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억불정책[抑佛政策]을 펴고 유교를 장려한 배경에는, 고려말 불교의 폐단으로 타락한 불승과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삭발을 하고 출가를 해 산사로 들어가서 해탈에 이르기위한 자기수양에 전념하지않고 오히려 환속해서 갖종 이재나 정치에 간섭하고 축첩을 하고 주색에 빠져 세인으로부터 비난받았던 신돈(辛旽)은 타락한 불교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이 억불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불승의 타락과 같은 현상이 예전부터 한국과 중국의 불교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있었습니다. 조선 사료에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글은 많이 있습니다.
조선이 오래동안 믿어온 불교였지만 타락한 불교는 더이상 조선의 국교로서 부적합한 종교임을 새로운 조선이 열리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런 세속으로 타락한 불교와 달리 알라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슬람 사회는 금주(禁酒)와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있고,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형벌이 솜방망이 수준의 한국과는 달리 매우 엄합니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가 있는 방향으로 전 이슬람인이 예배를 드리며 신에 대한 외경심을 잃지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라마단이라는 9월 한달의 금식기간 동안 일출에서 일몰까지 음주,흡연,취식등을 금하며 먹지않고 절약한 음식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금식기간 동안에는 하루에 5번씩 신에 대한 기도를 올리며 물로 금식으로 인한 배고픔과 고통을 참아냅니다.
이슬람인들의 이런 경건하고 무욕의 삶이야말로 이슬람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손들이라는 증거이며 그들이 진정한 선민(選民: 선택된 사람 : CHOSE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조선과 중국의 탈바가지를 쓰고 고기를 즐겨먹고 정치에도 간섭하고 책을 써서 인지세를 받고, 방송국을 운영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는 타락한 한국과 불교의 승려들과 비교되는 이슬람교가 바로 유교를 뜻하며 이슬람인(유교인)들이 진정한 조선의 후손임이 분명합니다
----------------------------------------------------------------------------
억불정책[抑佛政策]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의 문벌귀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교를 견제하게 되었다.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초
기에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데 공헌하는 등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숭불정책이 유지되지만 태종 이방원이 정권을 잡으면서 억불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서울 외곽 70여개의 사찰을 제외하고 전국 사찰의 재산과 노비를 몰 수 하였다. 조선 초기 11개의 종단을 7개 종단으로 축소하였고 세종은 다시 7종을 2종파로 줄였으며 불교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억불정책은 다소 약해지지만 성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엄격하게 불교를 탄압하였다. 사대부가문의 양반들이 승려가 되기위해 출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도첩제를 실시하였고 부녀자의 출가는 원천적으로 허가되지 않았다. 양반가에서 승려가 되려고 하는 자는 100필의 포를 세금으로 내어야 했고 일반 백성은 150~200필을 바치도록 했다. 하지만 1492년 이러한 도첩제마저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한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군역이나 부역에 종사하게 했다. 연산군이 즉위하여 흥천사와 흥덕사, 대원각사를 모두 폐찰시켰으며 승려들은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보다 더욱 심한 억불정책을 추진하였다. 《경국대전》에 나와있는 승려의 출가를 규정한 도승조(度僧條)마저 삭제해버렸는데 이는 조선에서 불교를 없애버리는 폐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조선의 불교의 승려에게는 환속이 강요되었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작은 암자를 짓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
동문선(東文選) >> 서(序)>> 권근(權近)
내가 일찍이 불씨(佛氏)의 설(說)이 세상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 너무 심한 것을 근심하여 말해 주기를, “하늘의 하늘된 것과 사람의 사람된 것에 있어 유가(儒家)와 불씨의 설이 같지 않다. 역상(曆象)이 있은 이래로 추울 때 되면 춥고 더울 때 되면 더우며 해와 달의 둥글고 이지러지는 것이 모두 도수(度數)가 있어서, 천만세(千萬世)를 두고 사용하여도 틀림이 없는 것이니, 하늘이 하늘된 이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씨의 수미(須彌)라는 설이 틀린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온갖 물건을 화생(化生)하는데, 음양과 오행이란 것은 이(理)도 있고, 기(氣)도 있어서 그 전체를 타고난 것은 사람이 되고, 그 한쪽을 타고난 것은 물건이 되기 때문이므로, 오행의 이치가 사람에게는 오상(五常)의 성품이 되고 그 기운은 오장(五臟)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유가의 설이다. 의원은 오행을 가지고 그 장(臟)과 맥(脈)의 허실을 짚어 병을 알고, 점치는 사람은 오행을 가지고 쇠(衰)하고 왕(旺)한 기운을 따져서 그 운명을 아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천만세를 두고 그 방법을 사용하여 모두 경험한 것이니, 사람의 사람된 이치가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불씨의 사대(四大)란 설이 허망한 것이다. 그 시초를 따져 들어가서 사람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알 수 없으면 그 끝을 되찾아본들 사람이 죽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윤회(輪廻)한다는 설도 또한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하여, 내가 이 이론을 주장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와서 삼봉 선생(三峯先生)의 《불씨잡변(佛氏雜辨)》 20편(篇)을 보니, 그 가운데 윤회와 오행과 의원과 점치는 이야기가 가장 명백하게 되었고, 그 외에 변론해 논 것 또한 지극히 자세하고 명백하여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생이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이치를 밝히어 어쨌든 그 배운 것을 실행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칠 뜻이 있어서, 토론할 기회만 있으면 쉬지 않고 극력 변론하여 가려내니,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자세히 듣고 따랐다. 일찍이 심(心)ㆍ기(氣)ㆍ가(理)의 세 편을 지어서 우리 도(道)와 이단의 편벽되고 정당한 것을 밝혀 놓았으니, 그 명교(名敎)에 대한 공이 컸으며, 거룩한 조정을 만나 왕화(王化)를 도와 일대(一代)의 다스림을 일으켰으니, 배운 도(道)를 다 실행하지는 못했으나 그만하면 대강 되었다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선생의 마음은 아직도 허전한 생각이 있어서 반드시 그 임금과 그 백성을 요(堯)ㆍ순(舜) 때와 같이 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이단에 대해서는 더욱 깨끗이 다 없애버리지 못하는 것을 당신의 책임이라 걱정하고, 무인년 여름에 병으로 며칠 동안 휴식하는 틈을 얻어 또 이 글을 만들어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불씨의 해독이 윤리를 폐기하여 반드시 금수로 이끌어서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 명교(名敎)를 주장하는 사람은 마땅히 적대시하고 힘껏 쳐 없애야 한다. 내가 일찍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때가 돌아오면 반드시 이단을 깨끗이 없애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주상의 알아주는 은총을 입어서 내 말대로 들어 주시고 내 계획대로 시행하시니, 이만 하면 내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으나, 그래도 없애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결국 없애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울분한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이 글을 지어서 후인들이 언제라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며, 사람마다 알아 듣게 하기 위하여 그 비유해 놓은 것이 속되고 지저분한 곳이 많으며, 저것들이 방자하게 굴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그 말이 분격한 데가 많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면 유(儒)와 불(佛)의 정당하고 간사한 판가름은 환하게 알 수 있으리니, 비록 이 시대에는 시행이 안 되어도 후세에는 전할 수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안심되는 일이다.” 하였다.
내가 받아 가지고 쉬지 않고 읽으며 탄식하기를,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바른 길을 막을 적에 맹자(孟子)가 말로써 물리쳤고, 불법(佛法)이 중국(中國)에 들어오매, 그 해독이 양주 묵적보다 더 심하며 선유(先儒)들이 왕왕 그 그른 것을 물리치긴 하였으나, 능히 글로 지은 사람은 있지 않았다. 당(唐) 나라 한자(韓子) 같은 재주로도 장적(張籍)과 황보식(皇甫湜)의 무리들이 따라다니며 배우는 처지였으나 오히려 글을 지어 놓지 못했거든, 하물며 그 이하의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선생이 전부터 극력 변론하여 당시의 학자를 교화시켰고, 또 글을 지어서 후세에 교훈을 남겼으니, 도(道)를 근심하는 생각이 몹시 깊고 원대한 것이다. 사람이 부처에게 혹하는 것이 소위 사생(死生)에 대한 말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선생은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를 물리친다면 죽어서도 편하겠다’ 하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미혹(迷惑)된 것을 없애주려는 것으로 남에게 보인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하겠다. 맹자는 삼성(三聖)의 계통을 이었다 하는데, 선생은 또한 맹자의 계통을 이은 분이니, 장자(張子)의 이른바, ‘홀로 서서 두려움이 없고 정(精)하고 한결같음으로써 자신을 가져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다’라고 한 것이, 참으로 선생에게 적합한 말이라 하겠다.” 하였는데, 내가 진실로 공경하고 복종하여 배우고자 하기 때문에 일찍이 말했던 것을 써서 질정하는 것이다.
----------------------------------------------------정도전(鄭道傳)
사람에게 먹는 것처럼 큰 일은 없다. 하루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며 또한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을 수도 없다. 먹지 않으면 생명에 해롭고, 구차하게 먹으면 의리에 해롭다. 홍범(洪範) 팔정(八政)에 식화(食貨)가 먼저이고, 백성에게 5교(敎)를 중하게 여겼는데, 오직 식(食)이 첫째를 차지하였으며, 자공(子貢)이 정사를 물으니 공자도 ‘먹는 것부터 족하게 하라.’ 하였다. 이것은 옛 성인이 백성이 살아가는 데는 하루라도 식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모두 이에 급급하여서, 곡식 농사[稼穡]를 가르치고, 공(貢)과 세(稅)를 제정하며, 군국(軍國)에 수요(需要)가 있고, 제사ㆍ빈객에 장만이 있으며, 환과(鰥寡) 노유(老幼)의 부양이 있어서 헐벗고 굶주리는 탄식이 없게 하였으니, 성인이 백성을 생각함이 원대(遠大)하였다.
위로 천자ㆍ공경 대부는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먹고, 아래로 농공 상고(商賈)는 힘써 근로함으로써 먹고, 중간인 선비는 집안에서 효도하고 집밖에서 공손하여, 선왕의 도를 지켜 후학을 가르침으로써 먹고 사니, 이는 옛 성인이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고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각각 그 직분이 있어, 하늘의 양육을 받았으니, 그 백성을 보호함이 지극한 때문이었다. 이 반열에 들지 않은 자는 간악한 백성이라, 왕의 법에 반드시 베어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 “그때 세존(世尊)은 식사 때가 되면 옷을 입고 바리때를 가지고 위성(衛城)에 들어가 거처하고 그 성중에서 빌어먹었다.” 하였다. 대개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자는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을 불의(不義)라 하여, 인륜의 밖에 나가서 농사일을 버리고, 끊임 없이 나는[生生] 사물의 근본을 끊고 그의 도로써 천하 풍속을 바꾸려 하니, 진실로 그의 도와 같이 한다 하면 천하에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동냥 줄 사람인들 누가 있겠으며, 천하에 먹을 것이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니, 과연 빌어먹을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란 자는 서역 왕(西域王)의 아들로서 아비의 작위를 불의(不義)라 하고 뛰쳐나가니,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며, 남자가 밭갈고 여자가 베짜는 것을 불의라 하여 버리니,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무엇인가. 군신ㆍ부자ㆍ부부가 없으니, 또 선왕의 도를 지키는 자도 아니다. 이 사람은 비록 하루에 한 낟알을 먹더라도 모두 구차히 먹는 것이다. 그의 도와 같이 한다면, 지렁이와 같이 먹지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빌어먹을 것은 무엇인가. 자력(自力)으로 먹을 수 있으면 불의가 되고, 빌어먹으면 의가 되는지. 불씨의 말이 옳지도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음은 책을 펴보면 문득 알게 되므로, 이에 논변(論辨)한다.
불씨가 처음에는 걸식하여 먹은 것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군자가 오히려 불의라 꾸짖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건만, 지금은 화려한 집에서 풍족한 의식으로 임금의 봉양과 같이 편히 앉아 먹고, 전원(田園)과 노비를 널리 두어 문부(文簿)가 공문서보다 더하며 분주하게 공급함이 공무(公務)보다 준엄하니, 그 도에 이른바 번뇌(煩惱)를 끊고 속세를 벗어나 청정(淸淨)하여 욕심이 적다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앉아서 의식을 허비할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라고 거짓 칭탁하여 여러 가지 공양으로 반찬과 밥이 낭자하고, 무늬 있는 비단을 찢어 당간(幢竿)과 번기(幡旗)를 장엄하게 하니, 대개 평민 10호(戶)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허비한다. 아, 의리를 버리고 이미 인륜을 좀먹는 악인[惡賊]이 되어, 하늘이 낸 만물을 해쳐 휩쓸어버리니 참으로 천지의 큰 좀이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위에는 예(禮)로써 그 거짓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래에는 학문으로써 그 가려진 것을 열어줄 이가 없으니, 혼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일(精一)하여 스스로를 믿고 남보다 뛰어난 재주 있는 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 사이에 똑바로 서서 더불어 시비를 견주며, 득실을 따지겠는가.” 하였다. 아, 선현[先正]이 깊이 탄식한 까닭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
조계종 승려들의 부도덕한 타락한 현장을 목격하고 그 일을 폭로한 성호 스님에 관한 기사입니다
조계종 승려 도박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성호 스님은 “신밧드 룸살롱을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가봤다는 명진 스님이 당시의 진상을 육하원칙에 따라 밝혀야 할 것”이라고 재차 주장했다.
총무원 호법부장 정념 스님이 16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명진 스님 말씀이 자승 스님은 다른 곳에 있다가 중요한 얘기를 하자고 그래서 (신밧드 룸살롱에) 왔다고 한다. 장소가 적절치 않아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나가셨다고 한다”고 말한 데 대해 성호스님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서울신문>이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성호 스님은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명진 스님이 잘 알고 있는 만큼 신밧드 룸살롱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릴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포커판을 “놀이 문화”라고 표현한 총무원 호법부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스님들이 모이면 화엄경을 봐야지 왜 카드를 보느냐”고 반박했다.
성호 스님은 문제의 신밧드 룸살롱에 대해 “나도 가본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성호 스님은 신밧드에 대해서 ‘2차’(성매수의 은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풀코스 룸살롱’으로, 방이 40개 정도 있으며 여자 종업원이 150명가량 있었다고 전했다. “다른 스님을 목격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성호 스님은 “그건 말할 수 없지만 자승·명진 스님의 2001년 술자리에는 J, W 스님도 동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의 신밧드 룸살롱은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영업을 해 오다가 두 차례 이름을 바꾸어 현재는 A 룸살롱으로 영업하고 있다. 업소는 지하 1층에 있는데 5층에 있는 모텔까지 바로 연결되는 구조다. 경찰 관계자는 “업소에 들어갈 때는 가발을 쓰고 평상복을 입는데 스님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다.
첫댓글어느 종교에도 미꾸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먼 사이비 땡초 중들이 더러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 기독교도 거의 같은 수준이다. 말하지 않아도 세인들이 잘 아는 여의도의 대형교회의 비리와 그 목사와 아들에 대한 비리,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권리금으로 교회를 사고 파는 것이 엊그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 개척교회의 타락상을 나열하자면 엄청 많아 지면에 옮기기 힘이 듭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불교를 비판하면 왜 기독교 신자로 생각하시는요? 불교는 수천년전부터 비판받아온 종교입니다. 고려말 대표적인 땡중이 신돈입니다. 무신론에도 영향을 끼친 종교가 불교이지요 도올 김용옥도 우리나라 불교를 몹시 비판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우리나라의 불승들 상당수가 조폭출신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주지선거때 쇠파이프가 난무했던겁니다
첫댓글 어느 종교에도 미꾸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먼 사이비 땡초 중들이 더러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 기독교도 거의 같은 수준이다. 말하지 않아도 세인들이 잘 아는 여의도의 대형교회의 비리와 그 목사와 아들에 대한 비리,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권리금으로 교회를 사고 파는 것이 엊그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 개척교회의 타락상을 나열하자면 엄청 많아 지면에 옮기기 힘이 듭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불교를 비판하면 왜 기독교 신자로 생각하시는요? 불교는 수천년전부터
비판받아온 종교입니다. 고려말 대표적인 땡중이 신돈입니다. 무신론에도 영향을 끼친 종교가 불교이지요
도올 김용옥도 우리나라 불교를 몹시 비판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우리나라의 불승들 상당수가 조폭출신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주지선거때 쇠파이프가 난무했던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