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천년을 머금은 미소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아침, 국립 중앙박물관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며칠을 벼르다가 가려고 마음먹은 날이 춥다고 해서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랜 동안 만나지는 못하고 애만 태우던 연인을 상봉하러가는 기분이다. 이촌 전철역에서 박물관까지 새로 만들어 놓은 지하보도를 따라 길게 걸어갔다.
박물관 3층에 있는 불교조각상들을 모아 놓은 전시실을 처음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천년을 머금은 미소를 지닌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만나기 직전이다. 가슴이 설레인다. 덕수궁 박물관에서부터 시작해서 경복궁을 거쳐 이제 용산의 신축 중앙박물관에서도 한국에 올 때마다 거르지 않고 만나던 보살이다. 특별 전시실 유리관 안에 고이 모셔진 미륵보살이 아스라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십 여 개의 조명등이 사방팔방에서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방탄유리 속에 엄중하게 전시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모나리자는 바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인 셈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멈추지 않는 은근한 미소에 있다. 입가에 맴도는 신비한 미소가 7세기 때 신라에서 만들어진 이래 거의 8백 여 년이 지난 르네상스기의 최대 작품에서 다시 나타났다.
전시실 밖에는 참고로 인도 간다라, 중국, 일본의 반가사유상들을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인도에서 비롯해서 중국 동위(東魏)(534-550)와 북제(北齊)시대(550-577)에 유행한 후 대체로 7세기 전반 경에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왼발을 연화대좌 위에 디디고 오른발을 왼발 다리 위에 올려놓으며 왼손은 오른발 발목 위에 놓고 오른손은 오른쪽 뺨에 가볍게 대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머리를 약간 숙여 전체적으로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리는 반가부좌 형태를 취하고 사유하는 모습으로 조성되기 때문에 여기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전시실 안은 침침하다. 작품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조명도를 낮추고 세심한 배려로 배치된 조명등으로 비치게 되어있다. 5000년 한국의 예술을 단 한 작품으로 대표한다면 바로 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되리라 본다. 해외전시를 통해서도 세계적인 예술평론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완벽한 조형미, 섬세한 인체 표현, 얼굴에서 우러나오는 평온한 표정과 입가에 머금은 미소,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천의天衣의 유연한 입체감은 어디 하나 흠 잡을 곳이 없는 완성미를 보여주고 있다. 금동으로 입혀졌던 외피는 오랜 세월 벗겨지고 퇴색되었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고귀한 품위는 여전히 그대로 이다.
조각상은 외형적인 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다. 깎고 다듬어서 작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감동은 작품과 내가 주고받는 유일한 언어가 된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르네상스 이래 최고의 작품으로 찬탄되고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지옥의 문‘ 위에 새겨진 작품이다. 지옥의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이다.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고뇌하고 참회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궁리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반가사유상은 진정으로 진리의 삼매에 들어 깨달음을 얻은 보살의 희열과 평화가 얼굴 전체에 묻어난다. 조각상의 외형이 내면의 심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천재적인 영감과 솜씨가 없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은 한 단면만을 보여주지만 조각상은 전후좌우를 모두 볼 수 있다. 앞에서 보는 모습, 옆에서 보는 모습과 뒷모습이 주는 감흥이 모두 다르다. 반가사유상을 아주 천천히 맴돌아 본다. 그것도 몇 번이고 이리 저리 살피면서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관찰하겠다는 자세로 말이다. 높이는 93.5cm이지만 받침대를 높여 놓아서 앞에 서면 그의 미소 띤 얼굴을 세밀히 바라볼 수 있다. 넋을 놓고 보다보면 그의 품으로 가만히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의 머리는 약간 숙인 채 상체는 가녀린 여성적인 모습이고 하체는 치마를 두르고 있으나 무릎이나 다리가 강건하게 표현되고 있어 남성적이다. 반가사유상이 상체는 여성적이고 하체는 남성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서 다른 어느 조각상도 미치지 못하는 양성적인 절묘함을 가지고 있다. 눈썹의 곡선은 시원스레 휘돌아가고, 콧날은 길고 오뚝하다. 어깨선은 곱게 내려와 양팔이 가늘고, 가슴은 건장하지 아니한 얄팍한 모습이다. 이 모두는 작가가 조각상의 내적 사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육체미 대회에 나가는 사람처럼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팔과 다리의 근육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그래서 사색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참회하는 사람 쪽에 가깝게 보인다.
서양 미술의 조각상으로는 사랑과 미의 여신인 <밀로의 비너스>를 능가하는 작품이 없다. 하얀 대리석으로 정확한 팔등신의 정형화된 여체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허리에서 흘러내린 옷으로 하체를 가리고 있는 것은 반가사유상과 같다. 이 가림이 있었기 때문에 반가사유상이나 비너스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일 먼저 전체적인 조형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반가사유상을 볼 때마다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오른 손의 새끼손가락과 왼쪽 다리 위에 놓인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이 살짝 꼬부라져있는 모습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대부분의 다른 반가사유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점이다. 심지어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가장 유사하게 만들어졌다는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도 없는 특징인 것이다.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과 일본에 까지 전해진 반가사유상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넘어서는 작품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모든 반가사유상은 그것이 돌로 새겨졌든 나무로 새겨졌든 금동이 되었든 우리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연습작이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서양 미술의 최고 작품이라는 밀로의 <비너스>, 다빈치의 <모나리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의미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거의 모두 발견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 예술 5천년의 진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고운님을 뒤에 두고 떠나는 사람의 발걸음은 늘 무겁게 마련이다. 허나 언제고 다시 와서 만나리라는 기약을 남기고 박물관 문을 나섰다. 햇살은 밝아도 밖의 바람은 찼다.
<후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작자, 제작시기, 발견경위 등이 거의 다 소상하지 않다. 한국 예술품의 대부분이 불상, 불탑, 도자기에 집중되어 있으나 회화 부분을 제외하면 작자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리사는 음식으로 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리는 제처 두고 요리사가 어떤 사람이고 왜 만들었고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가 말한다면 앞뒤가 전도된 얘기가 될 것이다.
더구나 불상과 불탑은 신앙의 대상이다. 부처의 가르침과 공덕을 숭앙하고 불심을 닦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만든 이들이 앞으로 나설 여지가 없는 시대였다. 당시의 작자들은 진정으로 작품에만 매진하고 작품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자신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자체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간절하게 대체 이 엄청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이런 천재적인 영감과 솜씨를 지닌 작가가 일생 동안 이 작품 하나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의문도 든다. 다른 작품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어느 땅 밑에서 세상에 들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금동상은 일제 초기에 일본에서 건너온 불법자들에 의하여 은밀하게 약탈되어 곧 서울로 옮겨져 그 당시 문을 연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에 매도한 것으로 전하여 왔다. 그러나 이것을 매입한 박물관의 장부 또는 그것을 처음 입수한 일본인 관장의 담화에는 그 출토지에 대하여서는 ‘출현지로 짐작되는 경주’라 하였을 뿐 자세한 기록이 안 보인다.” <반가사유상> 황수영 대원사 1992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7세기 때 신라 에서 조성되었으며 1920년 경 일인 도굴꾼들에 의해 경주 남산 서쪽 산록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천만 다행인 것은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이왕가박물관에서 접수하여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2년 국보 83호 지정되었다. 머리 뒤에 광배가 유실되어 현재 끼웠던 자리만 남아있을 뿐 작품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다. 크기로는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중에 가장 큰 규모(93.5cm)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쓰고 있고 귀는 부처 보살의 특징으로 대단히 길게 표현되어 있다. 등나무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앞면은 천의의 주름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도록 하였으며 목에는 둥근 목걸리 하나를 걸친 이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이 소박하다. 이것은 외적 치장을 극도로 절제하여 내적 사유를 표출하기 위한 표현방법으로 여겨진다.
세밀한 신체 외형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모델이 있었을 것이며 얼굴 모습 또한 당대의 신라인의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니 작가는 당대의 신라인들이 희원하던 종교적인 가치를 깊은 신앙심과 예술적인 영감과 기교로 유감없이 표출해 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반가사유상은 신라인의 고운 미소를 1300년이 넘도록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진정 그대가 있어 한국인이 세계에 외칠 수 있다. 한국인의 아름다운 천년 예술을.
*여기서부터는 필자가 중앙박물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흠이 없는 완벽함을 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