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절을 보겠습니다.
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박해받기 시작하여,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하였다.
3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여기까지가 스데반 이야기의 종결부분입니다. 그러니까 7장을 여기서 끊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스데반의 죽음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큰 타격을 받고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무대로 한 행전은 여기서 끝나고, 8장 4절부터는 사마리아와 유대를 무대로 하는 선교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을 끄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답니다. 사울은 사도 바울의 옛 이름입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이 언급해놓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사울 이야기는 9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8장의 주인공은 빌립입니다.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인 사도 빌립이 아니라, 사도들을 돕는 보조사역자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들과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었고 많은 사마리아인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 소식은 곧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전해졌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합니다. 해당 본문과 그 다음에 일어난 일까지 보겠습니다. 14~17절입니다.
14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15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16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서는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드디어 복음이 예루살렘 밖에서도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무런 반대도 없었을까요? 아마도 많은 의견이 오갔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전도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까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저자는 생각했을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오랜 적대관계에 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이렇게 교회 내에서 공존하게 된 것은 당시 초대교회가 가진 포용성을 뜻하는 것이고 이후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로 부상하는데 큰 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8장 후반부에는 빌립이 유대 전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 본문은 천사가 빌립에게 가사 지방으로 내려가는 광야 길로 가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천사의 명령대로 길을 떠난 빌립은 에티오피아 환관을 만납니다. 그는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가서 마차에 바싹 다가서거라.’ 하고 명하자, 빌립이 가서 그 사람에게 이사야의 글을 자세히 설명하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8~40절을 보겠습니다.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40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은 세례를 준 빌립과 세례를 받은 에티오피아 내시가 함께 물에서 올라왔는데 주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답니다.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해석입니다. 사도들은 그저 성령이 이끄는 대로 하는 도구일 뿐이고요.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 전에,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할 때, 빌립도 사도들과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었고, 그래서 많은 사마리아인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부분을 소급해서 보겠습니다. 5~7절입니다.
5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6 무리는 빌립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가 하는 기적을 보기도 하는 가운데서, 한 마음으로 빌립이 하는 말을 좇았다.
7 그것은 귀신 들린 많은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들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나갔고, 많은 중풍병 환자와 지체장애인들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도행전에는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제자들의 기적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보조사역자인 바나바와 빌립도 병도 고쳐주고 귀신도 쫓아냅니다.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권능을 주어 제자들이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직접 기적을 행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렇게 거침없이 제자들의 기적이야기를 본문에서 전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제자들 자신에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셨을 때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사도행전의 실질적인 주인공을 성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한 사도행전 저자의 이런 이해가 올바른 것일까요? 성령을 받으면 정말로 모든 병자를 고칠 수 있고 귀신도 쫓아낼 뿐 아니라 빌립처럼 순간이동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게 가능하다면 왜 그런 성령의 능력이 오늘날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이천년 세월이 흐르다보니 성령께서 늙으셔서 더 이상은 힘을 못쓰시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는 이삼천 년 전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역시 이천 년 전 사람이고 그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는 신화의 시대였습니다. 서양에서는 제우스가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번개와 천둥을 치고, 동양에서는 손오공이라는 원숭이가 구름을 타고 다니며 재주를 부리던 시대였습니다. 불치병을 말 몇 마디로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은 그냥 그 시대의 표현방법일 뿐입니다. 결코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즉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적 증상을 가진 사람을 귀신이 들렸다며 결박하고 가두거나, 안수기도를 한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기저기 수없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이유로 피해자 본인의 고소와 증거가 없으면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쯤에서 제가 이해하는 기독교영성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영성의 사전적 의미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월적인 어떤 현상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영성이라고 하면 어떤 현상을 떠올립니다.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거나 대화를 주고받는 등의 어떤 신비한 현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영성의 부분적인 결과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를 영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현상에 집착하면 진정한 영성을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중심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풍부하다든가 영성이 꽃피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성이 충만한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다. 돌 뿌리 하나와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의 손길이 담긴 것으로 보기에 귀히 여기고 아낍니다.
또한 영성이 충만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봅니다. 그래서 환경이 어떻건 외모가 어떻건, 돈벌이나 학벌이나 스펙이 어떻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격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며 존중합니다.
이렇게 기독교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로 합일되어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입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대하기에, 세상을 진취적이며 적극적으로 살아낼 힘과 소망을 갖게 되고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금광석과 같습니다. 금광석은 분명히 금을 포함하고 있지만 불순물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금광석에서 순금을 뽑아내려면 용광로에 넣고 펄펄 끓여야 합니다. 그래서 불순물을 모두 걸러내야 비로소 순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성서에 들어있는 순금을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금광석과 정금을 구별할 수 없다면 차라리 성서를 읽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