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이 나는 법에 관한 이야기
한마디로, 잊어라 그리고 접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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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정신은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 즉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짧은 구절에 잘 응축되어 있습니다.
노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상가들에게 도는 우리가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지고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를 발견하여 신처럼 떠받들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장미빛과 같을 것이라고 기대에 차서 선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어두운 정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주장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리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형이상학이 숭상하는 모든 의미가 우발적인 마주침의 결과를 절대화하면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폭로한다.
이런 주장에서 장밋빛 전망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장자의 도는 항상 '타자와의 마주침'에 열려 있고, 나아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각'이란 꿈으로부터 깨어난 상태, 다시 말해 삶의 세계로 이행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에게 '꿈(夢)'이란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이 다른 모든 곳에도 일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형이상학적 태도를 가리킨다. 반면, '깨어남(覺)'은 이런 형이상학적 태도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혹은 타자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통찰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미끄러운 얼음판'이란 유아적 형이상학의 세계를 그리고 '거친 땅'이란 구체적 삶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 가자!)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자신에게 부합되는 것만을 알뿐이지만, 기는 비어서 타자와 마주치는 것이다. 도(道)는 오로지 빈 곳에만 깃든다. 이렇게 비움(虛)이 바로 '마음의 재계'이니라"
비움이란 바로 마음의 재계, 즉 '심재'라고 직접 설명했던 것이다.
망각, 즉 심재의 작용은 이렇게 굳어져 버린 감각적 인식과 일상적인 위식을 풀어 버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잇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로부터 나오는 미세한 소리들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타자와 접속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자신의 삶의 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도 타자와 관계 맺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를 맺어야 우리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는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물론 개체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한 개체의 존재를 유지시킬 수 없는 관계는 지속될 이유도 없고, 또 지속되어서도 안된다는 강한 전제를 피력하고 있다.
만약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비투스가 자신이나 타자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꿈이라고 조롱받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존의 모든 공동체가 자신이나 타자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유로운 연대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망각의 수양론을 거쳐 타자와 직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개체의 불가피한 선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심재 이야기에 나오는 공자와 안회의 에피소드 후반의 이야기다.
공자가 대답하였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 안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에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받아 주거든 유세하고, 받아주지 않거든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서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득이(不得已)한 일에만 깃든다면 괜찮을 것이다.
...
너는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앎으로써 한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써 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인간세>
어떻게 하면 우리는 타자와 제대로 마주칠 수 있을까?
장자에 따르면 일체의 초월적 지평은 타자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격국 우리에게 남는 글귀는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득이한 일에만 깃들어라."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전일하게 하라는 것이 심재의 마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라면, '부득이한 일에만 깃들어라'라는 것은 타자성에 몸을 맡기라는 말이다.
'부득이'란 개념은 "내가 멈출 수 없는 것", 즉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타자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를 읽으려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타자에 몸을 맡기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장자의 방법이 '목숨을 건 비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사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방법 아닌 방법'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되겠지'라고 섣부르게 생각했던 모든 방법들을 부단히 제거해야만 하고, 어떤 매개도 없이 그냥 타자에게로 비약해 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날개 없이 날아라. "
타자와의 연결을 보장하는 미리 설정된 어떤 매개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매개가 미리 존재한다면, 그 타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타자일 수 없는 법이다.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우리는 먼저 자신을 터서 비워야 한다. 오직 그럴때에만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비움은 타자에게로 비약할 수 있는 가벼움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서 우리는 타자와 나 사이에서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깊은 협곡을 건너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도록 하자! 트였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저절로 타자와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던졌다고 해도, 우리가 건너야 할 깊은 협곡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에게로 '"날개 없이 날아먀만" 하는 것.
외부가 없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외부가 없는 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일일까? 우리에게 마주칠 타자가 없다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일까? 이 때문에 길은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멈추는 순간, 길도 거기서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장자의 이 말,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