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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케가와 여행2 -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에 도착해서 다카텐진성을 회상하다!
2019년 4월 9일 교토 에서 신칸센 기차로 마이바라 (米原 미원)에 도착해 코인로까
에 배낭을 넣고는 오미철도 마이바라역 에서 사철을 타고 요카이치 八日市
역에 도착해서 택시로 백제촌 百濟村 을 지나 산을 올라가 고구려승 혜자 의
안내로 쇼토쿠 태자 가 지었다는..... 햐쿠사이지 百濟寺(백제사) 절을 구경합니다.
돌아오다가 사케의 명가 오카무라 혼케 (岡村本家 강촌본가) 까지 구경하고는 마이바라
米原 역으로 돌아와 코인로카에서 배낭을 찾아 신칸센 新幹線(신간선) 기차를
타고 나고야역 에서 고다마로 환승해 도요하시와 하마마쓰를 지나 가케가와 掛川
(괘천) 역에 도착하기로 도요코인 가케가와에키 신칸센 미나미구치에 체크인을 합니다.
그러고는 기차역에 있는 인포메이션센 센터 로 가는데... 가케가와 패스
를 1800엔에 구입하면 가케가와성 과 스테인드 글라스 뮤지엄
및 화조원 등 모두 볼수 있으니.... 경제적으로 조금 이득이라고 합니다.
혹은 시내에 카나야에키 金谷駅(금곡역) 에서 고풍스러운 엣날 기차인
증기 열차 인 오이가와 철도 를 타면 경치가 좋은 센즈 千頭(천두)
역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토마스 기차 를 승차할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인포 에 들러 시내 지도며 여러 가지 유인물들을 챙기는데
원래 계획은 남쪽 교외에 다카텐진성 高天神城 (고천신성)
에 갈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은지라 역 북구 로 나갑니다.
오래된 대로 를 천천히 걸어서 기념품 상점들과 카페며 레스토랑을 살펴 보고는 10여분을
걸어서 가케가와성 掛川城(괘천성) 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늦은지라 외관만 둘러보다
보니 지금이라도 택시를 잡아 다카텐진조 高天神城 (고천신성) 에 가야하나 망설여 집니다.
인포메이션 에서 받은 버스 시간표 를 보자니...... 가케가와역 북구 3번 승차장
에서 다카텐진성 아래에 있는 土方(토방) 이라는 마을로 가는 버스는
1시간에 2대 가량 있으며 20분 가량 걸리는데.... 요금은 470엔 이랍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서 성은 산 위에 있으니 1km 정도 산쪽으로 걸어야 합니다!
오전에는 시간당 2대가 있지만 낮인 12시 부터는 1대씩이고.... 게다가 막차가
15시 28분에 출발 하니, 이미 시간이 지난지라 꼭 갈려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교토에서 에도(도쿄) 에 이르는 도로는 일본의 동쪽 지방이니
오래전 부터 도카이도(東海道 동해도) 라고 불렀는데 53역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여기 가케카와 도 교통의 요충지 였으니 주요 역참 에 속한다고 하는데.... 고흐와
모네, 마네, 드가 및 고갱등 프랑스 인상파 미술 탄생에 계기를 제공해준 일본
민속화 우키요에 (浮世繪(부세회)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廣重 1797-1858) 는
도카이도의 53경치(東海道五十三次) 중에서 가케가와 掛川(괘천) 도 그림 으로 그렸습니다.
지금이야 여기 역 북쪽이 가케가와의 중심 이지만 센고쿠 시대 에는 이보다 좀 더
남쪽이 중심 인지라....... 바다를 끼고 동쪽으로 가는 도카이도(東海道) 도로를
내려다 보는 산봉우리 에는 험하고 견고한 "다카텐진성(高天神城)" 이 지어졌습니다.
1464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아들이 없으니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 로
지명했는데 그 1년 후에 도미코에게서 친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니 부인은
쇼군직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지라 정권의 실력자 야마나 소젠 에게 협력을 부탁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요시미는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 와 손을 잡았는데... 시바 가문과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독 상속 문제 까지 더해져 1467년 오닌의난(應仁亂) 이
발발했으니...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동군은 24개국에서 16만명 그리고 야마나
소젠의 서군은 20개국에서 9만명을 동원해 "교토 시내에서 전투" 가 벌어지게 됩니다.
병력 수에서 앞선 동군으로 기울던 전세는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등 6개국의 영주 로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 의 28세손 오우치 마사히로씨가 2만 군세 를 이끌고
서군에 참가하니 승부를 낼수없는 가운데 교토 민가의 절반이 소실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지방에서 병사를 이끌고 상경한 무장 들은 막대한 전비를 쓰며 전투 과정에서
희생을 치르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으니 논공행상이 없자 빚더미에 올라
앉으면서 자기 고향으로 귀향해 자립 하니.... 이후 일본은 300여개 나라 로
쪼개져서 약육강식 전투로 날을 지새는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 에 접어듭니다.
전투로 날을 지새는 약육강식 센고쿠 시대가 100년이 지날 무렵 아시카가 막부를 대신
해서 교토로 올라가 일본을 통치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다이묘가 두명 있었으니
하나는 가이국(야마나시현)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 으로.... 교토로 향하는 길목인
시나노(나가노) 로 쳐들어갔다가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 에게 발목이 잡혀 버립니다.
그사이 시즈오카현인 스루가와 도토미 의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 는 북쪽의 다케다 신겐
그리고 동쪽 오다와라의 호죠씨와 3국 결혼 동맹 을 맺어 후방의 안전 을 확보한
다음 11560년 6월 미카와 성주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선봉으로 2만 5천 이 서쪽
오와리국(나고야) 을 침공했다가 방심해서는 5천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고 죽습니다.
가이국(야마나시)의 다케다 신겐 은 10여명의 영주들이 난립한 시나노(나가노) 를 침략해
80% 를 장악했으나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의 남하로 5차례 대전투 를 치르는등
20년간에 걸쳐 시나노를 평정한후 남쪽으로 창끝을 돌려 스루가를 차지 하니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서쪽 도토미를 차지하니 국경을 접합니다.
다케다 신겐 은 1572년 교토로 상경하기 위해 2만 7천 대군으로 도토미국 하마마쓰로 진격
하니 12월 이에야스 는 오다의 원군 3천이 도착하자 성을 나와 미카타가하라 에서
일본 최강 가이국의 기마대와 전투 를 벌였으나 1만 1천 중과부적으로 이에야스의
대패 로 끝났으니....... 신겐은 서쪽으로 진출하다가 1573년 4월 전장에서 병으로 죽습니다.
만약에 신겐이 죽지 않았다면 오다 노부나가 대신에 그가 일본을 통일 했을 것입니다!
신겐의 絶命詩 (절명시) :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 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
“대부분 땅에 맡겼으니 이제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 없이 내 인생은 풍류 였도다.”
다케다군은 가이(야마나시현) 본국으로 후퇴했으나 병력은 온존하니 후계자가 된 다케다
가쓰요리 는 곳곳에서 싸움을 벌여 도토미를 침공 하여 아버지 신겐 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난공불락인 다카텐진성(高天神城)을 손에 넣으니 1차 다카텐진성 전투
라고 합니다. 1574년 5월 다케다 카츠요리 (武田勝頼)는 25,000 대군을 거느리고
도쿠가와군 다카텐진성(高天神城)으로 쳐들어 가니 성주는 오가사와라 나가타다 였습니다.
이에야스군의 총 병력은 1만이라 중과부적인 이에야스 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
합니다. 다카텐진성 은 다케다군의 맹공으로 니시노마루를 잃고 병량도 궁핍하여
낙성의 위기에 몰렸는데, 6월 14일에 노부나가의 원군 이 기후를 출진하여 17일에
미카와의 요시다성에 도착 했지만 18일에 성 안에서 오가사와라씨를 따르던 자가
다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여 반란 을 일으키니...... 결국 다케다군에게 항복 하고 말았습니다.
이 "성공이 독" 이 되었으니 카츠요리는 성을 점령한 것으로 거만해져 1년후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배하는 원인 이 되는데.... 한편으로는 위대했던 아버지
신겐을 뛰어넘는 모략가임을 가신들에게 표시하려는 의도에서 신하들을 통제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승리를 꼬투리로 잡아 가신들에게 군림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575년 5월 신겐의 아들인 다케다 가쓰요리 가 기마 군단을 이끌고 재침하여 도쿠가와 -
오다 노부나가 연합군 과 미카와 동쪽에서 결전하니 "나가시노 전투" 인데......
오다 노부나가군 2만5천에 도쿠가와군 1만3천 연합군 3만 8천 에 가이의 가쓰요리는
1만 5천 으로 병력은 열세이나 일본 최강의 기마군단 이라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천재성 이 발휘되니 조총 삼단사격술 을 창안합니다. 전방에
기마군단의 돌격을 저지하는 방책을 치고 조총부대를 전면에 내세우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의 신립은 충주 탄금대 에서 기마병을 왜군에게 돌격 시키면서 조총은 사거리가
짧은데다가 또 한번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그 사이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3단 사격전술" 은 첫 줄이 총을 쏠때 두번째 줄은 장전하고, 세번째 줄은 총구를
청소 하니.... 교대로 일어서서 차례대로 총을 쏘면 사격은 중단없이 연속 됩니다?
전통적인 전투방식 과 무사의 자존심 에 가득찬 가이국 기마병사 들은 연속되는
총격 앞에서도 전혀 후퇴하지 않고 우직하게 돌격을 계속 했으니 기마군단은 전멸 합니다!
1894년에 동학군이 우금치 에서 30여차례 돌격으로 조선군 기관총에 전멸당한 것 처럼...
연속극에는 동학군이 일본군 총격에 죽은 것 처럼 나오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조선군과 일본군, 보부상에 양반들의 민보군 등 4자 연합군은 함께 동학군을 소탕
했는데 동학군이 동족인 조선군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죽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동학군은 1만여명 이며 조선군은 신정희등 2천 5백 이고 일본군은 미나미소좌 휘하 모리오
대위의 예비병 2백 이었으니, 일본군은 후방의 산 꼭대기에 포진 하고 전방에는 죄우로
조선군이 포진 했으니 동학군은 조선군 대포와 기관총 십자포화에 죽었는데.... TV
연속극 녹두꽃 은 동학군이 일본군 기관총에 죽은 것 처럼 전혀 사실과 다르게 방송 하네요?
일본군은 병력도 200명에 불과할 뿐더러 후비병이라고 불리던 예비병이라 대포나 기관총도
없었고 소총도 조선군 보다도 더 구식이었으며, 후방인 산꼭대기에 배치된 것이라 전투
참가조차 하기 어려웠지요? 황토현 전투 등에서 이경호와 홍계훈을 이긴 동학군이 전멸
한 것은 지휘권을 육군대학에서 유럽 전술사를 연구한 미나미 소좌가 행사했기 때문인데
기관총과 대포를 가진 조선군은 조선인 아닌 일본장교가 지휘하니 우수한 군대로 바뀌었네요?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에서 다케다(武田)군이 오다(織田), 도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참패하자 후타마타성, 이누이성에서 도쿠가와군의 반격이 시작 되고 요코스카성 을
축성한후 다카텐진성을 압박 하니 2차 다카텐진성 전투 (第二次高天神城の戦い) 입니다.
158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5천 군세를 거느리고 다카텐진성 탈환 을 노렸으니, 먼저
인근에 요코스카성 横須賀城 (횡수가성)을 축성하고 다카텐진성 高天神城(고천신성)
주변에 목책과 녹각 을 심고 병량 공격 에 나서니 성을 지키던 장수는 이마가와
씨의 옛 신하였던 오카베 모토노부 (岡部元信) 였는데.... 가이국에 원군을 요청 합니다.
하지만 가이(甲斐)국 다케다 카츠요리 (武田勝頼)는 다카텐진성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니
재정이 열악해져 군비를 충당할 수 없었는데다가 동쪽의 옛 동맹국이었던 오다와라의
호조 우지마사를 경계 해야 했고 오다 노부나가 측과 화친 협상 중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쿠가와군의 포위로 인해 식량이 떨어진 다카텐진성의 병사들은 대부분 아사 하여
1581년 3월 25일 오후 10시경에 다케다군은 성에서 나왔는데 도쿠가와군은
이를 쳐서 승리해 688개의 수급을 베었으니 다케다씨의 위신을 실추 시킨
싸움이 되고 키소 요시마사를 비롯한 지역 호족들의 이반 및 모반 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저런 옛일을 회상하고는 시간이 늦어 가케가와 성에는 들어갈수 없으니 동쪽
으로 걸어서 가케가와성의 해자 였던 강변에 심어진 벚꽃 을 보는데....
2년 전과는 달리 올해는 벚꽃철이 일찍 든지라 대부분 벚꽃이 져서 아쉽습니다.
그러고는 가케가와 성으로 돌아와 왼쪽 역쪽으로 난 큰 길을 걸어서 돌아오다가 만두와
꼬치 를 판다는“遠州誠家 원주성가”라는 이름을 달고있는 와후이자카야 和風居酒屋
(일본식거주옥) 로 들어가는데 遠州誠家 라면 “엔슈세이이에” 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야끼만두 자오츠(餃子 교자) 를 안주로 시켜 생맥주 나마비루 를 한잔 드니 오늘 아침에
교토를 출발해 마이바라와 요카이치시를 거쳐 깊은 산속에 쇼토쿠 태자가 세운
햐쿠사이지 百濟寺(백제사) 절을 보고 사케의 명가 오카무라 혼케 를 거쳐 다시
신칸센을 타고 여기 가케가와로 달려와 성을 보는 힘든 여정에서 바로소 한숨을 돌립니다.
그러고는 나와서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어 가케가와역 으로 돌아오는데
이 도시는 도로변에 여성등 조각품 을 많이 세워 두었으니
여행자들은 거리를 걸으면서 조금도 심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리에서 보니 여가 가케가와 신사 에서 거행하는 마쓰리 포스터 가 있기로
살펴 보고는 호텔로 돌아오는데 좀전에는 워낙 빨리 되돌아 나가느라
미처 방 안을 살피지 못했는데 누워자려고 하니..... 베개가 하나 뿐 입니다?
그러고보니 방도 좁고 이불도 부족한지라 리셉션에 내려가서는 방이 1인실 이라고 말하니
뭔가 설명하더니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하는데... 조금 후에 보니 베게와 이불에
칫솔이며 차와 컵 등등 한 보따리 들고 올라오는데, 내거 비용이 가장 싼
2인 합계 6천 이백 칠십엔 짜리 방을 택했더니..... 그럼 1인용 방에 2명이 자는 걸까요?
샤워를 하고는 텔레비젼을 보다가 자는데... 내일은 가케가와 카죠엔 ( 掛川 花鳥園 )
과 가케가와성 을 보고는 벚꽃의 명소 가케가와 모리마치 오쿠니 진자 掛川
森町 小國神社 까지 찾아 구경하고는 시미즈 로 가서 눈을 인 후지산 을 볼 생각입니다.
첫댓글 연말이라서 조금 바빠서 몇일만에 들럿습니다.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늘 죄송합니다 시간나는데로 자주 들러겟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