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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조, 파업 결의 '상경집회'
현대차 노조는 지난 2009년부터 3년 연속 무파업을 기록했는데, 강성 노조가 들어선 지난해부터 파업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기아차 노조도 70%의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했습니다. 현대차와 기아차 노조는 법정 조정 기간이 끝나는 오는 20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조는 회사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고, 정년을 61세까지 보장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자녀들에게 1천만 원의 취업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75개 조항, 180개에 달하는 요구사항을 제시했습니다. 사측은 이렇게 되면 1인당 최대 1억 원 가까운 돈이 더 들어가게 된다며, 황당한 요구사항이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TV조선 2013.08.14)
현대차 노조원들의 평균 연봉이 9400만원인데 위에서 노조가 요구한 권리를 모두 돈으로 환원하면 연봉이 거의 2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위의 기사에서 나온 것처럼 노조는 모두 180여개의 요구사항을 주장하는데 그 중에는 회사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고 정년을 61세까지 보장해달라는 것과 상여금 800%지급 하라는 것, 대학에 진학못한 자녀에게도 ‘기술취득지원금’ 명목으로 1인당 1000만원씩 지급해 달라는 것 그리고 노조 활동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 면제 요구, 신차종 투입 시 노조 동의 요구, 40년 이상 장기근속자 금 15돈과 상여금 200% 지급, 30년 이상 근속자 차 값 35% 할인 등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현대 자동차 정규직 노조의 회사에 대한 온갖 권리주장을 듣다보면 현대차 노동자가 된 것이 무슨 하늘의 별이라도 딴 것 같다는 착각을 준다.
이렇게 거창한 주장을 일삼는 현대차 노조의 오만한 습관 뒤에는 물론 노조뿐만 아니라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고 노조의 압력에 쉽게 굴복했던 사용자측 그리고 노동운동을 편파적으로 부추긴 정치권의 오류가 역사적으로 엉켜 있다.
한 때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제적인 정권의 탄압을 받아 혹독한 박해를 당했었고 그런 경우의 노동운동은 단순한 노동운동, 즉 노동자의 권리투쟁이라기보다는 민주화운동 혹은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간주되었었다. 그 때 현대차의 노동투쟁은 소외된 계층의 권리주장을 대변하는 선구적인 외침을 울렸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진보와 인간해방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럼 면에서 한국 사회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아직 힘이 약하고 계몽의식이 약한 노동 현장을 지원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었다. 따라서 현대계열사의 노동운동, 노동투쟁은 소외되고 억압된 사회 계층의 반항과 인권회복으로 인정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대기업 노조는 이제 소외된 계층이 아니라 기득권층으로 변했다. 현대차 그리고 대공장 노동자들은 이제 노동귀족이 되었고 그 귀족들은 그들의 권리를 대물려 세습시키려는 시도를 하다가 주춤한 상태이다. 노동특권을 자식에게까지 세습시키려는 노조의 무지한 행동은 사용자측도 눈감았지만 결국 사법부가 이를 무효화시켰다.
이런 상태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입이 열 개라도 말을 못할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근로자의 기득권이 좋았으면 자식에게 그 일을 세습시키려고 했을까? 북한이 아리라 남한의 대기업 노조야말로 노동자의 천국! 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지도자는 남한의 대공장에 와서 좀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현대차 노조 파업, '파산' 디트로이트 닮아가나
과거 현대차 노조의 파업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현대차에서 파업을 해야 다른 금속업체 노동자들도 나설 수 있는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이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들을 대변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이는 높은 연봉에 따른 ‘귀족 노조’라는 꼬리표에다 최근 자녀에게 직업을 세습해주려는 ‘고용 세습’ 을 시도하면서 ‘무늬만 노동자’라는 비아냥이 제기되고 있다. (스포츠 서울 8.14)
우리나라 중산층의 개념에 관한 논의가 아직 정리가 안 되었지만 박근혜 정부의 세금 인상 계획에 의하면 연 소득 3450만원이라면 중산층이다. 그러면 평균 연소득 9450만을 버는 현대차 노동자들은 한국의 상류층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현대차 노조의 파업은 이름만 노동이지 실은 사회 상류층의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한 투쟁으로 봐야 한다. 이런 면에서 현대차 노조의 시대착오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노동 운동을 무조건 무산자의 생존권 투쟁으로 보면 안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칼 맑스식의 프롤레타리아-부르조아 혹은 자본가-노동자 같은 이분법적인 세계관도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만든 사상이나 철학 혹은 이론같은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영세자영업자들은, 칼 맑스의 분류에 따르면, 이들은 엄연히 자본가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세 자본가들(자영업자)의 연평균 소득은 대부분 3000만원도 안 된다. 이름만 사장님이지 이들의 평균 소득은 직장인보다 적고 부채는 직장인들보다 훨씬 많다. 이런 측면에서 공산주의는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만약 칼 막스가 다시 살아나 한국에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업을 대를 이어 물려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의 철학을 역사적인 오류로 인정했을 것이다.
2. 본론 : 현대차의 정규직의 일자리 독식과 독일 폭스바겐 노조의 일자리 나누기
위에서 제기한 것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노조인 현대차 노조는 이번 파업 결의를 통해서 기득권층의 집단이기주의를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남들에게 나누어 주기는 커녕 자식들에게까지 계승시키려한다. 연대의식은 노동자들의 고유한 덕목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노동자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자신들과 차별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은 더 이상 사회의 약자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강자이다. 사회의 약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처럼 자신들의 이익밖에 모르는 한국의 현대차 노조와는 달리 독일의 자동차 노조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서 노사 모두 윈윈하는 대타협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독일의 자동차 업계는 꾸준히 세계시장을 힘차게 공략할 수 있었고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이 유럽의 구세주로 부각되게 만들었다.
1993년 독일의 최대 자동차 기업인 폭스 바겐(Volks Wagen)그룹은 경영난에 부딪혀 3만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공장도 해외로 이전해야 겨우 기업이 연명할 정도로 절박한 사태에 부딪혔다. 이런 위기에서 노조가 제시한 해법은 자기희생이었다. 즉 회사가 대량 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발적으로 근로시간의 단축과 임금 삭감을 감수한다는 노동 사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였다. 이때 노동자들은 근로시간을 주당 36시간에서 28.8 시간으로 줄이는데 합의했고 - 주 4일제 근무- 평균 12% 소득의 삭감을 맛보아야 했다. 한국의 현대차 노조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독일의 자동차 노조는 실천한 것이다!
폭스바겐의 노동자들은 3만명의 동료가 해고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적게 먹고 모두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노조는 회사의 경영 방침에 최대한 협조하여 노동시간이나 생산 유연성을 감내하기로 한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비단 노조의 사유의 전환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경영에 간섭하는 노사평의회(Betriebsrat)같은 독일 특유의 노사문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큰 공장의 경우 노동자와 사용자가 만나서 회사 일을 협의하고 공동적으로 결정하는 기구이다. 필자가 알기로 독일이 유일하게 이런 노사 협력기구를 운영하는 나라이다.
독일의 기업에는 노동자 출신으로서 회사의 임원이 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독일 기업의 사고의 유연성이다. 그들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구별을 절대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폭스 바겐의 일자리 나누기 정신을 한국적인 상황에서 한번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선 정규직 노조의 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양보와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이번 현대차 정규직 노조의 임금투쟁 파업 결의가 있기 바로 전에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의 철탑농성투쟁이 해제되었었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서 같이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규직은 자신의 기득권을 희생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일자리 나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희생위에서 자신들의 일자리의 안정성과 높은 임금 그리고 각종 복지혜택을 향유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 격인 정규직 근로자보다는 싸게 부릴 수 있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 혹은 하청 노동자를 쓰고 싶어 한다. 이런 이유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점점 늘어간다. 그리고 요구사항이 많고 걸핏하면 파업을 하는 한국의 불리한 입지 조건을 피해 대기업들은 해외로, 해외로 공장을 진출시킨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울산이 한국의 디트로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현대차 노조가 집단이기주의의 구습에서 탈피하여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늘이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근로시간과 임금을 축소하겠다면 이는 모두가 사는 윈윈 게임이 된다.
한국 노동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의 소외가 아니라 노동마저도 정규직-비정규직 혹은 원청-하청의 구별과 대립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대차 노조가 저렇게 신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이유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등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파업 투쟁이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낮은 생산성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현대차 국내 공장이 일을 게을리 한다는 사실이다. 차 한 대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해외의 다른 자동차 회사들보다 많이 길고 생산성 효율도 적다. MBC 방송에 의하면 현대차 국내공장은 53명이 할 일을 100명이 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현대차 특히 국내 공장은 일은 적게 하고 임금은 높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현대차 정규직의 비능률과 부조리는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이 커버한 셈이다. 즉 비정규직의 노동강도와 편성효율(적정인원 대비 실제인원)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정규직의 노동생산성이 외국의 60%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현대차가 흑자를 내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영업이익의 폭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해외 차들의 국내 시장 공략은 눈에 띠게 강해지고 있다. 현대차는 위기에 빠진 것이다.
3. 결론 : 교육과 산업 - 수단적인 교육관과 본래적인 교육관
위에서 우리는 현대차 노조의 파업결정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상황착오적인 지를 보았다. 자기 몸 편하고 일은 별로 안하고 그 대신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에게 힘든 것은 떠 넘기고 그래도 월급과 복지혜택은 더 많이 요구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를 관찰했다. 여기서 필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이렇게 집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사회전체의 손실과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한국 정규직 노조의 사고의 오류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또 독일 폭스 바겐 노조의 그 현명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그 답은 결국 국민교육의 차이에서 온다는 것이다. 주입식 학벌주의 교육은 집단 이기주의를 야기하고 본성교육은 공정주의를 낳는다. 본성 교육이란 사물의 본성(지식, 원리, 원인)과 인간의 본성(호기심, 탐구욕)이 적절하게 매치되는 교육이다. 공정주의란 자신의 이익을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추구하는 윤리와 합리의 조화이다.
학벌주의는 지난 호에서 밝힌 것처럼 학문이나 교육을 오직 사회적인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이다. 수단적 교육관과 본래적 교육관의 차이가 이런 큰 사회적인 결정의 차이로, 즉 현대차 노조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폭스바겐의 공정주의로 나타난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독일이 본래적인 교육관에 가장 근접하는 나라이다. 본성주의 교육 혹은 본래적 교육관이란 타율적 교육이 아니라 자율적 교육이다. 이는 또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교육관 즉 자유인의 교육이다. 인간의 정신 혹은 영혼이란 지식을 찾는다. 교육(Bildung)은 자기교육(Selbstbildung)이다. 교사나 교과서는 진리의 도우미에 불과하다. 그 반면 한국이나 중국의 학벌주의 교육은 노예의 교육이다. 교육이나 배움을 출세의 수단이나 준비로만 간주한다. 이는 수단주의 교육관이다. 학벌주의 혹은 수단주의 교육관은 수단-목적의 계열화를 산출한다. 즉 초중고 대학들이 모두 수단(준비)-목적으로 연결된다. 이런 것이 학원까지 연결된다. 강남의 유명학원에 들어가려면 시험을 봐야 한다. 이렇게 모든 교육과정이 수단-목적으로 연결되면 자유로운 영혼은 갈 곳을 상실한다. 창조와 발견 그리고 진선미 등의 가치는 오직 자유로운 영혼들의 생산물이다. 노예들은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한다. 노예들에게 타인을 위한 희생이나 전체를 위한 배려는 없다. 한국의 엘리트들이나 노동자들은 모두 노예적인 삶의 굴레를 못 벗어난다. 이들의 근시안적인 이기주의는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