대비가 화를 면한 것은 실상 박승종의 힘이었다고 한다. 광해군에게는 대비가 정말로 죽었다고 했으므로, 반정하던 날에 대비가 있나 없나를 먼저 물었다. 그때에 대비가 다른 궁녀와 함께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그 궁인을 후원에 묻었는데, 반정한 후에 파내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폐모론 제기 때도 극력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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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반정비(仁祖反正碑)라고도 불리는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는 조선 16대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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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종은 1612년(광해군 4) 폐비론을 주장하던 이이첨의 사주로 그의 심복인 윤인, 이인경 일파가 경운궁에 난입해 인목대비를 죽이려 할 때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달려가 목숨을 걸고 인목대비를 지켰으며, 정청하는 날에도 끝까지 불참했다. 또 광해군 9년(1617)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극력 반대했다.
박승종은 폭음을 즐겼다고 전하는데 “내가 술을 즐겨함이 아니고 속히 죽기를 원하여 그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한 말로 임금을 깨우칠 수 없고, 만 번 죽어 은혜에 보답하여도 오히려 남음이 있겠네”라는 시가 한때 전송(傳誦)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친정이 멸문의 화를 당한 것도 정해진 수순이라 할 수 있다. 아들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친정 식구들까지 몰살을 시킨 광해군이 인목대비에게는 철천지원수였다. 게다가 자신을 폐위시키려고까지 하자 두 사람 사이는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하게 됐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도 갈 때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대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이른바 서궁유폐(西宮幽閉), 조선 500년에 유일무이하게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시킨 사건이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극도로 인심을 잃게 됐고 인조반정세력들은 이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 세력들은 대권을 잡자 인목대비를 다시 대비로 복위시켰다. 자신들의 반정이 인륜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음을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왕으로 책봉하는 일체의 권한을 대비에게 부여했다. 인목대비가 이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목대비의 교서에는 그간의 한과 증오가 서려있다.
“인목대비께서 교서를 내리셨다.…… 불행히 선조대왕께서 적자가 없으셔서 임시방편으로 장유의 차례를 무시하고 광해를 세자로 삼으셨다. 그런데 광해는 세자로 있으면서 덕을 많이 잃었다. 만년에 선조대왕께서는 세자를 잘못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광해는 왕이 되어서도 못된 일을 무수히 하였다. 그 중에서 큰 것을 들어보면 이렇다.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필이 되어 국모로 있은 지가 여러 해 되었다. 따라서 선조대왕의 자식들은 나를 어머니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광해는 참소하는 못된 신하들의 말을 믿고 스스로 의심의 발단을 일으켜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내 친족들을 몰살시켰으며 품속에 있는 어린 아이를 빼앗아 죽였고, 나를 욕보여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광해를 폐위시키노라…”
<인조실록 권 1, 1년 3월 갑진조>
광해군 장인인 아들과 자결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박승종은 아들 박자흥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으로, 일족이 오랫동안 요직에 앉아 세도를 누린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선산으로 달려가 아들과 같이 같은 밧줄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반정 후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적몰돼 박승종의 집은 김류에게, 아들 박자흥의 집은 이귀에게 불하됐다. 이후 홍호, 이준, 안방준, 송시열 등 누대를 이어 유신들과 후손들의 신원상소로 마침내 1857년(철종 8) 6월 13일에 관작이 복권된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검천땅에 있다가 뒷날 공주땅으로, 다시 천안 목천땅 관동으로 이장해 현재는 고양시 두응촌 선영 제 3묘역에 모셔져 있다.
숙민공 파의 시조인 박승종은 1562년(명종 17) 태어나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병술 9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예조참의를 거쳐 병조참의, 1598년(선조 31)에는 승정원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이듬해에는 동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선조 36)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607년(선조 40)에 병조판서가 된 후 1618년(광해 10) 우의정으로, 이어 좌의정이 됐다.
1619년(광해 11) 의정부 영의정 겸 도체찰사가 되었으나 쇠퇴해 가는 명나라의 국운을 알아차리고 신생국 후금(청나라)과의 등거리 외교를 주창해 외교의 귀재라 일컬었다.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항상 차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 속에 오리알만큼 큰 비상을 넣어두고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느냐”하며 흐느껴 울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