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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유마경 공부(2020.11.24.PM7시)
유마경 불도품
대가섭의 찬탄 / 유마힐의 게송
유마경 불도품에 대해서 오늘은 대가섭 존자가 찬탄한다는 내용이다.
불도(佛道)와 비도(非道), 무엇이 불도이고 무엇이 비도인가. 우리가 평소에 듣지 못하던 불도, 그리고 불도가 아닌 것을 이야기 했었다.
가섭존자는 그것을 듣고는 처음 듣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감동을 하고 ‘도대체가 우리가 그동안 들어오고 우리가 알고 있던 불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것을 가지고 크게 반성하게 된다.
왜 그런고 하면 유마경은 아주 줄기차게 대승불교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중심으로 해서 기존의 승단, 기존 출가스님들의 소견과 그들의 사상, 그들의 행위 이런 것들을 좀 더 개선해서, 보다 더 대승적이고, 보다 더 대중적이고, 보다 더 일반적인 방향으로 불교가 나아가야 된다는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이다.
우리 전통 부처님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리불과 목건련을 상수제자로 치지만 선종에서는 여기 나오는 가섭존자, 마하가섭이라고 해서, 대가섭을 최고가는 상수제자로 친다. 부처님 법을 유일하게 이어받았고 아난존자에게 법을 전해주고 육조혜능스님에게까지 삽삼조사(卅三祖師) 33대의 조사로서 법을 계승했다, 이렇게 정리를 하는 것이 선종의 계보다. 선종 계보로써 역사를 그렇게 정리하는 일면이 있다.
그렇다면 대가섭이 이렇게 크게 불도와 비도에 대한 찬탄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상수제자 전체가 똑같이 마하가섭과 같은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대표로서 보였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3. 대가섭의 찬탄
대가섭이 어떻게 찬탄하는가 살펴보겠다.
이시(爾時)에 대가섭(大迦葉)이 탄언선재선재(歎言善哉善哉)라 문수사리(文殊師利)여 쾌설차어(快說此語)하시니 성여소언(誠如所言)하야 진로지주(塵勞之儔)가 위여래종(爲如來種)이어늘
그때에 대가섭이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문수사리여, 이러한 말씀을 시원하게 설하시니 진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진로번뇌의 벗이 여래의 종자가 됩니다. ”
번뇌가 여래의 종자가 된다.
아등(我等)은 금자(今者)에 불부감임아뇩다라삼먁삼보리(不復堪任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다 내지오무간죄(乃至五無間罪)라도 유능발의(猶能發意)하야 생어불법(生於佛法)이어늘 이금아등(而今我等)은 영불능발(永不能發)하니
“우리는 지금 더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오무간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능히 뜻을 내어 불법을 일으키는데, 지금 저희는 영원히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장애인이 된 사람이 오욕락에 다시는 이로움을 회복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결박을 끊은 성문은 불법 가운데서 더는 이익이 없고 영원히 뜻과 원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토로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 충격적인 표현이다. 대가섭의 이런 표현은 말하자면 부처님의 전통적인 제자들의 전체적인 뜻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진로번뇌의 벗이 여래의 종자가 됩니다’ 이런 것도 기상천외한 말이다.
가섭존자 내지 전통적인 부처님 출가제자 승단중심의 불교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사상이다.
우리는 지금 더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오무간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능히 뜻을 내어 불법을 일으키는데, 지금 저희는 영원히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다섯가지 무간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다 하면 이것은 불통참회(不通懺悔)이고 전통불교에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능히 뜻을 내어 불법을 일으킨다는 표현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희는 영원히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다’ 하는 비탄에 찬 자책을 하는 내용이다.
비여근패지사(譬如根敗之士)는 기어오욕(其於五欲)에 불능부리(不能復利)하나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장애인이 된 사람이 오욕락에 다시는 이로움을 회복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지가 완전히 장애인이 되어버렸다면 무엇을 즐길 수 있겠는가? 안이비설신으로써 무슨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몸이 성해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지, 그런 뜻에서 마치 장애인이 된 사람이 오욕락에 다시는 이로움을 회복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시(如是)하야 성문(聲聞)의 제결단자(諸結斷者)는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무유부익(無有復益)일새 영부지원(永不志願)하나이다
“이처럼 모든 결박을 끊은 성문은 불법 가운데서 더는 이익이 없고 영원히 뜻과 원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탄식조의 술회를 한다.
시고(是故)로 문수사리(文殊師利)여 범부(凡夫)는 어불법(於佛法)에 유반복이성문(有反復而聲聞)은 무야(無也)니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범부는 불법에 회복할 수 있으나 성문은 없습니다. ”
‘차라리 범부는 불법에 회복할 수는 있으나 우리 같은 성문들은 없습니다’
소이자하(所以者何)오 범부(凡夫)는 문불법(聞佛法)하고 능기무상도심(能起無上道心)하야 부단삼보(不斷三寶)어니와 정사성문(正使聲聞)은 종신(終身)토록 문불법력무외등(聞佛法力無畏等)하야도 영불능발무상도의(永不能發無上道意)니라
“왜냐하면 범부는 불법을 듣고 능히 최상의 도에 대한 마음을 일으켜서 삼보를 끊지 아니하지만 성문은 종신토록 불법의 힘과 두려움 없음을 들어도 영원히 최상의 도에 대한 뜻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범부가 낫지 출가해서 수십년 동안 전통불교 또는 근본불교 소승불교 그것에 찌든 사람은 전혀 대승적인 불교다운 불교로 돌이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마저 배우지 않은 박지범부(薄地凡夫)라면 차라리 더 쉽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많다.
불교에도 처음에 길을 잘 들여야지 처음부터 불교를 잘못 공부하고 불교를 잘못 믿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자기가 그동안 배워오고 알아온 불교가 ‘완전히 옳은 불교다’ 라고 해서 도저히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자기 생각을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보다 더 새로운 불교, 진짜 불교, 정법(正法) 바른 불교를 어쩌다가 만나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기의 기존 불교에 대한 관념이 꽉 박혀 있어서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많이 보는데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어쩌다가 그런 사람들이 좋은 인연을 만나서 정법불교로 돌아오는 경우도 보지만 극히 소수다.
돌아오더라도, 본래 자기가 수십 년간 믿어오던 불교에 미련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확실하게는 돌아오지 못하고 긴가민가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우리가 많이 본다.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상식을 백퍼센트 털어버린다고 하는 것, 그것이 참 중요한데 고정관념이 되어서 아주 지극히 어렵다.
여기 가섭존자의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이다.
그동안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이 익혀온 소승적인 불교에 찌들어 있어서 대승보살불교는 ‘도저히 우리에게는 영원히 최상의 도에 대한 뜻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라고까지 고백을 한다.
대가섭존자가 찬탄함과 동시에 기존의 부처님의 제자들의 기존 상식에 대한 부정을 여기에서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상좌부 불교, 또는 소승불교 공부를 하고 와서 거기 아주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 대승불교를 공부해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오히려 남방에 가서 남방불교를 익혀 와서는 그것이 진짜 바른 불교라고 고집을 하는 이들이 많다. 도저히 돌이키지를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토론을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무슨 조금의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는 입장이다. 그런 사람들하고 이야기가 되지도 않지만 이야기 해봐야 크게 서로가 이익이 없다.
우리나라 불교는 다른 나라와 달라서 여러 가지가 산재해 있다. 선불교 비밀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 자기들 고집대로, 자기가 익혀온 대로 고정관념이 딱 구축이 되면, 도저히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는 경우다.
불교 공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비단 불교뿐만 아니고 세상살이에도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 문제라든지, 사업을 하는 문제라든지, 여러 분야에서 그런 경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참고해서, 자기의 발전을 진정으로 도모한다면 그런 것을 잘 참고해서, 버릴 것은 오랫동안 신봉해온 사상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접할 수 있어야 된다.
전공(前功)이 가석(可惜)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동안 공부한 것이 너무 아깝다. 그것이 아까워서 도저히 그동안 공부한 것을 버리지를 못한다. 가치가 좀 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는 알면서도 전공이 가석이라 앞에 공들인 것이 아까워서 알면서도 과감하게 못버린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담마기금(擔麻棄金)이라는 말로 부처님은 표현하고 있다.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린다는 뜻이다.
강원도에서 어떤 두 청년이 삼을 한 짐씩 짊어지고 큰 도시로 가서 팔려고 길을 가고 있었다. 한참 가다보니 구리가 한무더기 있다. 한 사람은 그 구리를 보더니 당장에 삼을 버리고 구리를 짊어졌다. 구리 한 짐이 예를 들어서 삼 50kg를 짊어진 사람하고 구리를 50kg 짊어진 사람하고 그 가치가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리가 값이 훨씬 더나간다 하더라도 그동안 땀을 뻘뻘 흘리고 삼을 짊어지고 온 앞에 들인 공이 아까워서 차마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계속 삼을 지고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은 구리를 짊어지고 한 사람은 삼을 그대로 짊어지고 갔다. 가다 보니 은이 나타났다. 은이 한 무더기 나타났는데 구리로 바꿔서 지고 온 사람은 구리를 얼른 버리고 은을 짊어졌다. 그런데 삼을 짊어지고 온 사람은 ‘아유 은이 값을 나가긴 나가지만 내가 그동안 삼을 짊어지고 온 공이 너무 아까워서 아이고 참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삼을 그대로 짊어지고 갈란다’ 이렇게 해서 꾸역꾸역 삼을 짊어지고 간다.
두 사람이 또 한참 가다보니까 금무더기가 나왔다.
금무더기가 나오니까 은을 짊어지고 온 사람은 얼른 은을 버려 버리고 금을 짊어졌다. 그런데 삼을 짊어지고 간 사람은 그 의리 때문에 전공이 가석이라, 그동안 삶을 짊어지고 온 그 공과 흘린 땀이 너무 아까워서 그대로 삼을 짊어지고 간다. 세상에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담마기금(擔麻棄金)이라.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여기 유마경에서 대승불교가 이렇게 꽃을 피우는데 그동안 소승불교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대승불교를 만나면 얼른 그것을 접하고 거기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을 열고 과감하게 그동안 과거에 수년 동안 공을 들여온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버리고 새롭고 좀 더 발전적인 대승불교를 얼른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불교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너무 빠르다. 변화를 빨리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은 계속 그 변화를 쫓아가고 과거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과거 고정관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고집을 부리면서 지켜온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비단 불교를 이해하는 데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데도 상당히 참고가 될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불도와 비도, 불도와 불도가 아닌 것에 대해서 잘 듣고는 대가섭이 여기서 이러한 후회가 섞인 찬탄을 한다.
4. 유마힐의 게송
다음은 유마힐의 게송이라고 해서 유마거사가 게송을 한참 읊는다. 게송을 상당히 읊는데 그 게송을 여기서 한 번 살펴보겠다.
<1>
유마힐의 게송 일(1).
이시회중(爾時會中)에 유보살(有菩薩)하니 명(名)은 보현색신(普現色身)이라 문유마힐언(問維摩詰言)하되 거사(居士)여 부모처자(父母妻子)와 친척권속(親戚眷屬)과 이민지식(吏民知識)이 실위시수(悉爲是誰)며 노비동복(奴婢僮僕)과 상마거승(象馬車乘)은 개하소재(皆何所在)이니까 어시(於是)에 유마힐(維摩詰)이 이게답왈(以偈答曰)
그때에 법회 가운데 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은 보현색신이었다. 유마힐에게 물었다.
“거사여, 부모와 처자와 친척과 권속과 벼슬아치와 백성과 도반[知識]들은 다 누구누구며, 노비와 동복과 코끼리와 말과 수레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유마힐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아주 유명한 게송이다. 유마힐은 장자 거사로 비야리성에서 최고가는 갑부이고, 최고가는 거부장자로 알려져 있는데 도대체 노비는 어디 갔고, 동복은 어디 갔고, 코끼리 말 수레 이런 것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부모 처자 권속 친척 벼슬아치 백성 이런 이들도 도대체 보이지 않고 유마힐이 혼자 있으니까, 그것을 물었다.
‘무엇으로써 도반을 삼고, 무엇으로써 부모 처자 또는 자녀로 삼느냐?’ 그런 뜻이다.
그러자 유마힐의 게송이 이렇다. 첫 번째 게송이다.
지도보살모(智度菩薩母)요 방편이위부(方便以爲父)니
일체중도사(一切衆導師)가 무불유시생(無不由是生)이라
“지혜는 보살의 어머니요 방편은 아버지입니다.
일체 모든 부처님[導師]은 다 이로 말미암아 출생합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물었으니까, 지혜는 보살의 어머니가 되고 방편은 보살의 아버지가 된다, 지혜와 방편으로 부모를 삼지 뭘 꼭 이렇게 생기고 나이는 몇 살 먹었고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살아왔고, 하는 구체적인 사람 인격체 그것을 가지고 부모를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보살의 어머니요 방편은 아버지입니다’
지혜와 방편이 부모라는 것이다.
일체 모든 부처님은 다 이로 말미암아 출생한다.
부모로부터 사람이 출생하듯이 부처님은 지혜와 방편으로 출생한다.
금강경에도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고 해서 법에 의해서 다시 출생하다, 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나이가 몇 살이냐 하는 것, 그런 것을 관계하지 말고 끊임없이 새롭게 새롭게 태어나야 된다.
계속 출생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빨리빨리 발전하고 변화하는가?
성인의 가르침이 이렇게 산적해 있는데, 그저 조그마한 그것도 정확하지도 않은 불법을 다른 사람에게 조금 듣고, 그것도 자기 수준하고 비슷한 사람들에게 조금 들은 것을 가지고 평생을 써먹는다. 평생 불교라고 생각하고 산다. 우리가 얼른 그런 데서 벗어나고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은 세상에 사는데 왜 그렇게 옹졸하게 옛생각만 고집하고 있는가?
법희이위처(法喜以爲妻)하고 자비심위녀(慈悲心爲女)하며
선심성실남(善心誠實男)으로 필경공적사(畢竟空寂舍)에
“법희선열은 아내가 되고 자비심은 딸이 됩니다.
선한 마음과 성실함은 아들이며 마침내 공적함은 나의 집입니다.”
대단한 게송이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은 아내가 된다.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얼마나 기쁨을 맛보는가?
그런데 뭐가 아내라고 했는가?
법희선열은 아내가 되고 자비심은 딸이 된다. 선한 마음과 성실은 아들이며 마침내 공적함은 나의 집이다.
아주 철저히 공적하다.
내 마음은 텅 비어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늘 고요한 마음자세를 항상 지니고 산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집이라는 것이다.
요즘 아파트 문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몇 평짜리 단독주택에 산다, 어떤 집에 산다, 우리의 관심은 전부 그런 형식적인 현상으로서의 집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을 철저히 외면할 수는 없는 입장이지만, 그러나 좀 더 다른 차원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적함은 나의 집이다, 철저히 공적하다는 것이다.
내 마음은 늘 조용하고 고요하고 그저 늘 마음속에 부처님이 계시고 관세음보살이 있고, 문수 보현이 있고 화엄경이 있고, 화엄성중이 있다. 그것으로써 내 집을 삼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좋고 값진 가구가 필요한가?
제자중진로(弟子衆塵勞)가 수의지소전(隨意之所轉)하야
도품선지식(道品善知識)이 유시성정각(由是成正覺)하며
“온갖 진로번뇌인 제자들이 마음 가는 대로 따라옵니다.
37조도품은 선지식이 되니 이로 말미암아 정각을 이룹니다.”
온갖 진로번뇌인 제자들, 번뇌 그것이 사실은 좋은 것이다. 우리가 번뇌니 진로니 하는 것, 번뇌라고 하는 것을 아주 골치 썩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제자들도 골치를 썩인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제자들이라,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는 뜻이다. 번뇌가 사랑하는 제자다.
‘마음 가는 대로 따라옵니다’ 번뇌는 내 마음 쓰는 곳으로 따라온다. 내가 일으키는 번뇌니까 내 마음 가는 대로 번뇌가 따라온다.
37조도품은 선지식이 된다. 37조도품,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저 앞에서도 열거한 바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정각을 이룹니다’ 결국은 바른 깨달음을 그것으로써 이루게 된다.
제도법등려(諸度法等侶)와 사섭위기녀(四攝爲妓女)로
가영송법언(歌詠誦法言)하야 이차위음악(以此爲音樂)하며
“모든 바라밀은 친구가 되고 사섭법은 기녀가 되어 노래로 법문을 읊으니 이것으로 음악을 삼습니다.”
모든 바라밀은, 6바라밀, 그것은 친구가 되고 사섭법 보시 애어 이행 동사 그것은 기녀가 된다. 친구와 기녀가 만나서 한바탕 질펀하게 노는데 노래로써 법문을 읊으니 이것으로 음악을 삼는다. 바라밀, 6바라밀, 사섭법, 그저 입만 떼었다 하면 6바라밀이고 사섭법이다. 6바라밀과 사섭법을 가지고 노래를 읊으니 이것으로써 음악을 삼는다, 유마거사다운 게송이다.
총지지원원(總持之園苑)과 무루법림수(無漏法林樹)에
각의정묘화(覺意淨妙華)와 해탈지혜과(解脫智慧果)며
“총지의 동산과 무루법의 숲속에서
깨달은 마음의 아름다운 꽃과 해탈과 지혜의 과일이 열립니다.”
총지의 동산과 무루법의 숲속에서, 동산, 숲속, 깨달은 마음의 아름다운 꽃과, 동산 숲 그리고 꽃들 해탈과 지혜의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다, 이 게송에서 유마거사의 삶을 그대로 다 표현하고 있다.
팔해지욕지(八解之浴池)에 정수담연만(定水湛然滿)하고
포이칠정화(布以七淨華)커든 욕차무구인(浴此無垢人)하며
“8해탈의 연못에는 선정의 맑은 물이 가득하고
칠정의 꽃[七淨華]을 펼쳐놓고 때가 없는 사람이 여기에서 목욕합니다.”
‘때가 없는 사람이 여기에서 목욕합니다.’ 칠정화(七淨華)라고 해서 8해탈과 칠정화, 불교의 전문적인 용어인데 그냥 들어만 두기 바란다.
8해탈의 연못에는 선정의 맑은 물이 가득하고, 일단 해탈이다. 해탈의 연못에는 선정의 맑은 물이 가득하고, 칠정의 꽃[七淨華]을 펼쳐놓고 때가 없는 사람이 여기에서 목욕을 한다고 하였다.
유마거사의 도량인 정원이 아주 넓고, 필요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거부장자의 집이니까 형식적인 것으로라도 이런 것을 다 갖추고 살만하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유마거사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8해탈과 7정 이런 것이 말하자면 동산과 연못과 그런 것들이 된다, 하는 것이다.
상마오통치(象馬五通馳)하되 대승이위거(大乘以爲車)하고
조어이일심(調御以一心)하야 유어팔정로(遊於八正路)하며
“코끼리와 말은 오신통으로 달리는데 대승법이 수레가 됩니다. 일심으로 조복하여 8정도의 길에 노닙니다.”
‘코끼리와 말은 오신통으로 달리는데 대승법이 수레가 됩니다. 일심으로 조복하여 8정도의 길에 노닙니다’
전부 불법수행으로써 내가 삶을 영위하지, 무슨 처자권속이 잔뜩 있고, 온갖 동산에 여러가지 기화요초들이 깔려 있고, 시중드는 사람들이 있고, 기생들이 늘 시중을 들고 하는, 물론 거부장자라면 그런 것도 상상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에 빗대어서 일체 불법으로써 그러한 것을 삼는다, 그랬다.
우리도 불법의 수행이나 공부가 어느 정도 되면 사경을 한다, 화엄경을 읽는다, 화엄경의 재미있는 구절 넉 자가 됐든지 다섯자가 됐든지 열 자가 됐든지 그런 것을 쓰고 하는 거기에서 모든 즐길 거리 오락이 다 갖추어지고 환희심이 나고 즐거움이 그 속에서 샘솟는다.
꼭 사람이 있고 동산이 있고 고급차를 타고 달려야 되고 어디 골프를 치러 다니고 그런 차원이 아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차원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이런 시간에 불법 공부를 한마디라도 우리가 들어서 내 마음의 양식을 삼으려고 한다.
간혹 세속적인 유혹에 한 번씩 마음이 끌린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의 지향하는 바 본마음은 바로 유마경에서 거부장자인 유마힐 이분이 우리들의 이상이다.
유마거사 유마거사 하니까 수행을 잘하고 불교공부를 잘하고 불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의 이상이 유마거사다.
유마거사처럼 살자는 것이다.
재산을 많이 모아놓고 동산이 있고 꽃이 있고 연못이 있고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불법의 여러 부분들이, 6바라밀이다 4섭법이다 4무량심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놀이, 즐길거리,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리’들이다.
한마음, 일심으로 조복하고 8정도의 길에 노닌다.
대승법이 수레가 된다. 소승법이 아니라 대승법이 수레가 된다고 하였다. 내용이 기가 막힌다.
상구이엄용(相具以嚴容)하되 중호식기자(衆好飾其姿)하고
참괴지상복(慚愧之上服)에 심심위화만(深心爲華鬘)하며
“32상을 갖추어 용모를 장엄하고 80종호로써 그 자태를 꾸미며, 부끄러워함은 옷이 되고 깊은 마음은 꽃다발이 됩니다.”
깊은 마음은 꽃다발이 된다. 심심위화만(深心爲華鬘).
꽃을 꼭 꽂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심심(深心) 아주 마음속에 깊숙하다, 깊은 마음이 그대로 꽃이라는 것이다. 또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 참괴(慚愧) 그것이 옷이 된다는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자세, 얼마나 그럴듯한가.
32상을 갖추어 용모를 장엄하고 80종호로써 그 자태를 꾸미고
부유칠재보(富有七財寶)하되 교수이자식(敎授以滋息)하고
여소설수행(如所說修行)하야 회향위대리(廻向爲大利)하며
“일곱 가지 보물이 있어 부자가 되고 가르쳐 줌으로써 불어납니다. 말[言]과 같이 수행하여 회향으로 큰 이익을 삼습니다.”
칠재보(七財寶) 일곱 가지 보물이 있어 부자가 되고, 가르쳐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교수(敎授)함으로써 그것이 자꾸 불어나는 것이다.
저도 이 강의를 하지 않고, 물론 나 혼자도 잘한다, 그런데 혼자 공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훨씬 많다.
나 혼자 내버려 두면 그렇게 많이 공부를 안한다. 그것은 솔직한 고백인데 여기도 보면 가르쳐 줌으로써 불어난다고 하였다.
남에게 가르쳐줌으로써 불교에 대해서 자꾸 불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불자님들에게 자꾸 한 사람이라도 앉혀놓고 막 그냥 돈을 줘가면서 ‘한시간 들으면 내가 얼마를 줄테니까 니가 내 이 이야기를 들어라’ 이런 식으로라도 자꾸 배운 것을, 자기가 감동받은 내용들을 가르쳐 주고 이야기 해주는 훈련을 하라고 말하곤 한다.
요즘 우리 문수선원에도 교수 출신 분들이 여러 분이 온다. 정년퇴직해서 그래도 다른 데 기웃거리지 않고 불법공부 불교경전 공부하는 데 아주 재미가 있어서 취미를 느끼고 그렇게 와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여러 분이 계신다.
국제포교사 자격증을 가지신 분, 영어에 뛰어나신 분들 그런 분들 많이 온다. 그분들을 보면 보기가 좋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불법을 공부해서 한 구절이라도 자꾸 가르쳐주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러면 자기 공부가 더 잘된다.
저의 경우를 두고 생각을 하면 그렇다. 자기 공부가 훨씬 깊어지고 잘된다.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다.
‘말[言]과 같이 수행하여 회향으로 큰 이익을 삼습니다.’
가르쳐 줌으로써 불어난다.
말과 같이 수행하여 회향으로 큰 이익을 삼는다.
유마힐의 게송이 여러 개인데 앞으로도 계속된다.
오늘 유마경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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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다. 지금 93명이 이렇게 공부하고 계신다. 참 너무너무 좋은 내용이다.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다.
좀 아쉽다. 공부를 좀 더 하고 싶기도 한데 오늘 조금 목이 잠기고 시간도 30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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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더 밝아지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계속 쉬지 않고 굴러가서
미망에 덮여있는 만중생들
하루빨리 지혜의 눈을 활짝 뜨기를 발원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戒香ㆍ定香ㆍ慧香ㆍ解脫香ㆍ解脫知見香!
@釋대원성 고맙습니다^^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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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정법불교를 모르고 자기의 보따리 불교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안티깝다.
薄地凡夫가 차라리 正法을 배우고 修行하기가 쉽다.
智慧는 보살의 어머니요 方便은 아버지. 모든 부처님이 여기서 탄생하셨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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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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