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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18일 주일
[(녹) 연중 제20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오늘, 우리를 당신 벗으로 삼아 이 성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부활의 복된 희망을 노래하는 세상의 교회를 하늘 나라 축제의 잔칫상에 참여하게 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는 지혜의 외침을 전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시며,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 잠언의 말씀입니다. 9,1-6
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2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3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4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5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15-20
형제 여러분, 15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두 독서와 복음 모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없는 이에게”(잠언 9,4) 자신이 주는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점은, 지각없는 사람이 과연 그 초대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금보다 귀하다고 거듭 말하지만, 그 지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 지혜의 초대는 수고스럽게만 보입니다.
한편 에페소서는 술에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도록 초대합니다. 이 초대도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금이 악한 때라고 하면서 어떻게 모든 일에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말할까요? 어리석은 자라면 아마도 악한 때의 흐름에 휩쓸려 살거나, 아니면 악한 이 세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세상 안에서도 지금 주어진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복음 또한 초대입니다. 잠언의 초대에서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를 받아먹으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초대 때문에 “말다툼”(요한 6,52)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에게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하여 주실 때는 말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많은 이가 모여들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과 음료를 받으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다만 육신의 양식을 구하려 하는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서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구하여 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주님 말씀을 접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찾고 갈구하던 주님께서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아주 가까이 지척에 현존하신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
더 은혜로운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너무나 쉽다는 것입니다. 엄청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인해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긴 하는데, 도통 주님 현존 체험보다는 부재 체험으로 기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관건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요 습관처럼, 후딱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성체성사를 대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좋은 제안을 몇 가지 건네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을 잘 쓰랍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금쪽같은 시간을 잘 사용하랍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미사 입당송의 한 말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오늘 우리의 매 시간들이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거룩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권고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하루 하루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놀라운 업적과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찬미가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불평불만을 멈춰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절 어두웠던 상처는 자비하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모두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저 오늘 주님 현존 안에 기쁨의 찬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성체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하는 분임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 중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입니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거나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또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입니다. 어떻게 에너지가 없었는데 온 우주라고 하는 어마한 에너지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생명체도 무생물보다는 높은 에너지입니다.
생명체가 죽어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무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동물도 하등 동물보다 에너지 체계가 높습니다. 그래서 고등동물이 세포가 분해되는 건 있어도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동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동물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아무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모든 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만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정신적인 에너지도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에너지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죽고 싶어집니다. 에너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고프게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배고픔을 쾌락으로 채우려 했으나 채워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50세가 넘어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때 그는 만들어진 것은 창조자에게서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존재가 존재를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을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 생명의 희생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한 장암 환자를 치료해줍니다. 암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밤에 습격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솔제니친은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생명도 받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악하며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가 지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는 저절로 생성되거나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죽음 앞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이 됩시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신상에 귀의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깨와 소금이 만나면 ‘깨소금’이라고 합니다. 깨와 설탕이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깨달음’이라고 하네요. 설탕이 달기 때문에 ‘달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운명처럼 만나서 세상을 변화 시킨 인연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후에 ‘일체유심조’라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만나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을 구하였습니다.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만유인력’이이라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만나서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을 만들었습니다. 2024년 저는 댈러스로 와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남길곳이라고 이름 지은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그 창고에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7기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27기 사목회는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말씀과 친교가 넘쳐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합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삶과 죽음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이 먼저고, 죽음이 나중이니 삶과 죽음은 순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사고락, 생사를 함께한 전우, 생사여탈, 생사확인’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과 삶을 이야기한 말도 있습니다. ‘사생관, 사생결단’과 같은 말입니다. 삶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삶은 자칫 허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슬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흙이 되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죽음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한줌의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삶은 그 이정표를 향해서 떠나는 순례입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 해 주는 ‘조언’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말은 믿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이곳에 투자하면 많은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면 본인이 하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업은 경쟁자가 많아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영업자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헌신이 없는 성공과 재물은 마치 사막에서 보이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신기루는 허상일 뿐입니다. 회개와 십자가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뿌리지 않고 열매 맺는다는 신앙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과정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수고와 헌신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빵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그래서 또 다시 배고프게 하는 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선과 악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헬레나 (Helen)
신분 : 황후
활동지역 :
활동연도 : 250?-330년
같은이름 : 헤레나, 헬렌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Helena)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의 드레파눔(Drepanum)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270년경에 로마(Roma)의 장군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를 만났는데, 그녀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났다.
293년에 남편 콘스탄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자 중 한 명인 막시미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카이사르(Caesar)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였다.
306년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의 휘하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선포하였고, 312년 10월 12일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였다.
그 후 그는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에게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를 드렸다.
헬레나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Milano) 칙령을 반포하게 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신자들을 석방하였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일을 도우면서 수많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다.
그 후 아들이 동서 로마제국 모두를 장악한 뒤에 만년에 접어든 헬레나는 326년경에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지에 오래 머물면서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성묘 성당)을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의 상징은 십자가이며, 이콘에서 십자형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인은 오직 헬레나뿐이다.
그녀는 330년 8월 18일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Izmit)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사망하여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안장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5월 21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성 알베르토 우르타도 크루차가(Alberto Hurtado Cruchaga)
신분 : 신부
활동연도 : 1901-1952년
같은이름 :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후르타도
성 알베르투스 우르타도 크루차가(Albertus Hurtado Cruchaga, 또는 알베르토 우르타도 크루차가)는 1901년 1월 22일 칠레(Chile) 중부에 위치한 비냐델마르(Vina del Mar)에서 태어났다. 우르타도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다 팔아야 했다. 그래서 우르타도와 그의 형제들은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우르타도는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된다는 것과 집이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받는 자애에 대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장학금을 받아 산티아고(Santiago)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성모회(the Sodality of Our Lady)의 회원이 되어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증진시키며, 매 주일 오후마다 가장 불쌍한 이웃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1917년 중등교육을 마친 후 우르타도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를 소망했지만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오후와 저녁에 일을 해서 가족들을 돌보면서도 가톨릭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병행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매 주일마다 그들을 방문하였다. 병역 의무로 인해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의무를 완수한 후 1923년 초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우르타도는 1923년 8월 14일 치얀(Chillan)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25년에 그는 아르헨티나(Argentina)의 코르도바(Cordoba)로 가서 인문학을 공부했으며, 1927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에스파냐(Espana)로 갔다. 그러나 1931년 에스파냐에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되자 벨기에(Belgium)의 루뱅(Louvain)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1933년 8월 24일 루뱅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35년에는 교육학과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벨기에의 드롱겐(Drongen)에서 종신서원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거치는 제3수련기를 마친 후 1936년 1월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산티아고에서 성 이냐시오 대학의 종교학 교수로 그리고 가톨릭 대학교의 교육학 교수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위한 성모회의 지도를 맡았고, 회원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참여하였다. 우르타도 신부는 자주 피정 지도와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적 지도를 담당했는데, 이를 통해 여러 젊은이들이 사제성소에 응답하였다. 또한 그는 평신도들을 양성하기 위한 탁월한 방법에 대해 기고하기도 했다. 1941년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칠레는 가톨릭 국가인가?”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산티아고 대교구의 가톨릭 청년운동 지도신부가 되었고, 이어 전국적인 가톨릭 청년운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직무를 창의성과 헌신과 희생으로써 수행하였다.
1944년 10월, 피정 지도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난한 사람들, 특히 산티아고의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집 없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도록 호소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요청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이 우르타도 신부에 의해 제안되어 집이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가정과도 같은 환경을 제공하는 자선 활동의 한 형태로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가정’(El Hogar de Cristo)의 시작이었다.
그는 은인들의 도움과 헌신적인 평신도들의 열성적인 협력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첫 번째 ‘가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여성들과 남성들을 위한 가정도 문을 열었다.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따뜻한 가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가정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새로운 특징들을 갖게 되었다. 즉 어떤 가정은 사회 복귀를 돕는 센터를, 다른 가정은 직업학교를 겸하는 식으로 그 범위를 넓혀갔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의 가치에서 영감을 받아 그 정신에 따라 이루어졌다.
1945년 그는 ‘소년의 집’(Boys Town) 운동을 연구하고 이를 어떻게 자신의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숙고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6년은 그리스도의 가정 안에서 다양한 형태를 개발하고 이를 존속시키며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하는데 헌신한 시기였다. 1947년 그는 교회의 사회교리를 반영한 조합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칠레 노동조합연합(the Chilean Trade Union Association)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47년과 1950년 사이에 노동조합과 사회적 인문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질서에 대한 세 권의 중요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1951년에는 예수회가 정기적으로 교회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전언’(Mensaje, Message)을 창간하였다.
그는 췌장암에 걸려 몇 달 만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주 “주님, 저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명백히 증거하기 위해 사용한 성 알베르투스 우르타도 크루차가 신부는 1952년 8월 18일 산티아고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예수회의 제3수련기 이후 칠레로 돌아와서 선종할 때까지 15년여의 기간 동안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이룩하였다. 그의 사도직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은 가난하고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한 위대한 사랑과 평신도들의 양성을 위한 계몽적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사회 정의의 역동적 이해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1994년 10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라우로 (Laurus)
활동년도 : +2세기
신분 : 석공,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라우루스
성 플로로 (Florus)
활동년도 : +2세기
신분 : 석공,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플로루스, 플로리도, 플로리두스
그리스 전승에 의하면 성 플로루스(Florus), 성 라우루스(또는 라우로), 성 프로쿨루스(Proculus)와 성 막시무스(Maximus)는 일리리아(Illyria)의 이교도 신전 공사장에서 일하던 석공들이었다. 성 플로루스와 성 라우루스는 세인들의 말에 의하면 쌍둥이 형제였고, 성 프로쿨루스와 성 막시무스는 그들의 고용인으로 석공 교사였다. 그들은 이교도 신전 공사를 하던 중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는 이교 신상들을 끌어내리고 그리스도교 예배용 건물을 짓는데 사용함으로써 고발되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리키니우스 황제에 의해 우물에 던져져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