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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 2:1-12/ 2012. 8. 26 주일
우리는 날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성도인 나 자신을 향해 진지하게 물어야할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가? 오늘 나의 모든 삶가운데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으로 오늘도 살고 있는가?’이 질문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와 결단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자기반성과 회고없이 신앙의 성숙과 변화는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문자답을 통해 나 자신을 정확하고 냉철하게 재고하는 모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늘 그분과 함께 걷는 삶의 매일 매일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질문에 정확하고 솔직하게 답할 수 있다면,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고전가운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신앙소설이 있습니다. ▶찰스 몬로 쉘돈이 1896년에 쓴 이 책은 본래 책명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였는데, 이것을 '거룩한 발자취'라고 번역했다가, 근간에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로 재 번역된 책입니다. 이 책의 두께는 300페이지 미만입니다만, 지금까지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3천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 셀러'입니다.
이 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헨리 맥스웰' 목사는 미국 레이몬드 시의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엘리트 목회자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실직한 인쇄공의 예고 없는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쇄공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음날 교인들 앞에서 간증을 하게 했습니다. 미국 교회에서는 곧잘 있는 일입니다. 이 실직한 인쇄공의 간증은 이렇습니다.
'저는 10개월 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저뿐이 아닙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이 도시를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헤매면서 일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저에게 동정이나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신 분은 본 교회 목사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어떤 교회 마당에 들어서다가, 사람들이 목청껏 외쳐 부르는 찬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세상 살아 갈 동안 찬송하게 합소서'(348장)
저는 그 순간 그 교회 바깥 계단에 앉아, 그들의 찬송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든 의문이 이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큰 교회를 다니면서, 좋은 옷을 걸치고, 호화 주택에 살며, 사치품을 사는데 돈을 물 쓰듯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일까? 이런 의구심이 제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간증을 하던 그 실직 인쇄공이 갑자기 성도들 앞에서 현기증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그가 숨을 거두며, 계속해서 반복한 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성도들은 이 충격적인 사건을 지켜보면서, 그 실직 인쇄공이 남긴 마지막 말에 깊은 여운을 갖게 됐습니다. 다음 주일이 됐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그 실직자의 마지막 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금년 1년 동안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자문자답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분들이 있다면, 예배 후 그 자리에 남아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 때 교인 가운데, 레이몬드 데일리 뉴스 지의 사장 겸 편집인인 에드워드 노먼과 유명한 여가수 레이첼 윈슬로우 등 여러 성도들이 자원해서 그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그 모임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레이몬드 시의 부정과 싸우고, 술집 추방운동을 일으키는 등, 그리스도를 본받는 역사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구체적으로 그 물음에 답하는 자들의 변화된 삶의 과정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이런 진지한 물음을 물으면서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요 백성이라 하면서,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성도로서의 삶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우리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더해!라는 핀잔의 말을 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 윤리적으로도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의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부터 철저하게 우리 자신과 우리 매일의 삶가운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저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다니는 이에게 믿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에 대한 바른 인식과 정의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속에 나타나있는 진정한 믿음의 모습을 발견해 보시고 나 자신의 믿음을 추스르고 회복해 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지인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집에 들어가셔서 쉬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집으로 몰려 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뵈옵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과 이적을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문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이 집에 4명의 사람에 의해 들 것에 실려 중풍병자가 왔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이 사람의 딱한 형편을 보고 길을 양보하거나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네사람도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지만 사람들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상황을 직시하고 어떻게 하면 이 환자를 예수님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들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예수님의 계신 곳의 지붕을 뜯고 그 앞으로 이 환자의 상을 내려놓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 일을 시행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집은 지붕을 쉽게 열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습니다. 날씨와 통풍을 위하여 지붕은 가볍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가옥의 지붕은 평면이었고 지붕은 굵은 나무로 대들보를 놓고 작은 나무들을 걸쳐 놓은 후 진흙으로 발라서 비가 새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위에 풀이나 짚을 엮어서 그 위에 덮거나 단단히 다져서 만든 흙기와로 덮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계획대로 이 중풍환자를 예수님의 발앞에 내려놓는데 성공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보시고 들것에 실린 중풍병자를 둘러 보시던 주님은 의아하게도 '병아 떠나가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뜬 구름 잡는 얘기인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귀와 눈을 쫑긋 세우고 지켜보고 있는 서기관들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을 공격할 수 있는 허점을 잡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외에 능히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는가’ 그들의 믿음과 지식으로는 그들의 생각과 판단이 맞는 것입니다. 감히 인간이 어찌하여 죄사함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례한 신성모독에 해당되며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는가?’이러한 질문은 상대방으로 아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임을 알았고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는 병고침의 선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분명한 의도를 마가는 말씀합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2:10).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오해를 살만한 말이지만 그것은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외에는 죄사함을 사할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시니깐 능히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그냥 돌려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명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신이 누었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당당히 걸어가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다시한번 예수님의 능력과 구원 그리고 죄사함의 권세를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치료는 많은 곳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역중에서 많은 부분에 환자를 치유하시고 고치셨는데 그 중에 중풍병자와 같은 환자들의 치유는 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중풍병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뇌졸중이나 뇌경색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분의 마비로 인해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의 환자를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몸을 가누거나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음으로 절대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를 들 것에 싣고 온 사람들은 아마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나 친척 혹은 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중풍병을 앓고 있는 친구들을 그에게로 데려간다면 그가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데려온 것입니다. 먼저, 이 네 사람을 모습을 확인해 보십시다. 저는 적어도 이 네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마음)이 있었다고 봅니다. 1. 자신의 친구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병중에 있는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말뿐인 행동이 아니라 몸소 그를 위한 수고를 주저하지 않는 그를 향한 불쌍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자신의 친구를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금새 유대땅 전체에 급속히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정말로 그분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병고침을 입었습니다. 그들에게 들린 예수님의 소문은 이 네 친구에게도 확실히 전달되었고 어째든 예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들은 몸소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장애를 만났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내어 결국은 예수님을 꼭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의 순간, 포기하라는 압박이 닥쳐와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끝까지 달려 가십시오. 한 두번 해보다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지금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니 길이 생겼습니다. 지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 자신들의 소망대로 이 환자를 예수님의 발앞에 내려다 놓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그를 치유케하는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이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마가도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막 2:5)로 증언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네 사람의 모습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사람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포기의 말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치유를 소망하며 예수님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으로,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결국 그 믿음이 그의 친구의 병을 고치게 한 것입니다. 믿음을 보이십시오.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타내 보이십니다. 믿음은 고백하는 것이며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한가지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중에 구원은 바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앞에서 확실하게 증거하셨고 이 중풍병자에게도 그 사실을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중풍병과 죄와의 문제를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토당토 없이 병이 있는 사람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병은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믿었고 받아들였습니다. 문둥병이 든다든가 죽을 병이 든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죄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특히 구약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를 비방함으로,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질병은 하나님앞에서의 범죄함의 결과였습니다. 모든 병이 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질병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중풍병자도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경우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지 못하거나 깊은 상처를 받거나 큰 충격을 받으면 사람들은 심신이 약하여져서 쉽게 병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병중에서 의학적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병이라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사고를 당해서 상처가 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아픔과 고통이 쌓이고 쌓여서 신체에 치명적인 병으로 발전해서 나타나는 병입니다. 마음속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도 암이 발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판명이 된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체나 영혼이 고통을 당하면 온 몸이 아프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영혼과 육체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나쁜 말도 듣지 말고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영혼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과 연결되어 있고 육체도 마찬가지로 영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에게 그냥 헛소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뭔가 그 병의 원인속에 죄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중풍병자는 믿음을 통해 육체의 병보다 먼저 자신의 죄의 문제를 먼저 용서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얼마전에 어떤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이건 단순히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자신의 두 아이를 한강에 빠뜨려 죽인 아이들 아빠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앵커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물었다. 살인범은 살길이 막막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되는 답변이었다. 앵커는 그럼 왜 같이 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이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앵커는 기독교인이라면 살인은 해도 괜찮으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살인범은 더욱 기가 막힌 답변을 한다. "(살인)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허무 개그가 아니다. 이건 9년 전 겨울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우리는 이 엽기적인 인터뷰에서 기독교 구원론이 진짜로 살인 면허로 전락한 실상을 보게 된다. 물론 이 경우는 다소 극단적이기도 하고 또 살인범이 정신질환도 앓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사례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 속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죄와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교육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죄와 회개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죄라는 것은 정말 하나님보시기에 어떤 이유라도 용납하지 않는 나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죄를 가볍게 생각하며 지으면서 하나님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하면 되니깐,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으니깐? 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의식이 실종된 것도 있지만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영혼과 육체의 떨림으로 하나님에 자복하고 뼈저리게 회개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회개의 모습이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합니다. 가볍게 죄를 시인하고 용서해달라고만 하면 용서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철저한 참회와 뉘우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먼저 내려놓고 하나님앞에 철저하게 엎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금방 해결되고 금방 용서받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각오로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죄를 짓고 장난치듯 하나님앞에 서는 것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무겁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도 무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 아버지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주어진 직분과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 중풍병자에게 가장 긴급한 문제는 육체의 중풍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의 죄악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인 육체의 문제만을 생각해서 고침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더 큰 중병은 바로 영적인 문제, 내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 뜻밖의 선언은 중풍병자가 그동안 숨겨왔던 죄악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년동안 자신의 질병을 통해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깊은 반성과 참회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앞에서 그 문제가 비로서 해결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속에 감추어져 있는 영혼의 심각한 질병은 죄의 문제를 보시고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내면에 감추어놓은 온갖 죄악들에 대한 청산없이 복음이 주는 자유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즐거움을 온전히 맛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 앞에 겸손히 나의 죄성을 고백하고 자복하며 뉘우치는 믿음의 모습을 통해 그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있는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갖은 오해와 비난을 일삼는 서기관들입니다. 오늘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말꼬리를 잡아 그를 참소할 것인가 고민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들 마음 중심에는 그것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를 참소하고자 하는 악의 무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되도록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은 자리에는 가지 말고 그런 이들을 가까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칭찬하고 격려하고 덕스러운 모임과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의 친구로 주십시오. 불평과 원망의 말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나도 어느 순간엔가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근본적인, 원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후에 그의 육체의 병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그 사람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뭔가 힘에 이끌리어 몸을 움직여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냥 그는 아무 생각없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무언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굳었던 몸이 움직이고 힘을 얻고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믿음의 액션을 보였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레이크 우드 교회의 조엘 오스틴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자신의 어머니의 간암에서의 치유받은 사건을 그는 소개합니다. 1981년에 조엘의 어머니는 간암으로 몇주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21일동안 갖가지 병원의 검사를 받은 후에 의사들이 내린 결론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현대의 의학으로는 살 가망이 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의사와 병원, 약학과 의학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가족이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머니 자신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패배의 말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입에 두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믿음으로 충만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살 거야, 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할거야’어머니는 걸어다니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치유의 말씀을 찾아 3-40개 정도 종이에 적어 매일 읽고 큰 소리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병세가 호전되고 식욕도 돌아오고 건강해 지기 시작해진 것입니다. 조금씩 진행되다가 몇 달후에는 급격하게 호전되었습니다. 그가 현재 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쓰고 있는 이때도 그의 어머니는 20년 동안 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힘으로 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덤가를 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장수를 주시고 그분의 구원을 보여 주실거야?’(시편 118:17-18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라고 크게 외치신다고 합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이 났을 때 움직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반응을 보이십시오. 아멘이라고 화답하십시오, 믿어 보겠다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을 하셔도 반응도 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 앉아서 들은 둥 마는 둥 하면 그 사람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움직이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믿음의 결과는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말씀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나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만 듣고 가만히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 본문의 사건을 통해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치유 그리고 예수님의 죄사함을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며 신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특히 이 네 사람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이 네 사람에게는 불쌍한 친구, 병든 친구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몸소 힘이 들지만 그 친구를 업고 예수님께로 달려 왔습니다. 그를 네 사람이 드는 들것에 실었습니다. 들 것은 네 사람이 마음이 맞지 않으면 들고 갈 수 없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도 포기하고 돌아가면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힘이 듭니다. 그리고 장애물을 만나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다면 그 친구는 영영히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함께 보조를 맞추며 높낮이를 조절하면서 함께 전진했습니다. 함께 지혜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결국 이 모든 일을 이루었습니다. 끝까지 그들은 정말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한 가지, 곧 그 병든 친구의 구원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함께 끝까지 간 것입니다.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 형제, 자매가 되어 함께 구원이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함께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 또한 영혼 구원이라는 동일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힘들지만 함께 들면 들 것은 가볍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지혜를 모으면 함께 큰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동역자들의 팀웍이 뛰어난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변에 좋은 동역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신실하고 함께 마음을 모아, 불쌍한 영혼을 돌보며 주님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믿음의 동역자들이 많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교회의 성도들에게 좋은 동역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믿음의 역사를 동일하게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모두가 다 그런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병든 친구의 구원을 맛보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좋은 교회, 좋은 동역자들 믿음의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도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지는 믿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는 성도인가? 교회인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든 일도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하고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고 믿음을 가지고 말을 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믿음이 자라도록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사모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성도들은 늘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 교회이면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성도들은 또한 같은 형제 성도들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하고 세워 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고 우리의 목표가 굽어지지 않으며 포기되거나 뒤로 넘어지는 자들이 있는가 살펴보고 권면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 한 주님을 섬기고 구원받은 믿음의 성도들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