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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황제의 집권 말기인 AD 66년 로마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베드로후서는 종말을 부인하고 조롱하는 거짓 선생들의 거짓 주장을 논박하고 바로 잡기 위해 쓰여진 서신입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강해할 때 살펴본 것처럼, 종말과 재림에 관한 교훈은 초대교회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교훈과 함께 사도들이 전파하던 핵심적인 복음이었는데(살전 1:10), 문제는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저들이 생각했던 대로 재림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주의 재림이 늦어지고 이를 기다리던 성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게 되자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종말과 재림 자체를 부인하는 거짓 교훈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벧후 2:2), 사도 베드로가 이를 바로 잡고자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I. 둘째 편지(1, 2절)
1. 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하십니다.
a. 둘째 편지라 하심은 베드로전서에 이어 사도 베드로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성도들)”(벧전 1:1)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 저들의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려 했던 교훈이 바로 본문(베드로후서 3장)에 기록된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이 교훈을 저버리고 오히려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어 종말과 재림을 부인하니 다시금 이 두 번째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욥기 33:14)하셨습니다. 종말과 재림에 관한 교훈들을 다시 반복하여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지만 성도들이 이 교훈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종말과 재림에 대한 말씀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인기 있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하신 베드로의 교훈보다 거짓 선생들이 전하는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설교를 더 좋아했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딤후 4:3)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교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을 외치는 설교자들보다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설교자를 좋아하고 좇아갈 것이라는 뜻인데, 지금이 바로 종말의 복음이 외면당하고 있는 말세지말이라는 겁니다.
2. 2절,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하십니다.
a. 여기서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은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언을 의미하고,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통해 주신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직접 주신 종말에 관한 말씀들도 등장하는데, 마태복음 24장과 25장, 누가복음 21장,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감람산 강화와 요한복음 14장에 기록된 다락방 강화가 그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이와 같은 말씀들은 이미 초대교회 안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된 교인들이 이런 말씀들을 외면하고 멀리했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b. 신구약 성경 31,102구절 가운데 1,845절이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고, 그 가운데 1,542구절은 구약 성경에, 나머지 303절은 신약 성경에 등장합니다. 말씀의 분량으로만 따지면 성경 전체의 5분의 1이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재림뿐 아니라 초림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도 등장하는데, 이도 분량으로 따지면 초림에 관한 예언이 1번 등장할 때마다 재림에 관한 예언은 8번 등장하고, 속죄와 구원에 관한 예언이 1번 등장할 때마다 심판과 재림에 관한 예언이 2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21번이나 종말과 재림에 관해서 설명하시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고, 이런 말씀을 주시면서 50번이나 우리가 “깨어서 이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말씀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앞에서도 소개한 다락방 강화인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예수님이 “내가 잠시 후면 십자가를 지고 너희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동요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하셨습니다. 이처럼 종말과 재림에 관한 교훈은 신구약 성경뿐 아니라 예수님의 핵심 교훈 중에 하나였는데,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된 성도들이 이를 외면하자 이 교훈을 다시금 상기시키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II. 기롱하는 자들(3-7절)
1. 3절,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하십니다.
a. “기롱한다”는 단어가 헬라어 ‘엠파이조’인데, ‘비웃다’, ‘조롱하다’, ‘능욕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활동하던 초대교회도 그랬지만, 마지막 때가 될수록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인데, 재림의 복음을 전하면 이단시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 지금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말씀하신 말세가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성애가 창궐한 소돔성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천사들을 롯에게 보내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에 롯이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도 소돔성에 종말과 심판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이 말을 들은 사위들이 이를 “농담으로 여겼다”(창 19:14)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차하크’인데, 이는 헬라어 ‘엠파이조’와 마찬가지로 ‘비웃다’, ‘희롱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롯의 사위들뿐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4:17)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차하크, 엠파이조) 여기는 자들에게는 소돔성에 내려진 불의 심판과 같은 무서운 심판이 기다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b.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하십니다. 거짓 선생들이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말씀인데, 저들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기에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농담으로 여기고, 조롱했다는 겁니다. 초림의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죄인들을 심판하러 오시기에, 세상에서 정욕대로 살기 원하는 자들은 종말과 재림의 소식을 듣기 싫어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종말과 재림의 복음을 “기롱하는” 거짓선생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선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2장 2절에서는 저들에 대해 “호색하는 자”라 했고, 3절에서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는다”하셨습니다. 음란하고 탐욕스런 특징을 가진 이들은 초대교회 당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을 의합니다. 영은 고귀하고 영원하지만 육체는 천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는 헬라철학에서는 육체적인 금욕을 강조하는 스토아 학파와 이와는 정반대로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생겨났는데, 영지주의 이단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영향을 받아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는”(벧후 2:10) 음란한 자들이었고, 또 “발람처럼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벧후 2:15) 가는 탐욕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이었기에 사도들이 전한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들을 싫어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5)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오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고, 세상 정욕을 좇아 음란하고 탐욕스런 삶을 사는 자들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4절,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하십니다.
a. 종말과 심판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 다시 말해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부인하면서 그 근거로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를 이신론(deism, 理神論)이라고 하는데, 이신론은 하나님이 비록 천지창조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창조행위 후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중지하고, 자연에 내재하는 합리적 법에 의해서만 우주를 통치한다는 주장입니다. 이신론(deism, 理神論)은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여기기 시작한 17세기에 등장한 신학 이론이긴 하지만, 방금 읽은 4절의 말씀을 보면 이미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 이들은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4)라는 이신론적 주장을 내세워 창조의 사건 이후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적이 없었기에,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신다는 약속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주장처럼 창조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일까요? 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창조 사건 이후에도 인간의 역사에 끊임없이 관여하셨고, 또 관여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저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이후로 번성한 인류가 타락천사들과 함께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홍수의 심판을 내려 세상을 멸하셨습니다. 홍수의 심판 이후 사람들이 시날 땅에 모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은 저들의 언어를 흩어 그 악한 계획을 무너뜨리셨고, 이후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여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실천하셨고, 때가 차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4)고 한 거짓 선생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 사건 이후에도 끊임없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c.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4)는 주장은 지구의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도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지구의 생태계가 여러 번의 변화를 경험했고, 또 경험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 했고(창 3:18), 노아의 때에는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궁창 위에 있는 물을 땅에 쏟으셨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조 이후로 지구의 생태계가 두 번의 격변을 경험했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7년 대환난이 시작되면 지구의 생태계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재앙으로 다시 한번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지구의 생태계는 또다시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렇듯 주님이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의 기간동안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으로 바뀐 지구의 생태계도 천년왕국이 끝나면 모두 불에 타 사라지고 이후에는 하나님이 새하늘과 새 땅을 펼치실 것이라 하십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었던 것”(4)이 아니라 그동안 지구의 생태계는 여러 번의 격변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3. 5, 6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하십니다.
a. 거짓 선생들이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이신론적 주장을 펼치자 사도 베드로는 “세상이 물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저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세상이 물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천지 창조의 셋째 날 궁창 아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뭍(땅)이 드러나게 하셨다 하신 창세기 1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창세기 6장에서는 이렇게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땅”이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멸망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로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겁니다.
b.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했다”는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천지 창조의 과정을 기록한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물로 감싸 있었는데, 이 물 위로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운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이 말씀은 본래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성령께서 생명으로 가득한 지구를 탄생시키기 위해 땅을 감싸고 있는 물 위를 부지런히 오고 가셔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땅을 감싸고 있던 물을 둘째 날에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로 나누셨고(창 1:3), 셋째 날에는 궁창 아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뭍(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창 1:9). 지구가 처음 창조될 때는 우리가 지금 바다라고 부르는 궁창 아래 물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 하늘이라 부르는 궁창 위에도 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인데, 이런 궁창 위의 물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해로운 광선을 막아주고 또 온실과 같은 역할을 했기에 지구 전체가 온화하여 공룡과 같은 대형 동물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이고, 사람들도 천 년 가까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 심판 때 궁창 위에서 온실과 같은 역할을 하던 물이 비가 되어 땅으로 쏟아짐으로(창 7:11,12), 지구의 생태계가 급격히 변화된 것이고, 인간의 수명도 급격히 짧아지게 된 것입니다.
c. 5절에는 이렇듯 땅은 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겪었지만 “하늘은 옛적부터 그대로 있었다”라고 말씀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하늘이 단수형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과 원문을 보면 하늘이 the heavens라고 해서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는 3종류의 하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구름 아래로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이 sky라고 해서 첫 번째 하늘이고,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우주(comos)가 두 번째 하늘이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세 번째 하늘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이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째 하늘(삼층천)”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가게 될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옛적부터 땅은 여러 번의 격변을 겪어왔고 또 겪게 될 것이지만, 하늘, 특별히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d. 5절과 6절에서는 어머니 뱃속에 있는 양수처럼 땅이 창조될 때 생명을 잉태하는 역할을 했던 물이 노아의 홍수 심판 때는 오히려 땅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십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애굽 땅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물(출 17:6)이, 애굽의 군사들에겐 저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경에서 물은 성령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비유한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이사야 55장 10절, 11절인데,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하십니다.
때로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때로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물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영생)을 주는 도구가 되지만, 이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겐 멸망으로 인도하는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4.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하십니다.
a. 노아의 시대 때는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7년 대환난의 기간 동안 인과 나팔과 대접의 재앙을 내려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 하셨는데, 이때 피섞인 우박과 불이 땅에 쏟아지고(계 8:7), 하늘에서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떨어지고(계 8:8), 횃불과 같이 타는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계 8:10), 네 번째 대접의 재앙이 쏟아질 때는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고(계 16:8), 또 적그리스도가 머물던 큰 성 바벨론이 불에 타서 사라질 것(계 17:9,18)이라 하셨습니다. 이후로 예수님이 오시어 이 땅에 펼치실 천년왕국 끝에는 무저갱에서 풀려나온 용과 함께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할 것이라 하셨고(계 20:9), 이후로 죄인들을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는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이고(계 20:13-15), 이후로는 7절과 12절의 말씀처럼 지금의 하늘과 땅이 불에 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불의 심판을 받고 사라질 장망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b.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었다”하신 이 말씀은 또 마지막 때에 지구가 뜨거워지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4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는가?”이고, 두 번째는 “무엇이(What)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가?”이고, 세 번째는 “누가(Who)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가?”이고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왜(Why)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는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지만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인간의 산업 활동이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불로서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계시다는 겁니다.
인간의 경제 활동으로 공기 중에 탄소가 증가해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고 이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퍼뜨리고 있는 대표적인 거짓말(사이비 과학)인데, 사실 지구의 온도를 결정하는 것은 탄소가 아니라 태양입니다. 주기적으로 활동하는 태양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가 찾아오면 이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이고, 빙하에 갇힌 공기를 분석해보면 역사적으로 지구의 온도가 높아졌을 땐 공기 중에 탄소의 양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 바닷물이 데워지고, 이런 바닷물에선 많은 탄소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대기중에 탄소의 수치가 높아지면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면 탄소의 수치가 높아진다는 겁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도 이를 잘 알고 있지만, 사람들을 감시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인간의 산업활동이 지구를 뜨겁게 만든다는 사이비 과학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불태워 없애기 위해 태양을 통해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계신 것인데, 7년 대환난이 오면 이렇게 뜨거워진 태양이 사람들을 불태워버리는 재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계 16:8). 실상이 이러하니 우리가 지구의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말고,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을 즐기며 불타버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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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