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코스
▶ 진남문(가산산성 주차장)-동문-중문-가산바위-용바위, 유선대-가산-할머니할아버지바위-치키봉-휴게정자-주차장
○ 산행시간(휴식시간포함)
▶ 약 5시간
○ 산행난이도(상/중/하)
▶ 중
○ 들머리 찾아가는 법.
▶ 네비게이션을 가산 주차장 또는 가산산성으로 맞추세요
가산 !!
경북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 경계를 이루는 가산 (801.6m)은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과 맥락을 같이하는 산이다
팔공산 정상인 비로봉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릉이 약 5km거리인 파계재에서 잠시 가라 앉았다가
다시 산세를 높혀 약 1.8km 더 나아가 한티재에서 숨을 고른후 약 5km 거리애 이르러 빚어 놓은 산이 가산이다
팔공산 도립공원 가산산성지구에 속해 있는 이 산은 그동안 팔공산 그늘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요즘 목적산행을 하는 산꾼들은 "가팔환초"라 하여 가산, 팔공산, 환성산, 초례봉을 이어서 산행하는
팔공산 환종주로 많이 산행한다
또
대구 시민들에게는 매우 인기있는 근교산행 코스로
대구 시내에서 산으로 가는 길과 거리도 팔공산 들머리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산자락에는 가산산성, 도선국사기 지기를 눌렀다는 가산바위, 할아버지, 할머니바위등이 있다
가산산성은
국가지정 사적 제216호(1971. 3.26)로 지정되었으며 포곡식 석성, 전략성구조이다.
가산의 해발 901.6m에서 산골짜기를 에워싸 해발 600m에 이르도록 내·중·외성을 축조하였는데,
현재 사문지(四門址)와 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인조17∼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요청으로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26년(1648)중수되었고
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710보(步)이고 여장(女墻)1,887첩(堞)이 설치되었으며,
동·서·북문의 삼문과 8개소의 암문, 연못9개소, 우물2개와 장대인 진남대(鎭南臺)·창고 7개소, 빙고(氷庫)하나,
사찰 4개 등이 설치되었다.
성이 완성되면서 칠곡도호부가 되고 군위, 의흥, 하양, 신녕의 고을이 이 산성에 예속되었다.
외성은 숙종26∼27년(1701)에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3,754보이고 1,890첩의 여장을 두었으며 성문은 남쪽에 만들고 북·동·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중성은 영조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요청으로 길이 602보이고 402첩의 여장과 중성문이 만들어졌다.
산성 별장이 거처하는 위려각(衛藜閣)을 비롯하여 성안에는 객사(客舍)인 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堡樓), 포루(砲樓),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행정적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진성(鎭城)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요시설은 내성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이 산성에 입보(立保)할 예정된 네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와 군기(軍器)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절터가 많이 있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남문에 홍예(虹霓)는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가파른데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은 외성의 남문이 홍예문이며, 다른 성문들은 앞쪽만 홍예이고 뒤쪽을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든
특수한 문의 구조로 되어있다.
성내의 사방에 포루, 장대, 남창, 군창, 영창, 군기창, 장적고 등의 창고와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남아있는 곳은 없으며 다만, 남창마을과 북창마을의 명칭에서 남창지와 외북창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 외, 중성과 동문, 동암문은 보존되고 있다.
또한 산성내에는 보국사, 천주사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승장을 뽑고 승려들을 모아 궁술을 연습시켰다고 하나
현재 일부 사지의 주위에 당간지주만 남아있으며
「장군정(將軍井)」이라고 하여 장군들이 마셨다고 하는 우물이 남아 있어 산성내에 많은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정엔 나직한 7개의 봉으로 둘러싸인 平頂을 이루어 사방으로 7개의 곡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임란시 곽재우 장군이 왜병을 물리친 천생산성(구미시 지방기념물제12호)과 6.25전쟁당시
대구사수의 격전지였던 유학산에 연결되어 산성을 축조할만한 충분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하는 동래-밀양-대구-상주-충주-서울을 잇는 상경로의 요충지로서 임란때에는 명의 원군 5천여명이 진주하였으며
선조26년(1593)에는 경상감영을 설치하여 선조29년 달성으로 감영을 옮기기까지 도정을 관장하였다.
그후 산성을 축조하여 산성안에 칠곡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자료: 칠곡군청 문화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