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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acalla, 211 - 217 AD, Silver Denarius, Jupiter
Obverse: ANTONINVS PIVS AVG GERM - Laureate head of Antoninus right
Reverse: PM TR P XVII COS IIII P P - Apollo seated left, holding branch and leaning elbow on lyre
Size:18.1~20.8 mm, Weight: 3.10 g RIC246
2018.4.24 Aureo & Calicó, S.L.
Caracalla, 211 - 217 AD. Silver Denarius, Rome Mint,
Obverse: ANTONINVS PIVS AVG GERM, Laureate head of Antoninus right.
Reverse: PM TR P XVIIII COS IIII P P, Jupiter standing facing, head left, holding thunderbolt and scetpre.
Size: 18~18.5mm, Weight: 3.21 g RIC275a
2017.10.27 kendorney
Geta. AD 209-211. AR Denarius. Rome mint. Struck AD 211
Geta. AD 209-211. AR Denarius. Rome mint. Struck AD 211
Obv: P SEPT GETA PIVS AVG BRIT - Laureate head right
Rev: LIBERALITA AVGV - Liberalitas standing left, holding abacus and cornucopia
Diameter: 17.2~18.2mm Weight: 3.37g RIC IV 88 RSC 68
2018.7.7 Dvin Numismatik
Geta, as Caesar AR Denarius 211-212 A.D
Geta, as Caesar 211-212 A.D. AR Denarius. 199-202 A.D. Rome Mint
Obv: P SEPT GETA CAES PONT. Boy's bare headed bust, draped. right
Rev: PRINC IVVENTVTIS. Geta, in military dress, standing l. holding baton and transverse spear, trophy behind
Size: 18.5mm Weight: 3.5g RIC IV 18; RSC III 157b
2017.10.21 civitasgalleries
카라칼라 (186년 4월 4일 - 217년 4월 8일)는 황제 즉위 후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
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였다. 약식으로는 안토니누스라고 알려진 198년에서 217년까지의 로마 황제이다. 세베루스왕조 출신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의 장자였다. 카라칼라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
명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로 198년 ~ 211년까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다. 황제에 오른 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
호를 받았다. 하지만 동생 게타와의 경쟁이 심했는데 211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 잉글랜드 요크 지방에
서 죽고 게타가 드디어 로마 제국의 2인자에서 1인자로 오르면서 경쟁이 더 심화되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은 지 1년 만인 212년 2월에 카라칼라는 게타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고 단독 황제로 올랐다.
이때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과했으나 후에 로마의 재정 문제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213년 북부 지역을 순찰하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고 215년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으나 볼로가세스
5세가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줌으로써 명분을 잃고 중단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던 중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주민들을 학
살하기도 했다.
216년 볼로가세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다시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밀어붙였다. 이때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로원까지 반카라칼라 진영으로 돌변했다. 결국 217년 4월 이에 카라칼라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의
심을 품은 병사들이 마크리누스에게 호소해 카라칼라는 자신을 경호하던 백인대장의 형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의 신전에서 암살당했다.
형 카라칼라 동생 게타
★★ 카라칼라와 게타의 경쟁 ★★
카라칼라는 로마의 폭군이라고도 불리는 만큼 평가가 나쁘다. 널리 알려진 역사책들을 보면 카라칼라는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며, 로마의 포악한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세베루스 재위시 일찌감치 부제로 임명되어 후계자 지위가 공인되어 있었으나 게타와 카라칼라는 각각 22세와 23세의 젊은이였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경쟁 상대였고 서로에게 적대감이 깊었던 상태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세베루스가 죽은 뒤 카라칼라가 먼저 단독 황제가 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세베루스는 일찍이 198년에 카라칼라에게 '임페라토르 테스티나투스'와 아우쿠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나이 차이가 1년 밖에 안 되는데도 게타가 아우구스투스 서열에 오른 것은 209년이 되어서였다. 게타의 재위 계승 요구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친어머니 율리아 돔나 황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결국 단독 황제가 되려는 카라칼라의 시도는 실패했고 두 형제는 공동 통치자로서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베루스 만년에 그와 사이가 나빴던 동생 게타가 경쟁자로 떠올라 갈등이 깊어갔다.
두 황제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황궁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주 출입구를 따로 하고,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문과 통로들을 모조리 막아서 두 개의 궁으로 만들어 함께 거처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타협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였고, 게타와 카라칼라는 각자 원로원 의원들과 그 밖에 중요한 인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로마의 학자들 사이에는 지지층을 형성한 게타가 카라칼라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통치자로서 그 둘 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많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황제는 관료를 임명할 때에도 자신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서커스 경기에서도 서로 다른 팀을 지지하고 서로 다른 팀들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사법, 행정에도 관여하면서 이들의 경쟁은 법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결국 황제들은 서로를 독살할 생각을 했다.
몇 달 뒤 두 황제는 제국을 양분하는 것이 유일한 평화적 해결 책임을 알고 게타는 아시아를 차지하고 카라칼라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북서 지역을 맡기로 했다. 게타는 새 수도를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로 삼을 계획이였는데, 학자들은 이런 구도가 형성되었다면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전면적인 내란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두 형제에게 "제국을 서로 나눠 가질 거라면 이 엄마는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이냐"라며 물었고 이로 인해 계획은 중단되었다.
계획이 무산되자 카라칼라는 게타가 지지자들의 밀착 경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12년 2월, 게타가 율리아 돔나와 함께 있는 때를 틈타 그를 살해했다 야사에 의하면 게타는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도와주세요! 날 도와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율리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렇게 결국 세베루스 사후 그 무렵에는 사실상 공동 통치자였던 게타를 참살하고(212년 2월)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카라칼라는 죽은 동생 게타의 생일 기념일을 없앨 정도로 그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고, 그의 상들을 받치고 있는 돌들을 깨부수거나 게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를 녹여버렸다. 그러나 게타에게는 막강한 지지자들이 있었으며 자신이 그들이 자신에게 반대할 것임을 안 카라칼라는 신변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근위대를 찾아가 자신이 하마터면 동생에 손에 죽을 뻔했기에 그를 죽였고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게타의 지지자들에게 주장했다. 군인들은 그를 의심했지만 많은 선물을 내리고 급료를 대폭 올린다는 약속에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다음 날 그는 원로원에 나타나 게타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을 해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카라칼라는 동생의 옛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원로원 의원, 근위대장, 식민지의 총독, 궁중의 시종, 군인 ,전차를 모는 사람, 게타의 옛 친구들도 재판도 없이 또는 아주 그럴 듯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던 도중에, 공공 목욕탕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212년 초 몇 달 동안 무려 2만 명이 이렇게 죽어갔다. 대대적인 처형에 대한 항의가 있었지만, 카라칼라는 이들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가혹하게 진압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인 초로의 코르니피키아와 카라칼라의 아내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도 있었다. 212년에 자행되었던 게타의 지자자들에 대한 학살 사건은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로마 사회는 다른 계층들과도 멀어지게 만들었고, 이러한 갈등은 카라칼라의 치세 동안 계속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213년 초, 로마에 머물르기 불편했던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변경 지역을 향해 떠났다. 마차를 타고 가는 대신 병사들과 나란히 행군하고 로마에서 특별히 수송해온 고급 음식 대신 평범한 현지 음식을 먹는 젊은 황제는 곧 군인들이 좋아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보릿가루를 직접 갈기까지 했다. 물론 군대에 대한 지원이 결코 사사로운 생각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였다. 그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자마자 군사들의 급료를 최소 50%로 대폭 인상하여 국고에서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비용이 빠져나갔다.
213년 여름, 로마는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 지역과 라인란트 국경 양쪽에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원로원은 이러한 승리에 감동하여 카라칼라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수여했다. 이듬해, 카라칼라와 수행원들은 동쪽으로 길을 떠나 다키아와 트라키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되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대제를 새롭게 기리게 된 것은 트라키아를 통과할 때였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흉내내서 여러 마리의 코끼리를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게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을 처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제의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로마와 다른 도시들에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카라칼라의 영웅 숭배는 극에 달했고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와 자신의 얼굴을 반씩 조합한 두상을 그리게 했다. 그러다가 일리움의 유적지와 아킬레우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찾아가 그곳을 화환과 꽃으로 장식했고, 그들이 일리움에 머무는 동안 수행원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카라칼라는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루스(Patroclus)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본따서 화장용 장식을 사용해 동물 희생제를 드리며 성대한 장례식을 했다
카라칼라의 여행은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는데, 214-215년의 겨울은 소아시아의 북서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에서 보냈지만, 215년 5월에는 이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름을 보낸 후에 알렉산드리아에 갔는데 여기서 그의 알렉 산드리아의 대학살이 벌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시민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은 황제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묻힌 곳으로 매우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 도시였다. 카라칼라는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또 대제의 묘지를 찾아가 자줏빛 황제복과 그가 달고 있던 장식품들을 무덤 앞에 놓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카라칼라를 격노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무슨 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였을 수도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가 게타를 살해한 것을 비판한 일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원인이 무엇이든 카라칼라가 보인 잔인성은 굉장했다. 도시의 젊은이들이 거짓 약속에 속아 검거되었고,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이러한 대학살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서 비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죽어갔다.
거대 목욕탕과 같은 문화 시설들을 건립하고 제국 영내 모든 자유민을 로마 시민으로 격상시키는 등(안토니누스 칙령) 민심을 얻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다. 마초적인 천재 군주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했던 황제였고 그 때문에 여러 기이한 언행을 하면서 조금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 마구 시민들을 학살하는 괴행태를 저질렀기에 이런 정책의 의미는 반감되지만, 의외로 통치에서는 상당한 자질을 보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이 이미 이 시기부터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으며 제국의 한계 수익성도 이미 세베루스 시절부터 악화되어가고 있었지만, 그 현상들은 카라칼라 때 닥쳐왔다. 그는 앞서 말했듯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는 것으로 해결한다.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충성도가 떨어지고,경제적 잠재력과 성장률이 대폭 떨어져 결국 경제는 훨씬 더욱 망가질 뿐이었다. 갈리에누스도 화폐 절하를 단행했으며, 3세기의 위기를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금화는 절상했지만 은화는 크게 절하시켰다.
카라칼라는 어쨌든 자신이 군주임을 자각했기에 재판에도 상당한 열의를 기울였고, 법률에도 꽤 관심이 많아 많은 시간을 들였다. 군사적으로도 대 게르만족 전선에서 상당한 전과가 있었으며 기동대(벡실라티오네스)와 수비대를 분리하여 종심 방어적인 전략 사고를 도입하는 것도 하였고 이는 이후 로마 제국 방어전략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선 "예방전쟁"을 통해 원로원에게 '파카토르 오르비스(pacator orbis/이 땅에 평화를 가져온 황제)'라는 존칭을 얻었다.
다만 이 모든 재능과 자질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자기통제력 탓에 돌발적인 충동 제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고자 했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제국 통치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생을 죽인 죄책감 탓에 발기 자체가 안 되는 성불구자가 되어 자식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다. 디오 카시우스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확연하기도 하고 은밀하기도 한 고통 때문에 몸이 아팠을 뿐 아니라, 어떤 괴로운 환영으로 고통을 받아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종종 자신이 칼을 든 아버지와 동생에게 쫒기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게타를 죽인 것도 그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극단적인 불안이 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야사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죽기 직전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로마를 떠나서 군대에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했었다고 하며, 카라칼라는 몸이 아파서 신전에서 질병 치유를 기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카라칼라를 가장 괴롭힌 것은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과 불안감이였고 대순방 기간 동안 발생한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대학살 같은 잔인무도한 행동 뒤에는 이러한 원인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카라칼라가 동부를 방문한 목적은 파르티아인들을 상대로 한 정복 전쟁이였는데 이를 니시비스 전투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사건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군대를 편성하고 전투를 시작했다. 원정 준비는 이미 2년전 그가 소아시아에 있을 때 시작되었으며 군대를 강화하고, 통신 라인을 개선했으며, 군대에 주화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조폐국을 설립했다. 216년 초여름에 시리아 국경 지역에 집합한 군 병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군인 8개 군단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였다. 파르티아 제국은 213년 이후, 두명의 경쟁자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 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였다. 두 경쟁자 중 하나인 볼로가이세스 5세(Vologaeses V)는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과 수도 크테시폰을 장악했고, 다른 경쟁자 아르타바누스 5세(Artabanus V)는 이란 고원 너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타바누스의 편을 들었고, 동맹 강화를 위해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제안은 함정이였고 카라칼라는 그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 동부의 시골 지역을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파괴했다
카라칼라가 동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칼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군대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마테르니아누스(Flavius Maternianus)가 음모 소식을 알게 되었고, 카라칼라에게 서신으로 이 소식을 알리려 했지만 그의 서신은 안티오키아에서 황실의 서신을 담당하고 있는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전해졌다. 이 때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Marcus Opelius Macrinus)가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의심받았다.
그의 잔인성과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당연히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으며, 많은 사고를 친 제국 동방에서는 여론이 당연히 최악이었다. 이런 성격적인 결함은 대 페르시아 원정에서 재앙으로 닥쳐온다. 행군 중에 뭔가 잘못을 범한 두 병사를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두 병사 중 한명인 마르티알리스는 진작부터 은근히 황위를 넘보았던 마크리누스를 충동질했다. 그 중에서 마르티알리스는 카라칼라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데,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그의 형제가 입증되지 않은 혐의를 받고 며칠 전에 처형된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자신을 백인대장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아서 화가 나서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 되었든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는 둘 다 4월 8일에 에데사에서 카르하이까지 카라칼라를 동행하는 수행원단에 포함되었다. 황제는 당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서 가는 길을 멈췄다. 당시 카라칼라 곁에는 단 한명의 시종만 있을 뿐, 나머지 호위병들은 황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마르티알리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고 마르티알리스는 부름을 받은 척하며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지를 내리는 그를 검으로 한번에 찔러 죽였다
마크리누스는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였지만 병사들에게는 사랑을 받았던 카라칼라의 시신은 정식으로 화장되었고, 시신은 안티오키아의 율리아 돔나에게 보내졌다.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시신을 담은 납골 단지는 다시 로마로 옮겨져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몇 주 후에 율리아 돔나도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고, 몇 달 후 어머니와 아들은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함께 신격화되었다. 그리고 마크리누스가 그를 뒤이어 황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