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계간 시와표현 원문보기 글쓴이: 시와표현
김춘리 시집 :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바람의 결, 화사華奢의 언어
신상조
김춘리의 첫 번째 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읽는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번 시집의 표제로 사용한 작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시인은 시집 곳곳에서 ‘바람’을 수없이 노래한다. 일차적으로는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소설의 저 제목이 자연스레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바람’과 시인의 시에서 나타나는 ‘바람’의 기능과 속성에 대한 분별이 무엇보다 큰 이유였다. 소설과 시의 문법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새롭게 감각한 경험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예컨대 “우리는 시간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셈이지. 우주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어. 그냥 바람이지.”라는 하루키 인물의 대사는 ‘바람’이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존재적 삶의 형태를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인생을 비유하기 위해 차용한 ‘바람’이라는 어휘가 어떤 논리적인 호소보다 힘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에 천착한 김춘리의 시작詩作은 그 ‘바람’을 다시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수사학적 언술 방식에 특히 민감하다. 시인의 시에서 ‘바람’은 “방목의 바람”(「외벌 날개」)이거나 “구름”과 “새”의 뼈(「돌의 부화기」), 짐승의 “뿔에 새겨진 눈금들”(「염소」), “베틀”에 걸리는 “씨줄과 날줄”(「세모시」), 신문을 읽는 “독법”, 혹은 “탁탁 소매를 터는” 양태(「바람구독일보」), 떨리는 “꽃의 입술”(「화농의 봄」) “거문고 울림통에 걸린 (…) 무늬” 등으로 천변만화한다. 때문에 “그녀의 시는 철저히 비유에 깃들어 사는 꽃잎이다. 어느 한 문장도 쉽게 서술을 허락하지 않는다.”(우대식)는 평가는, 그러한 시인의 남다른 시적 감각을 주목한 데서 비롯했을 터이다.
주지하다시피 추상적인 상상이나 느낌을 인물의 행위와 시간적 과정이라는 구성적 스토리에 기대어 전달하는 소설과 달리, 시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느낌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직접 제시하는 양식이다. 시인이 선택한 한 국면을 객관적이거나 주관적 묘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함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양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상적 삶 너머에 있는 숨겨진 삶의 진실이기 십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집의 표제작을 살펴보자.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잔잔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대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
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
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
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_「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전문
김현은 1986년에 쓴 일기 어디쯤에다 엘리아드의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옮겨 적는다. “망명자는 누구나 이타카로 되돌아가고 있는 율리시즈이다. 모든 생활은 오딧세이, 이타카로 가는 길, 중심으로 가는 길의 모사이다. (…) 저마다 자신의 다리와 악으로 집으로 가고 있다.”(『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p.26.)라고 말이다. 그런데 엘리아드의 문장이 함의하는 바가 과연 진실일까? 위의 시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김춘리의 언어로 얘기하자면 우리 모두는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 자들, 그러므로 망명자로 시작해서 끝내 망명지에 머물다 간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에서 중심 제재 중 하나는 “민들레”고, 그것은 우선 “유목”으로 은유된다. 나아가 바람을 타고 떠돌던 민들레의 씨가 땅에 닿아 자라는 모습은 “장막을 친다”로, 민들레가 자라는 땅은 “게르”로 공간화 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천막의 종족”들로 일컬어지는 부족민의 일상이 놓임으로써 민들레가 펼쳐 보이는 유목적 생존의 형태는 부족민의 삶으로 치환된다. 2연의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와 3연의 “아이를 달래는 밤” 사이에 놓인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란 해석이 두 대상에 대한 추론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춘리의 시는 시적 의미와 효과를 얻기 위한 이미지적 언술이 탁월하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 모두를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냈을 때, 시에서 삶의 보편적 양상은 ‘떠남’과 ‘떠돎’으로 형상화된다.
비유는 ‘민들레/ 유목’과 같은 어휘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전편에 걸쳐 은유되기도 한다. 게다가 “어느 대代” “한 채의 게르” “떠도는 혈통” 등의 구를 포함하는 문장은 따지고 보면 어느 게 민들레에 관한 것이며 어느 게 부족민에 대한 비유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녹아들어 있다. 이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출 뿐 자리를 다투지 않거니와,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이란 시의 결미는 인생과 자연이 구분되지 않는 경지를 빚기에 이른다. 결국 대상 간의 동일성에 기반을 둔 비유 끝에 다다르는 시적 의미의 지점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 모든 존재적 삶의 창출이다. 뿐만 아니라 시는 정주적定住的 형태의 안락함을 벗어난 유목적 정황을 통해 암시적이고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끓는 수태차의 온기”로 우리를 대접한다.
이처럼 김춘리의 시에서 비유는 단순한 수사의 기교를 넘어 세계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마치 비유의 수집가처럼 갖가지 비유를 동원해 이미지의 가시화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이 종국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시인만의 독특한 심상적 공간이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어디쯤 구름이 압축되고 있다
구름을 짜면 비가 나온다.
가끔 삐져나온 번개가
땅에 떨어져 풀이 자라기도 한다.
구름이 깻묵을 개고 있다
따끈함과 끈적거리는 것들을 뭉쳐
동글납작한 떡밥을 만들어
낚시 바늘에 끼운다.
폐곡선이 그어진 하늘, 구름의 어깨 위로
고소한 무늬가 퐁당거리며 구겨진다.
깻묵에도 씨가 있다. 굵고 실한 어종들이 입질하는
떡밥, 미끼에 걸려 한쪽으로 치우친 구름떼, 도랑을 콸
콸 적시는 비를 뿌리기도 하고 떡밥 떨어진 미늘은 햇
살 한줌 걸고 있다.
깻묵을 비비면 빗방울이 촉촉하다
시장입구 방앗간에서 깨 볶는 냄새가 고소하다.
이런 날 물고기들 튀고
비가 온다.
_「구름의 낚싯밥」 전문
이 시의 주된 회화적 프레임은 낚시터에 비친 하늘이다. 낚시꾼이 “동글납작한 떡밥”을 만들어 “낚시 바늘에 끼”운 후 물에 던지는 장면을 그려보자. 낚싯줄은 수면에 비친 하늘에 “폐곡선을” 긋는다, 찌가 잠기면서 일어나는 잔물결은 물속 “구름의 어깨 위로 (…) 무늬가 퐁당거리며 구겨”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가끔 “번개”가 친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질 기세다.
이와 같이 시각적 감각이 시의 표면에 기능한다면, 후각적 감각은 환유적 이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이질적인 대상들을 하나로 묶는다. 가령 깻묵으로 만든 떡밥은 그 고소한 냄새 때문에 붕어나 떡붕어에 흔히 사용하는 미끼다. 여기서 깻묵이 촉발하는 감각은 “시장입구 방앗간에서 깨 볶는 냄새”를 환기시키고, 참기름을 짜기 위해 깨를 “압축”하는 장면에 대한 연상은 “구름이 압축”되면 비가 온다는 1연의 공감각적 이미지를 또한 자동적으로 불러온다. ‘구름’과 ‘낚시’와 ‘방앗간’은 비유하기에 터무니없이 거리가 먼 대상들이지만, ‘냄새’와 ‘압축’이라는 인접성을 따라 이미지 이동이 일어남으로써 ‘비오기 직전’의 풍경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깻묵을 비비면 빗방울이 촉촉하다”라거나, 혹은 “시장입구 방앗간에서 깨 볶는 냄새 고소”한 날, “물고기들 튀고/ 비가 온다.”는 식의 논리와 무관한 인과관계는, 그러므로 시인만이 지각할 수 있는 세계의 법칙이자 심상이기도 하다.
시에서 놀라운 표현이 완벽한 구조까지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기란 참으로 매력적이다. 자신만의 감각으로 쌓아올린 이미지의 궤적으로 무뎌진 독자의 감성에 충격을 가하는 일은 시인만의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의 상상 속에서 비 그친 “도랑”과 “햇살 한 줌 걸린” 하늘은 아연 활기를 얻고, 낚시꾼의 여유로움과 방앗간의 일상이 축제처럼 만난다. 이러한 양상들은 시의 구성 요소인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 중에서 시인이 이미지를 보다 중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사적 방식이 유난히 눈에 띈다고 해서 김춘리의 시를 그렇게 해석할 수만은 없다. 일상성을 비틀어 엮어내는 시인의 인식은 때로 놀랍기까지 하다. 가령 「화장법」에서 시인은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첩을 두드”리는 행위야말로 “전생의 얼굴을 기억하는” 거라고 설명한다.
누구에게나 화장법이 있고 전생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각자의 화장법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첩을 두드린다.
얼굴의 움직임 따라 기억되는 화사華奢의 뒷면에는
미래로부터 온 별자리가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중략)
서양 어느 마녀의 화장법엔 뒤뜰의 그늘을 바르고 그
날 처음 본 얼굴을 빼앗거나 훔쳐 바른다고 한다. 불안
한 눈매는 불안한 눈을 빼앗고 비스듬한 뺨의 색깔은
기울어진 마음을 빼앗는 화장법으로 간직했다고 한다.
이 화사의 상술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분장하기도 하
고 치명적 자존심을 치유하기도 하는 독법이 있다. 매
끄럽고 화려하게 그려진 전생은 늘 낯선 곳을 여행한
다. 가장 동경하는 것은 지금의 내 얼굴, 나는 이 낯선
얼굴이 좋다.
화장을 끝낸 분첩 ‘딱’소리 내며 전생을 닫는다.
_「화장법」 부분
주디스 버틀러는 인간이란 타인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김춘리에 따르면, 내게는 타인의 흔적, 즉 수없이 많은 ‘전생’이 내재한다. 타인의 ‘흔적’이란 주체에게 가해지는 외부적 영향인 동시에, 누대에 걸친 축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고, 다른 이들과 나의 ‘차이’도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전생의 얼굴을 기억하는” “화장법”이란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내게 내재된 타인의 ‘흔적’을 감춤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서양의 어느 마녀”가 남의 얼굴을 빌려 살듯이, 화장은 진정한 나를 지우고 내가 동경하는 ‘타자’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때의 ‘화장’은 타인의 흔적으로 구성된 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페르소나를 지시하는 기만적 표상이 된다. 물론 이 시의 목적이 그것들을 드러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보다시피 “화사의 상술”은 “죽은 자를 분장”하기도 하지만, 산 자의 “치명적 자존심을 치유하기도” 한다. 해서, “분첩을 두드리는 (…) 화사華奢의 뒷면에는 미래로부터 온 별자리가 지도처럼 그려”진다. 삶의 선행 여건이자 필수 조건이 ‘화장’임을 시인은 강조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 시의 펀fun적인 요소이자 비밀은 ‘화장化粧’이 ‘화장火葬’과 동음이어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나’는 타인의 ‘흔적’인 주체로서, ‘가면을 쓴 인격’으로 살아간다. 타인의 흔적(전생)을 간직한 채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나’가 현재를 직접 맞대면한다고 보기란 어렵다. 결국 주체란 “매끄럽고 화려하게 그려진 전생”으로 “늘 낯선 곳을 여행”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가장 동경하는 것은 지금의 내 얼굴, 나는 이 낯선/얼굴이 좋다.”란 화자의 고백이 아이러니로 다가오고, “화장을 끝낸 분첩 ‘딱’소리 내며 전생을 닫는다.”라는 묘사가 섬뜩한 울림을 갖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노릇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화장’이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아울러 삶의 전제조건인 타인의 흔적과 페르소나가 ‘나’의 “화장법”이다. 그러니만큼 화장化粧을 끝내고 화장火葬되는 순간이야말로 “전생을 닫는” 시간임은 분명하다. 김춘리 시인이 일상적 경험에서 낯선 예지銳智를 발견하는 “수사학적 노동자”라는 사실이 새삼 입증되는 대목이다.
이렇듯 김춘리의 언어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는 종족의 방언처럼 낯설고 아름답다. 그녀의 시는 “매듭실을 왼쪽/ 둘째손가락에 끼워 두 번 감아 엮고 오른쪽 끈 가닥을/ 두 번 감아 반대편으로 엮는”(「두벌 감개 매듭」) 정성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언어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파토스에 충실하기보다는 매만지고 궁구하는 조탁彫琢에 힘을 쏟기 때문이다. 아울러 “내 안의 것들이 눈을 찾지 못하듯 눈目이 닫혀져 있을/ 때만 내 안에 흐르는 것들을 볼 수 있겠다. 안쪽을 향하/고 나를 바라보는 눈감은 응시凝視, 스스로 엄숙하고 혼/자서 애절해지는 시간”(「기미幾微」)이라는 진술은 글쓰기에 임하는 시인의 자세가 얼마만큼 진지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작詩作 태도가 빚어내는 작품의 아름다움은 절제가 넘쳐나는 완성된 형태의 미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김춘리의 시가 시적 욕망으로 충만한 채 젊고 싱싱한 운동성으로 추동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니 “수 만장 바람이 다 날아가야 그때/ 저쪽에서” 돋는 “수사”(「바람구독일보」)가 진정 ‘수사’로만 그칠 리는 만무하다. 그것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들의 상처”이자 “화농”(「화농의 봄」)인 자리를 어루만지는 예민한 감각, 바람의 결로 수놓는 화사華奢의 언어다. 다만 “웃음도 몸부림 칠 때가 있다.”(「거위의 살갗」)거나, 여우목도리를 두른 채 “네온 거리”를 걷는 여자들을 두고 “여우는 적응력이 뛰어난 짐승/ 사막이든 숲이든 배고픈 내장을 다 버리고 거리를 걷는다.”(「옷걸이에 걸린 여우」)라는 식의 웅숭깊으면서도 날카로운 성찰은 제대로 감상할 틈도 없이 겨우 맛보기만 보여주고 만 느낌이다. 상갓집을 찾은 문상객들이 산 자의 고단함으로 “소멸의 시간을 한 상 받아놓고 어떤 이들은 꾸벅꾸벅 졸기도 합니다.”(「주말의 꽃들」)라고 그려지는 시를 읽으며 감탄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해서, 김춘리의 시력詩歷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 부르틈으로 나”(「입술이 부르트는 이유」)오는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고대해본다.
신상조
201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