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합작품 황룡사 구층탑의 비밀 |
고구려침공 실패로 무너진 수 양제
수나라 양제(煬帝, 569∼618년)는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2월, 24년 3월, 그리고 25년 7월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백수십만 명의 대군을 잃고 헤아릴 수 없는 전쟁 물자를 허비했다. 이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 感)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등 천하는 다시 대란(大亂)에 접어든다.
그러자 양제는 영양왕 26년(615) 8월에 돌궐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순(北巡)을 핑계하여 돌궐을 찾아간다. 양제는 종실의 딸 의성(義成)공주를 동돌궐의 왕 계민(啓民, ?∼609년) 칸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궐은 원래 고구려와는 문화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나라였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해 최대강국으로 떠오르자 할 수 없이 수나라에 귀순했으나 수의 고구려 침공에 진정으로 협력할 뜻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승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형편이었다.
게다가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그 이후에 연거푸 두 번이나 통일중국의 온 힘을 쏟아붓고서도 고구려의 성곽 하나 빼앗지 못하고 회군했으니, 돌궐은 태도를 일백팔십 도로 바꾸었다. 또 양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은 계민 칸이 이미 죽고 시필(始畢) 칸이 새로 등극했음에랴!
실제로 시필 칸은 수 양제가 북순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기병 수십만을 대기시켰다. 이 사실을 탐지한 전(前)왕비 의성공주가 양제에게 신속하게 통보하여 겨우 화를 모면 하게 할 수 있었다.
양제는 여기서 돌궐에게 포위되어 한달 남짓 공포에 떨어야 했는데, 이때 그의 기가 아주 꺾인 듯하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끝나 이미 넋이 다 나간 마당에 믿고 있던 맹방인 돌궐의 표 변은 권세의 무상함을 통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 장안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순수를 핑계대며 남도인 강도(江都, 지금 남경)로 피하고 만다. 북쪽에 대해서는 아주 환멸을 느꼈던 모 양이다.
본래 양제는 후량(後梁) 세조 효명제(孝明帝) 소귀(542∼585년)의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후량은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 464∼549년)의 장자인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 501∼531년)의 아들 소찰 (蕭察, 519∼562년)이 세운 나라로 강도가 그 근거지였다.
그래서 양제는 강도를 처가의 고향으로 생각하여 남조 정벌에도 앞장섰고 등극 후에는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그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기 직전인 대업(大業) 6년(610) 3월에 강도 태수의 지위를 본도인 장안의 경조윤(京兆尹)과 같은 급으로 승 격시켜 놓은 것도 강도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양제는 고구려 정벌의 총책을 맡은 좌익위 대장군 허국공(許國公) 우문술(于文述)의 진언을 받아들여 강도로 내려온 뒤 이곳을 세력 기반으로 삼아 대란을 수습해 보려고 한다.
원래 우문술은 고구려 정벌 참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마땅히 극형을 받아야 했으나, 양제의 장녀 남양(南陽)공주가 그의 막내아들 우문사급(于文士及, ?∼642년)에게 출가했으므로 죽음을 모면하고 다시 기용된 것이다.
그러나 양제의 최측근인 우문술이 이해(615년) 10월 병으로 강도에서 죽자, 가족을 서도 장안에 두고 온 시위무사 사이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양제가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강도에 머물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장안의 가족 걱정으로 군심(軍心)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틈에 우문술의 불초자들인 우문화급(于文化及)과 우문지급(于文智及)이 마음이 들뜬 병사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니, 양제는 영류왕 원년(618) 3월에 이들의 손에 잡혀 죽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불과 6년 전 200만 대군을 칭하며 고구려를 침공하던 그 위세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가 믿던 맏사위(우문사급) 형들의 선동에 의해 역적으로 돌변한 시위무사들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당(唐) 태종의 천하통일
이에 이미 장안을 장악한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635년)은 바로 제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한 뒤 차츰 각처의 반란을 진압하여 수의 통일을 계승한다. 백성들은 근 300년에 걸친 대륙의 분열에 싫증을 내고 있었고, 나아가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권자의 출현을 갈망했다.
이런 민심을 잘 간파한 이가 당 고조의 제2자인 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 도판 1)이다. 국가 건설과 반란 진압에 큰 공로를 세운 이세민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그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元吉)을 살해하고 부왕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고조 무덕(武德) 9년(626) 8월에 즉위한 당 태종은 곧바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문치(文治)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전국을 10도(道)로 나누어 강력한 중앙 집권력을 행사해 나가니 백성들은 비로소 안도하고 따르게 되었다. 마지막 반란세력인 양사도(梁師道)가 정관(貞觀) 2년(628) 4월에 살해당하면서 천하가 통일되었다.
이렇게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 태종은 장성 밖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인 돌궐을 그냥둘 수 없었다. 정관 3년(629) 11월에 장군 이정(李靖, 571∼649년)을 보내 동돌궐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앞서 이 해 8월에 현장(玄, 602∼664년)법사가 고창(高昌) 구자(龜玆) 등을 거치는 서역 북도(北道)를 따라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데, 이것은 당 태종의 돌궐 정벌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었을 듯하다.
동돌궐 정복에 나선 이정은 정관 4년(630) 2월에 동돌궐왕 힐리(利) 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에게 의탁하던 수 양제 황후 소씨와 양제의 손자 양정도(楊正道)를 찾아내 장안으로 호송한다. 이정은 계속 동돌궐의 힐리 칸을 추격하여 돌궐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10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세운다. 이어 계민 칸의 왕비이자 힐리 칸의 모후인 수나라 종실 출신 의성공주를 잡아죽이고 힐리 칸마저 사로잡아 돌아온다. 이렇게 이정은 돌궐과 연결된 수나라의 잔존 세력을 쓸어버림으로써 당 태종의 정통성에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사실 당 고조는 처음 나라를 일으킬 때 시필 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에게 칭신(稱臣)하는 굴욕을 감내했던 모양이다. 힐리 칸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조의 아들 태종은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과거 국가 초창기에 태상황(고조)이 일찍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돌궐에게 신하를 일컬었다. 짐은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터질 듯 하여 흉노를 멸망시키는 데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앉아도 자리가 편안치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 않더니 이제 잠깐 한쪽 군대를 움직였는데도 가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선우가 요새 문을 열어달라 사정한다니 그 부끄러움을 씻었다 하겠다.”
재편되는 삼국의 은원 관계
한편 우리나라는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안 삼국간 은원 관계가 재정립되고 있었다. 본래 고구려와 백제는 고국원왕(재위 331∼371년)과 개로왕(재위 455∼475년)이 전쟁에서 살해됨으로써 불구 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또 이후 신라가 백제 성왕(523∼554년)을 배신하고 전쟁에서 그를 살해함으로써 신라 역시 백제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즉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삼고 생존을 위해 투쟁해 왔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비록 영토 분쟁은 있었으나 서로 국왕을 죽인 원한 관계는 없으므로 그리 심각한 적대감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는 왜와 동맹해 제해권을 장악한 백제를 공동 견제하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조를 멸망시켜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남조와 왜를 연결해 제해권을 장악하던 백제는 국제적인 세력 균형이 파괴될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서 수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 관계를 청산한다. 그래서 백제 무왕은 겉으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적극 협조할 것처럼 수 양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실제로는 수나라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고구려에 은밀히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접경지대에 파견하여 말로만 침공하는 체 크게 떠들었을 뿐 오히려 고구려의 남쪽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에 반해 신라의 진평왕은 진흥왕이 확장해 놓았다가 자신의 재위 기간에 빼앗긴 북쪽 영토를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구려가 국운을 걸고 수의 113만 대군과 사생 결단을 벌이는 동안 배후를 침공하여 500여 리나 되는 고구려 영토를 잠식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싸움판에 개가 끼여들어 호랑이 꼬리를 물고늘어진 꼴이 되었으니 고구려의 분노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이 판에 백제 무왕은 오히려 신라의 서북쪽 국경지대인 상주를 침공하여 신라가 고구려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의 3차 침략을 물리치고 났을 때 삼국간 친소 관계는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신라가 고립무원에 빠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전후 복구를 대강 마무리지은 뒤 백제와 함께 신라를 응징하는 일에 적극 나서 실지를 회복해 나가니, 신라로 서는 양국의 침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에다 믿었던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국력을 모두 소모하고 허무하게 무너지자 신라는 이제 의지할 구석이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믿고 거들먹거리다가 호랑이가 사라지자 초라하게 된 격이었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민심 속에 천하통일의 염원이 살아 있었으므로 당나라가 차츰 각처의 반란을 진압하고 곧바로 재통일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런 대세를 읽은 고구려는 당 고조 이연이 무덕(武德) 원년(618) 5월에 수나라 공제(恭帝)로부터 선위(禪位)받아 장안에서 즉위하자, 그 다음해인 영류왕 2년(619) 2월에 사신을 보내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 고구려에서도 대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양왕이 재위 29년인 618년 9월에 돌아간 뒤, 그의 이복아우로서 대수전쟁 중 수나라 수군(水軍)대장 내호아군을 격파한 적이 있는 전쟁 영웅 고건무(高建武), 즉 영류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당 고조도 아직 사방에 반란군이 널려 있고 돌궐이 장성 밖에서 수양제의 황후 소씨와 손자를 보호하면서 수나라 재건을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접근을 무척 반겼다. 그래서 영류왕 5년(622)에는 당 고조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 포로로 잡힌 중국 사람과 고구려 사람들의 교환을 제의하고, 고구려인 포로를 찾아내 먼저 돌려보내니 고구려도 이에 응해 1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를 돌려보냈다.
신라 역시 당이 수나라를 계승하여 중국 천하를 장악해 가는 사실을 파악하고 진평왕 43년(621)에 사신을 보내 맹방이 될 것을 다짐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견제를 호소한다. 이에 감격한 당 고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를 통해 칙서와 함께 그림 병풍 및 채색 비단 300여 필을 보낸다.
그러나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나라는 해양왕국인 백제인 듯하다. 백제는 무왕 24년(624) 정월에 대신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책봉을 요청한다. 당 고조는 기분이 좋아서 사신을 보내 무왕을 대방군왕백 제왕(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고, 내친 김에 2월에는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고구려로 보내 영류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며, 3월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진평왕을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하는 등 3국에 균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물론 국세에 따라서 그 대접이 달랐다. 고구려에는 형부상서와 같은 대신급 인물을 사신으로 특파했다. 이때 고조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천존상(天尊像, 도판 2)과 도교 경전을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도교를 전했는데, 도사가 고구려에 와서 ‘노자(老子)’를 강하니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와서 들었다 한다.
그러나 당의 대삼국 등거리 외교는 천하제패의 야망을 가진 당 태종의 등극과 함께 막을 내린다. 당 태종은 수 양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을 반드시 성공하여 중국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무덕 9년(626) 6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잡자마자 7월에 대학자인 국자조교 주자사(朱子奢, ?∼641년)를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으로 삼아 삼국 순회 대사에 임명하고 삼국을 달래 서로 화친하도록 종용한다. 명목은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과의 교통을 방해한다고 호소해 왔기 때문에 이를 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고구려를 고립시키려는 외교 전략의 발동이었다. ‘구당서(舊唐書)’ 권189 주자사전(朱子奢傳)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일부를 옮겨보자.
주자사(朱子奢)의 삼국 순회 유세(遊說)
“주자사는 소주(蘇州) 오(吳) 지방 사람이다. 어려서 고향 사람인 고표에게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익히고 뒤에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책을 널리 보았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수나라 대업 중에 비서학사(秘書學士)에 이르렀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서 두복위(杜伏威)에게 의탁했다가 무덕 4년(621) 두복위를 따라 입조하니 국자조교(國子助敎)의 벼슬을 받았다.
정관 초에 고려(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같이 치는데 군대를 연결하여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않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위급을 알려 왔다. 이에 주자사를 임시로 원외산기시랑으로 삼아 사신에 충당하고 삼국의 감정을 달래보라고 했다. 학식이 있고 점잖게 생겨 동이(東夷)들이 크게 받들어 공경하므로 3국 왕이 모두 표문을 지어 올려 사죄하고 선물을 넉넉하게 주었다. 처음 주자사가 사신으로 나갈 때 태종이 이렇게 말했다.
‘해이(海夷; 바다 밖에 사는 오랑캐, 즉 3국)가 자못 학문을 중시하나 경이 대국의 사신이 되었으니 반드시 그 선물에 의지하여 그들에게 강설(講說)하지 말도록 하라. 내 뜻에 맞도록 하고 사신에서 돌아온다면 마땅히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경을 대하리라.’
그러나 주자사가 그 나라에 이르러 오랑캐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춘추좌씨전’을 제목으로 삼아 강의하고 미녀를 선물로 받았다. 사신에서 돌아오자 태종이 그 뜻을 어긴 것을 질책했으나 그 재주를 아껴서 심히 꾸짖지는 않았다.”
당 태종이 우리나라가 학문을 숭상하는 것을 알고 대학자를 순회대사로 삼아 삼국을 돌면서 화친을 도모하도록 유세했다는 내용이다.
주자사의 삼국 순회 후 그 다음해인 정관(貞觀) 1년(627)에 신라는 6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당에 사신을 보내 정성을 표시하는데, 이때 백제 무왕은 7월에 신라 서쪽의 두 성을 쳐서 빼앗은 뒤 다시 대군을 일으켜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웅진(熊津, 공주)에 진출한다.
이에 신라 진평왕이 위급을 고하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자 무왕도 조카인 복신(福信)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동정을 살피게 한다. 이때 당 태종은 복신을 통해 무왕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신라와 화친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한다.
그러는 중에 당 태종은 대장군 이정(李靖)으로 하여금 동돌궐을 정벌하게 하여 정관 4년(630) 힐리 칸을 사로잡고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고구려는 당 태종의 야망을 눈치채고 사신을 보내 힐리 칸의 생포를 축하하며 고구려의 지도를 전해주는 등 외교적인 역공세를 취하여 당에 침공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여성으로부터 서남 해변에 이르는 긴 국경 지역에 장성을 쌓아나간다. 조용한 듯하면서 긴박하게 전쟁 준비에 돌입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라에서는 진평왕(565년경∼632년)이 54년의 긴 통치 기간을 끝내고 근 70세가 되자 장녀인 선덕여왕(580년경∼647년)이 등극한다. 선덕여왕 원년(632) 정월의 일이었다.
자장(慈藏)이 당나라로 간 뜻은?
정반왕, 즉 석가세존의 부왕 이름을 가진 진평왕이 돌아가자 당연히 그 다음 대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의 화신이 등장해야 한다. 그래서 미륵의 화신인 원화로 군림하면서 많은 화랑도를 거느리며 그 구심점 구실을 하던 맏공주 덕만(德曼)이 즉위하여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다. 진흥왕이 꿈꿔 온 미륵세계가 신라에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反)진골계 보수귀족 집단의 불만이 꽤 있었던 듯 하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백제·고구려의 연합 공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위기 상황에서 선택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민심을 결속시키는 최후 수단으로 선덕여왕 체제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듯하다.
더구나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며 성장한 화랑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유신(金庾信, 595∼673년) 세대가 이미 30대 후반이 돼 사실상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실력으로도 이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또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선덕여왕이 등극하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겠지만, 진지왕자이자 진평왕의 사촌아우이며 둘째 공주의 부마인 용수(龍樹)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미륵세계 구현을 위해 선덕여왕의 등극을 적극 지지한 것이 여왕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자신의 부왕인 진지왕이 반진골 세력들에게 밀려나 시해되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용수의 현명한 판단에 의해 진흥왕의 혈족인 진골 귀족이 미륵세계를 신라에 현실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용수의 이런 심모원려는 결국 진골 귀족의 기반을 안정시켜 장차 자신의 아들인 춘추가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왕위에 오르고 자신은 통일신라의 시조격으로 추앙받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튼 선덕여왕이 미륵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은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과 선덕여왕의 막내아우인 선화공주 사이에 출생한 의자(義慈, 600∼661년경)를 태자로 책봉하여 백제 미륵의 법통을 확고하게 다져 놓는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선덕여왕을 초상으로 한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제10회 도판 1)과 같은 최고 걸작의 미륵보살상을 만들어내 미륵이 신라에 출현한 것을 실물로 증명했다. 하지만 국제적인 공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덕여왕 3년(634) 1월에 인평(仁平)이라 연호를 바꾼 다음 당나라에 여왕의 책봉을 청하여 다음해(인평 2년)에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란 책봉을 받아낸다.
그리고 인평 3년(636)에는 진골 출신 승려인 자장(慈藏, 590∼658 년, 도판 3)을 당나라로 보내 신라에서 미륵이 출현한 것에 대해 교단적 차원의 공식 인정을 받아오게 한다.
사실 김씨 왕족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서 오긴 했지만 진흥왕과 그 왕비가 말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말고는 진골 출신이 승려가 된 예는 아직 없었다. 오히려 불교 수용을 앞장서 반대해온 박씨 집안 쪽에서 이차돈이나 원광(圓光) 법사와 같은 큰 인물이 나와 김씨 왕들이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가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마 이들은 김씨 왕족의 내·외척에 해당하는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진골 핵심 가문에서 승려가 출현하여 선덕여왕 등극의 필연성을 교단 차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자장의 속명이 선종랑(善宗郞)인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던 화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종이란 이름 밑에 랑(郞)자가 붙은 것인데, 뒷사람들이 그대로 선종랑이라 잘못 기록해 놓은 듯하다.
자장의 아버지가 선덕과 진덕여왕대에 화백회의를 주도한 6인의 국가 원로 중 네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 무림(武林)공이었다고 하니 그의 가문과 혈통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그가 출가했을 때 이를 허락지 않고 왕명으로 환속하여 재상 직위를 맡으라고 강요했던 모양이다. 이때 자장은 “나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목숨을 내놓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장은 자신이 물려받은 집과 전원을 모두 내놓아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만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살면서 고골관(枯骨觀, 사람의 몸은 결국 마른 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보는 생각. 육신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방법)을 닦는데, 가시방을 지어 놓고 알몸으로 그곳에 앉은 채 머리는 들보에 묶고 수행했다 한다. 조금만 움직이거나 졸면 가시가 몸을 찌르고 들보가 머리를 잡아다니게 하는 극한의 고행 수단을 택한 것이었다.
신체적 고통의 한계를 실험하는 가혹한 난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자장은 선덕여왕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인평 3년(636), 즉 선덕여왕 5년에 문인 승실(僧實) 등 10여인을 데리고 당나라로 건너간다. 이때가 당 태종 정관 10년이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이 등극한 이래 벌써 분황사(芬皇寺, 634년 완공)와 영묘사(靈廟寺, 635년 완공) 두 절을 지어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삼았고 636년 3월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 100인의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하게 하는 불교의식)를 베풀고 승려 100인의 출가를 허락했다. 신라를 명실상부한 미륵불국토로 만들어 민심을 합일시키려는 통치수단이었다.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침략당해 빼앗아온 땅을 되돌려주어야 할 형편에 이런 희망조차 없다면 국가의 지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동생의 남편이자 당숙인 이찬 용수로 하여금 주군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는 한편으로 자장을 당으로 보내 자신이 미륵임을 확인시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자장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4 자장정율(慈藏定律)을 비롯하여 권3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등에 두루 언급돼 있다. 당나라 도선(道宣)율사가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4에도 석자장전(釋慈藏傳)이 실려 있다. 그중에 가장 내용이 풍부한 황룡사구층탑과 자장정율을 기준으로 하여 당나라에서 자장의 행적을 살펴보자.
선덕여왕은 문수보살이 수기한 성골
자장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를 거느리고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청량산(淸凉山), 즉 오대산을 찾아간다. 여기서 자장은 제석천이 천공(天工)들을 거느리고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에서 기도하고 감응을 얻는데, 꿈 속에서 문수보살의 마정수기(摩頂授記, 이마를 쓰다듬으며 앞날의 일을 말해주는 것)를 받고 석가세존의 금란가사와 사리 등을 전해받는다. 이 내용은 당나라측 기록인 ‘속고승전’ 석자장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데, ‘삼국유사’를 펴낸 일연은 자장이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를 숨겼기 때문이라고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이때 문수보살의 수기한 내용은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특이한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난 문수가 또 이렇게 말했다. ‘너의 국왕은 천축의 찰리(刹利, 크샤트리아) 종성(種姓)에 속하는 왕으로 미리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러니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와 업을 같이하는 족속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너희 나라는 산천이 높고 험해서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삐뚤어져 있으므로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서 때로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좋은 법문을 많이 들은 비구가 나라 안에 있다면 이로써 군신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평화로우리라.’
그 승려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자장이 문수대성의 변화인 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와서 북대(北臺)를 내려와 태화지(太和池) 못가에 당도하니 홀연히 신인이 나타나 어째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 자장이 보리(菩提, 깨달음)를 얻으려 왔다 하니 신인이 예배를 드리고 나서 또 묻기를 당신네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한다. 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왜인과 맞닿아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번갈아 국경을 침범한다. 이웃한 도적들이 날뛰니 이것이 백성들의 근심이다.’
신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신네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서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속히 본국으로 귀국하라.’ 자장이 묻기를 ‘귀향한다면 장차 어떻게 해야 이익이 되겠는가’ 하니 신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불법을 보호하는 용)은 내 맏아들이다. 범천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조공을 바치러 와서 왕국이 영원히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의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덕으로 이를 갚겠다.’ 신인은 말을 마치고 옥을 받들어 주고는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사리와 가사의 내용은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가지고 돌아온 것은 부처님의 머리뼈, 어금니, 사리 100톨, 부처님이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 한 벌이었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한 등분은 황룡사에 있고 한 등분은 태화사탑에 있으며 한 등분은 가사와 더불어 통도사 계단에 있다.”
어떻든 자장은 이렇게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선덕여왕이 석가모니불로부터 이미 미륵보살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특수한 신분, 즉 성골(聖骨)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신표로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와 부처님의 정골과 치아 및 사리 100톨을 받아 가지고 장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당 태종의 보호를 받으며 장안성 내의 승광별원(勝光別院)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에 머무른다.
이로 보면 성골이라는 것은 진골 중에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처럼 미륵의 화신으로서 여왕이 될 자격을 부여받은 특수한 뼈대라는 의미인 듯하다. 따라서 성골 남자는 있을 수 없고 성골이 진골과 구별되는 혈연집단일 수도 없다.
뒷날 김부식이나 일연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만 부여된 성골의 의미를 고려적인 사고로 합리화하느라 진덕왕 이전을 성골이라 했다거나, 성골 남자가 끊어져 여왕이 섰다는 등의 주석을 달아 사고의 한계를 노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최치원이 <성주사낭혜화상비문>에서 ‘성(聖)이라고도 하나 진골을 일컫는다(曰聖而曰眞骨)’고 달아놓은 비문의 주석(도판 4)도 이런 맥락에서 위와 같이 평이하게 해석해야 할 듯하다.
궁지에 몰린 신라
한편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당의 천하제패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정관 14년(640) 8월에 이미 서쪽의 고창(高昌) 왕국을 멸망시키고, 정관 15년(641) 정월에는 종실녀 문성(文成)공주를 토번(티베트)왕에게 시집 보내 서쪽의 평정을 끝낸다.
이에 고구려는 바짝 긴장하여 정관 14년 12월에 왕태자 환권(桓權)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정세를 염탐하게 한다. 백제 태자 의자가 정관 11년(637) 12월에 당에 사신으로 간 전례가 있으므로 고구려에서도 태자를 보냈을 것이다.
이에 당에서도 그 답례를 빙자하여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고구려의 허실을 염탐해 돌아오도록 한다. 이때 진대덕은 고구려 사정을 탐지한 뒤 당 태종에게 “그 나라가 고창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접이 보통보다 훨씬 융숭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당 태종은 이런 말로 고구려 침공 계획을 발설했다.
“고구려는 본래 한사군의 땅일 뿐이다. 내가 병졸 수만 명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구하려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닷길로 평양으로 쳐들어간다면 수륙합세로 빼앗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 주현(州縣)의 피폐함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내가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 이는 고구려 정벌이 가까워졌음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영류왕 25년(642) 10월에 당나라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세력을 키운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 ?∼665년)이 영류왕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형의 아들인 보장왕을 세우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한다.
또 이해에 백제 의자왕은 즉위 2년으로 무왕의 상기(喪期)가 지나자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7월에 군대를 일으켜 친히 신라의 대당(對唐) 창구인 남양만 일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한다. 또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신라의 서쪽 요새인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빼앗고 성주 품석(品釋)과 그 처자를 살해한다. 그런데 품석의 처고타소랑(古陀炤娘)은 김춘추의 장녀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 한번 깜짝하지않고 사람이 지나가도 모르고 있다가 깨어나서는 “아, 대장부라면 어찌 백제를 삼키지 않겠는가”고 부르짖었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자왕은 그의 이종사촌형이었다. 비록 국가간 이해 관계로 싸움은 피할 수 없다하나, 믿고 항복하는 5촌 조카딸 일족을 잡아죽여 목만 백제 수도인 사비로 보내고 시신은 옥중에 묻었다 하니 그 배신감에 어찌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김춘추는 급하고 분한 김에 앞뒤 생각없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새 왕인 보장왕으로부터 수나라 침공 때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서북땅 500여 리를 돌려준다면 응하겠다는 냉담한 반응을 얻고 억류당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온다.
그런데 이에 앞서 8월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군과 협공으로 대당 창구인 당항성(黨項城, 남양)을 공격해 옴으로써 신라에서는 위급을 알리는 사신을 이미 당나라에 보내 놓았다. 마침 당 태종은 이해 10월에 서북의 강자인 설연타(薛延陀) 칸에게 종실녀인 신흥(新興)공주를 시집 보내 회유를 끝마쳤다. 이에 고구려 침공의 기회가 무르익어 감을 기뻐한 당 태종은 정관 17년(643) 3월16일에 자장을 환국시켜 고구려 침략에 대응하게 한다.
황룡사 구층탑
자장의 귀국은 선덕여왕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므로 당 태종이 허락했다 하는데, 실제로 당 태종도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낼 필요성이 큰 모양이었다. 당 태종은 자장을 궁으로 불러 비단가사 한 벌과 각색 비단 500필을 내려주고 태자인 고종도 비단 200필을 따로 내려주며 많은 예물을 선사했다. 자장은 본국의 경전과 불상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 각종 불구와 불상을 얻어 귀국한다.
온 나라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며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의 명으로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황룡사 9층탑(도판 5)을 건립할 것을 선덕여왕에게 아뢴다. 선덕여왕이 뭇신하를 불러 의논하니 모두가 이르기를 백제에서 장인을 청해 와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보배와 비단으로 백제의 장인을 청해 오니 이름이 아비지(阿非知; 아비는 결혼한 성인 남자의 일반 호칭이고 知는 존칭이니 백제 아비님, 즉 백제의 남자란 의미로 고유명사가 아님)였다.
백제 아비가 명령을 받고 탑 짓는 일을 경영하는데 이간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이 이 일을 총괄하였고 작은 장인 200여 명을 거느리게 했다. 처음 찰주(刹柱, 탑의 꼭대기에 세운 장대)를 세우는 날, 백제 아비가 꿈을 꾸니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이 보였다. 마음 속에 의심이 생겨 손을 놓았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며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金殿, 金堂)문에서 나온다.
겁에 질려 기둥을 세우자 노승과 장사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백제 아비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이루어 놓았다. 찰주기(刹柱記)에서 말하기를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이하의 높이가 183척이라 하고 있다.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서 받아온 사리 100톨을 삼분하여 그 3분의 1을 기둥 속에 넣었다.
위 기록은 ‘삼국유사’ 권3 황룡사구층탑조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1964년 12월 도굴단에 의해 황룡사구층탑지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도굴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는 ‘삼국유사’와 약간 다른 내용을 보인다.
우선 자장이 당나라에 간 해가 선덕여왕 7년(인평 5년), 즉 정관 12년(638) 무술이고,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 계묘에 본국으로 돌아올 때 남산 원향(圓香)선사에게 사직하는 인사를 하니 원향선사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신라 형편을 살피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 여러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고 하므로 자장이 이 말을 선덕여왕에게 아뢰어 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이에 비하면 ‘삼국유사’는 종교적인 윤색이 많이 보태진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간 용수에게 감군(監君)의 책임을 맡겼다든지, 대장(大匠)이 백제 아비이고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탑을 지었다는 내용은 양 기록이 같다. 또 선덕여왕 14년(645) 을사에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월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여왕 15년(646)에 완공했다는 내용도 같다. 철반 이상 높이가 7보(步)라 했으니 1보를 6척으로 잡으면 42척이어서 이도 일치하고 그 이하 높이가 30보 3척이라 했으니 183척과 맞아떨어진다.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대략 55.25m이니 탑의 규모가 굉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십개 성이 함락당하는 등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으면서도, 더구나 적국인 백제의 명장을 보배와 비단으로 사다가 이런 엄청난 규모의 탑을 지었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이는 전쟁을 치르는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룩해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직 이 일을 해냄으로써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적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절박한 일념으로 전국민이 단합해 이루어낸 소산이라 하겠다.
이런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신라는 그 힘으로 장차 삼국을 통일해 나간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바탕이 돼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사실 자장이 돌아온 해인 선덕여왕 12년 9월에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해 대거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는 소문을 듣고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보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그러자 당태종은 “나도 실상 양국의 침략을 받는 너희 나라를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친하라고 권했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돌아서면 뉘우침을 뒤집어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고 너희 땅을 양분하려 하니 너희 나라는 무슨 기묘한 꾀를 베풀어 엎어지는 것을 막으려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신라 사신이 “우리 왕은 일이 궁색해지고 꾀가 다하여 오직 위급을 대국에 알릴 뿐이니 살려주기를 바란다”고 우는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자 당 태종은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꼴을 탓하며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
“내가 적은 군사를 움직여 요동으로 들어간다면 너희 나라의 포위를 1년쯤 풀어줄 수 있는데 이후에 뒤를 잇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면 다시 침공할 터이니 공연히 4국이 시끄럽기만 할 뿐이겠지만 이것이 한 계책이다. 내가 또 너희에게 군복과 기치를 빌려주어 2국의 군사가 오면 세우고 벌려 놓음으로써 저들이 우리 군사인 줄 알고 달아나게 한다면 이것도 한 계책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군사를 태우고 곧장 백제를 정벌하고 나서, 너희 나라는 부인으로 주인을 삼아 이웃나라들이 얕보므로 내가 종실 한 사람을 보내 너희 왕으로 삼되 군사를 보내 호위하게 한다면 이 또한 한 계책일 것이다. 너는 어떤 것을 따르겠느냐?”
이에 사신은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기만 하였다 한다. 아무튼 이때 백제는 신라의 숨통을 죄기 위해 11월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는데, 신라는 절박한 그 시기에 황룡사탑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던 것이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정관 18년(644) 1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에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백제와 함께 신라의 침략을 그치지 않으면 명년에 군대를 보내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 대권을 장악한 막리지 연개소문은 신라가 수나라 공격 때 틈을 타 빼앗아간 고구려땅 500리 지경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당의 강요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자 상리현장은 “이왕지사를 따져 무엇하겠느냐” 하면서 “요동의 여러 성이 본래는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이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고구려는 어째서 옛 땅을 반드시 되찾으려 하느냐”고 따진다. 이것은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찾으려는 당의 술책이었다.
정관 18년 2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 온 상리현장의 보고를 받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의 자리를 도둑질했으며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했고 지금 또 내 조명(詔命)을 어겼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침공의 뜻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자 초당(初唐) 3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명필 저수량(遂良, 596∼658년, 도판 6)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자격으로 고구려 침공을 만류한다.
“폐하가 지휘하면 중원이 맑고 평안하며, 돌아보면 사방 오랑캐들이 두려워 복종하니 위엄과 신망이 큰 때문입니다. 이제 바다를 건너 작은 오랑캐를 원정하시다가 이기면 모르거니와 만일 차질이 생기면 위엄과 신망을 손상할 것이고 다시 분김에 군사를 일으키면 안전과 위험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세적(李世勣, 592∼667년) 같은 무장은 돌궐계의 설연타가 들어와 도적질하는 것은 위징(魏徵, 580∼643년)의 말을 들어 이를 토벌하지 않은 탓이라 하며 이 기회에 고구려를 쳐 없애자고 주장한다. 이 말이 맘에 든 당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이는 진실로 위징의 실수였다. 짐이 곧 후회했으나 말하지 않은 것은 좋은 꾀를 막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당 태종이 이렇게 고구려 침공의 뜻을 굳히자 저수량은 그 친정(親征)이라도 막아보려고 2, 3명의 맹장으로 하여금 4만∼5만 군사를 거느려 정벌하게 하라고 상소한다. 이에 다른 신하들도 뒤따라 친정의 불가를 간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요순 같은 임금도 엄동설한에는 씨앗을 싹틔울 수 없지만 촌사람이나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봄이 되면 누구나 씨앗을 싹틔우는 것은 천시(天時)가 이르렀기 때문이니 천시가 이르면 사람이 그 공을 세워야 한다”며 고구려 정벌의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7월에는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 ?∼656년) 등을 양자강 중류 파양호변 강서지역의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로 내려보내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미를 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이 지역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피해가 비교적 적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염입덕은 수나라 장작대장으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요동에서 공성기구를 제작하는 등 많은 군공을 세운 염비(閻毗, 564∼613년)의 장자로서 역시 조형술이 뛰어나 이런 직책을 맡았다.
이어서 영주(營州)도독 장검(張儉)에게 조서를 내려 유주·영주의 양 도독 군사와 거란·말갈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요동을 건드려 그 형세를 살피게 하고, 태상경(太常卿) 위정(韋挺)을 궤운사(饋運使)로 삼아 하북의 군량미를 운송하여 요동에 이르는 요소마다 비축하게 하며, 태복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에게는 운하로 하남의 군량미를 운송하게 했다.
준비가 대강 끝나자 11월 임신(壬申)에 당 태종은 낙양으로 나와 수나라 침공시 참전하였던 원로대신 정원숙(鄭元璹) 등에게 그 책략을 묻고 갑오일에 침공의 진용을 짰다. 우선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물길에 능한 강회(江淮)와 영협(嶺峽) 병사 4만 명 및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용사 3000명을 이끌고 전함 500척에 태워 산동반도 내주(萊州)를 출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그 다음 태자첨사 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및 서쪽 난주와 하주에서 항복한 돌궐인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했다.
이어 당 태종은 천하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침공하는 이유를 밝힌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므로 정리상 참을 수 없어 응징하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것은, 백성을 잔인하고 포악하게 대한 수 양제가 백성을 어진 마음으로 사랑한 고구려왕을 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자신의 침공이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5개항의 이유를 제시하는데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친다(以大擊小) △순리로 반역을 친다(以順討逆) △다스림으로 어지러움을 이긴다(以治乘亂) △편안함으로 피곤함을 기다린다(以逸待勞) △기쁨으로 원망을 당적한다(以悅當怨)가 그것이다.
당 태종은 이렇게 진용을 짜고 천하에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반포한 다음 친히 6군을 총괄하여 요동을 침공해 들어간다. 이에 앞서 행군총관 강행본(姜行本)과 소부소감(少府少監) 구행엄(丘行淹)으로 하여금 장인들을 독려해 사다리와 충차 등 공성기계들을 안라산(安蘿山)에서 만들게 하였는데, 태종은 친히 나가 이를 점검하고 시험해 보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한다.
드디어 정관 19년(645) 2월에 당 태종이 낙양을 출발했고 요동도행 군대총관 이세적은 4월 초하룻날 요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뒤이어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신성(新城)에 이르고 영주도독 장검이 돌궐족을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들어 출격한 고구려군 수천명을 살해한다.
이세적과 도종은 힘을 합쳐 겨우 개모성(蓋牟城) 하나를 함락하는데, 5월 기사에 들어서야 평양도행군총관 정명진(程名振)은 요동반도 끝 해안요새인 비사성(卑沙城)을 함락한다.
마침내 5월 정축에 당 태종이 요수를 건넜다. 요서 200여 리가 진흙탕이 돼 인마가 통행할 수 없으므로 장작대장 염입덕이 흙을 깔아 토교를 만들어 군대를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나서였다. 이때 이세적과 도종은 요동성을 맹공했으나 미처 함락하지 못했다.
당 태종은 요수를 건너고 나서 다리를 허물어버려 달아나지 않을 뜻을 보였고, 요동성 아래로 수백 기를 거느리고 가 성 밖에서 토산을 쌓느라 흙짐 지는 군졸들의 흙을 말 위에서 져다 나누어 주기도 하는 등 독려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요동성의 저항이 워낙 강해 정병을 모두 끌고 와 수백 겹의 포위 공격을 가하고 나서야 겨우 함락할 수 있었다.
당 태종의 안시성 대참패
이어서 당 태종은 6월 정미에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러 떠나는데 10일 만에 도착한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15만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 태종의 전략에 말려 참패당하고 결국 3만6800명의 군졸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에 당 태종은 이세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듣자 하니 안시성은 험하고 병세가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며 굴복하지 않았으니, 막리지가 공격했으나 떨어뜨릴 수가 없으므로 이로 인연해서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 한다. 건안성은 병세가 약하고 양식도 적다 하니 만약 뜻밖에 나타나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을 뿐이다. 이는 병법에서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세적은 이렇게 대답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미를 운반하는 길을 끊는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치며 가서 건안성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당 태종은 “이미 공으로 장군을 삼았으니 장군의 뜻대로 하되 내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하며 안시성 공격을 허락한다. 그런데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치며 야유한다. 당 태종이 분노하니 이세적은 성을 함락하는 날 성안의 남자는 모두 죽이자고 청한다. 이 소문을 들은 안시성 사람들은 더욱 성을 굳게 지켜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고혜진이 안시성을 버려두고 오골성(烏骨城)을 친 다음 비사성의 장량 수군을 불러 평양성으로 곧장 쳐들어가자는 계략을 제시한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적극 반대하고 나선다. 그의 말은 이렇다.
“천자의 친정은 제장과 달라서 위험을 무릅쓸 수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오랑캐 무리가 아직도 10여만 명이나 있으니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모두 우리 뒤를 밟아올 것이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취한 다음 길게 몰고 나간다면 이것이 만전지계(萬全之計; 만 가지로 안전한 계책)다.”
이에 여러 장수가 급하게 안시성을 쳤으나 끄떡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강하왕 도종은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올려 성 높이에 가깝도록 했다. 그러자 성 안에서도 성을 더 높이 쌓아 이를 막고 군사들이 교대로 지키니 하루에도 6, 7합을 겨뤘다. 충차(衝車)로 돌을 쏘아 올려 그 성의 층집가퀴를 무너뜨리면 성안에서는 목책(木柵)으로 무너진 곳을 막았다.
당 태종은 도종이 발을 삐자 친히 침을 놓아줄 정도로 극진히 장병을 독려하여 산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60일이 되자 동원된 인원이 50만 명에 이르렀다. 결국 토산이 이루어지고 성에서 몇 길 떨어진 토산 마루에 오르면 그 아래로 안시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에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산마루에 머물며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을 무너뜨렸다. 때마침 복애가 몰래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군 수백 인이 성이 무너진 틈에서 나와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차지하고 해자를 둘러 지켰다.
당 태종이 노해서 복애를 참수해 조리돌리고 제장에게 명령하여 3일 동안 연속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 나와 죄를 청하자 당 태종은 마땅히 죽어야 하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을 참작하여 특사로 죽음을 면하게 하며 바로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요동지방은 추위가 빨리 와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9월에 안시성 아래에서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서서 떠나는데, 성 안에서는 모두 인적을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홀로 성 위에 올라 전송했다. 이에 감격한 당 태종은 성을 잘 지킨 것을 치하하고 비단 100필을 놓고 가며 왕을 힘써 섬기라고 했다 한다.
싸움에 져본 일이 없다는 당 태종이 10여만 대군을 직접 몰고 와서 두 달 동안이나 안시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고 회군한 것이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당 태종의 심경은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터인데, 당장 고구려군의 추격이 두려워 이세적과 도종을 후군 대장으로 삼아 4만 군사로 후방을 방비하면서 황급히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요하 일대의 진흙탕은 인마의 발을 묶어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몰려오는 추위는 전쟁의 참패로 심신이 피폐해진 병사들의 육신을 얼려 놓으니 얼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당태종은 장손무기로 하여금 장병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깎아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도록 하면서 회군을 서둘렀다. 얼마나 마음이 조급한지 그 자신이 말 채찍에 풀을 매달아 풀 옮기는 일을 솔선해 장병들을 격려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때 당 태종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과는 목적과 조건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호언장담하고, 필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조서까지 반포하면서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선발대가 요수를 건넌 지 불과 5개월 만에 안시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수많은 군사를 잃은 채 양식이 떨어져 허겁지겁 쫓기듯 군사를 되돌렸으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영웅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이때 당 태종은 입고 떠난 옷을 갈아입지 못해 의복이 해어져 걸레 같았다 한다. 차라리 필승의 조건을 열거한 조서나 반포하지 않았더라면 덜 창피했을 텐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된 참담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깊이 후회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만약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길이 있지 않게 했으리라(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삼화령(三花嶺)의 석미륵(石彌勒)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던 해인 선덕여왕 12년(643)은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9월 공략설’이 널리 떠돌던 불안한 해였다. 그래서 신라는 자장을 불러들였고, 당 태종은 이를 이용해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삼으려 자장에게 물심양면으로 희망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에 자장은 귀국하자마자 선덕여왕이 특수 신분을 타고난 성골로 미륵보살이란 사실을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은 사실을 공포하고,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고구려와 백제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래서 전국민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공에 시달리는 사이 이 거대한 조탑불사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이 일만으로는 선덕여왕을 신격화하기엔 부족한 듯, 미륵보살상이 아닌 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은근히 선덕여왕을 하생한 미륵불로 승격하는 일을 진행했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삼화령미륵불삼존상(三花嶺彌勒佛三尊像)>이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주존인 미륵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걸터앉은 상)으로 높이가 160cm이며, 좌우 협시보살은 모두 입상인데 좌측은 높이가 100cm, 우측은 98.5cm이다. 이 불상을 미륵불로 보는 것은, 중국 돈황 막고굴에서 북량(北凉)시대인 430년경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근 200년 동안 줄기차게 조성돼온 하생미륵불좌상의 형태가 거의 이런 의좌불 형식(도판 7)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생미륵불이 의좌불 형식으로 표현된 것은 막고굴뿐 아니라 운강석굴과 용문석굴, 맥적산석굴 등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으며 단독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런 의좌불 형태의 미륵불상 조성이 특히 600년대를 전후한 수·당 통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 시대 사람들이 통일을 이룩한 군주를 하생미륵불로 보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벽화에서도 의좌상이 주존으로 등장하는 <미륵불 삼존도>(도판 8)를 널리 그리고 있다.
그 결과 신라에서도 이런 의좌불 형식의 미륵불삼존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양식은 수양제 대업(大業) 6년(610) 전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돈황 막고굴 제410굴 서벽 감실 속에 모셔진 <막고굴 제410굴 미륵불의좌상> (도판 9) 양식을 계승한 듯한 느낌이 강하다.
4등신에 가까우리만큼 넓고 큰 동안형의 얼굴, 머리칼을 표현하지 않은 깎은 머리 형태에 나지막하고 작은 육계, 오른손을 시무외인처럼 무릎 위로 올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대 여원인을 지은 손짓 등이 한눈으로 보아 막고굴 미륵상과 양식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만 <삼화령미륵불삼존상>(도판 10)은 시무외여원인의 본 뜻을 헤아리지 않고 조형성에 탐닉하다 보니 손가락을 모두 꼬부려 수인의 의미를 망각한 것이나, 양 무릎에 옷주름 무늬를 나선형으로 돌리는 양식화 현상을 보인 것이 중국과 다르다. 얼굴이 차지하는 비례가 더욱 커지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친근감을 보여주는 것도 차이점이다. 이마가 좁고 백호가 없으며 코가 더 커지고 볼이 풍만하며 목이 짧아지고 귀가 길어진 것도 서로 다른 점이다. 목은 짧아졌는데 귀가 더 길어지니 귓불이 어깨를 덮어내리는 특이한 표현을 하고 있다. 옷주름을 간소화하면서 얇게 표현한 것은 신라만의 특징적인 표출이라 할 것이니, 이는 뒷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굴암 십일면보살입상>으로 이어지는 신라 고유 양식이기도 하다.
이런 차이는 오히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 <막고굴 제410굴 미륵불의좌상>을 범본으로 삼아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서로 깊은 양식적 유대감을 보여주고 있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 주불의 양 옆에 시립한 좌·우 보살 입상은 ‘애기보살’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을 만큼 앳된 소년소녀의 모습인데 역시 4등신에 못 미칠 만큼 얼굴이 커서 동자와 같은 체구를 보여준다.
단순한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보관을 쓰고 가슴에 구슬 목걸이를 걸었다. 상체는 벌거벗은 채 천의만 두 어깨에 걸쳤는데, 천의자락이 앞면으로 내려와 배와 무릎 근처를 이중으로 가린 다음 그 양끝은 두 어깨로 다시 올라가 어깨 뒤에서 각기 양쪽 발끝까지 흘러내리게 하는 독특한 처리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몸매를 천의자락이 지탱해주는 것 같은 의외의 효과를 드러낸다.
주불의 위엄 속에 숨긴 미소와 대조적으로 두 보살은 아기 같이 천진하고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왼쪽 보살은 왼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오른손으로 연잎을 들었으며, 오른쪽 보살은 왼손으로 악기 같은 지물을 어깨 높이까지 받쳐들고 오른손은 그것을 받쳐주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다.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은 1925년 4월 경주군 내남면 월남리 산등성이에서 발견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왔는데 발견 당시 남향한 큰 고분 속에 모셔져 있었다고 일본인 학자는 기록해 놓고 있다. 발견 당시까지만 해도 땅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상호가 완전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산아래 동네 나무꾼 아이들의 철없는 장난으로 코가 떨어져 나갔다 한다. 참으로 아깝고 분한 일이다. 이때 이미 두 보살 입상은 월남리 민가로 옮겨 숨겨놓았으므로 비슷한 시기에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한다.
일인학자가 발견 당시에 고분 속에 묻혀 있었다고 기록한 내용은 광복 후 황수영 선생의 연구 결과 고분이 아닌 인조석굴이었음이 밝혀져 석굴암의 선구 형태가 이 시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 자장과 연결된 사유를 기록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삼국유사’ 권3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선덕왕 때 석생의(釋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어떤 승려가 와 남산으로 끌고 올라가면서 풀을 묶어 표시하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남산의 남쪽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청컨대 대사는 꺼내다가 산마루 위로 옮겨 주시오.’ 꿈을 깨고 나서 친구들과 함께 표시를 따라 찾아가니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땅을 파자 돌미륵이 있는지라 꺼내다가 삼화령 위에 모시고 선덕왕 13년 갑진(644년)세에 절을 지어 살았다. 그래서 뒤에 생의사라 했다.”
선덕여왕 13년에 돌미륵을 남산 삼화령 밑 남쪽 골짜기에서 파내 삼화령으로 옮겨 모신 것이 바로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라는 것이다. 땅에 묻혀 있다가 꿈에 현신한 것은 종교적 신비성이니 논외로 친다 해도, 이 미륵삼존상이 적어도 선덕여왕 13년(644)에 이미 조성된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자장이 돌아온 바로 다음해다.
자장은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여왕의 특명을 받고 당나라로 가서 중국 오대산에 살고 있다는 문수보살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고 돌아왔다. 자장은 진골 출신으로 왕의 지친이었기 때문에 당 태종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중국 각처의 성지를 여행했을 터이니 그가 돈황 막고굴이나 대동 운강석굴, 낙양 용문석굴 등을 참배했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하생미륵불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이를 신라에 재현할 생각을 했을 듯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필 남산 북쪽 봉우리 해목령(蟹目嶺) 아래의 작은 산마루인 삼화령에 이 미륵불 삼존상을 조성해 모실 생각을 했을까.
그 이유는 ‘삼국유사’ 권5 명랑신인(明朗神印)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뒷날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가 된 명랑(明朗)법사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인 남간(南澗)부인의 아들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랑법사는 바로 삼화령 밑동네인 남간 마을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자장의 매제, 즉 명랑의 부친은 사간(沙干) 재량(才良)이었다 하는데 아마 박씨였을 듯하다. 박혁거세의 능인 오릉과 박씨 왕인 일성왕릉의 연장선상에 남간 마을이 있으니 이 일대가 박씨의 세습 주거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래 박씨는 반불교적인 성향이 커서 김씨 왕조가 불교를 수용해 주도이념으로 삼아가는 데 항상 견제해 온 듯한데, 김씨 왕조는 그때마다 내외척으로 혈족 관계인 박씨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결해 왔다.
따라서 이 미륵불상을 박씨들이 대물려 사는 남간 마을 뒷산에 조성해 모심으로써 민심의 완벽한 결집을 내외에 천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꿈을 꾸고 땅 속에서 파내게 하는 종교적인 신비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남간부인의 세 아들, 즉 자장율사의 생질 삼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첫째는 국교(國敎) 대덕(大德), 둘째는 의안(義安) 대덕이 되며, 막내가 명랑법사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석생의가 혹시 뒷날 의안(義安)대덕으로 불리는 인물일 수도 있다. 더구나 명랑법사는 벌써 자장에 앞서서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자장이 당나라로 떠나기 직전인 정관 9년(635)에 돌아왔다고 하니, 외숙인 자장에 앞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고 보아야 한다. 두 집안이 이렇게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조성도 이들과 결코 무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