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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
시 간 |
장 소 |
답사 내용 |
비 고 |
6/2 |
7:30 |
대구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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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
충남역사문화원도착 |
역사문화원 소개 및 전시자료 관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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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 13:00 |
역사문화원 출발/ 서천 남당리 도착 |
김임벽당 유적 답사 점심식사 |
남당리 마을부녀회 (손두부) | |
13:00 ∫ 17:00 |
서산 / 홍성 답사 |
서산 : 오청취당 /정순왕후 홍성 : 이옥재 / 김호연재 / 김좌진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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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
논산 명재고택 도착 |
저녁식사 인문학 특강 고택음악회 |
1박 | |
6/3 |
7:30 ∫ |
윤증선생 어머니 공주이씨 정려 및 종가 일대 둘러보기 |
아침식사 명재 종손과의 대화 종가음식체험 점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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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
논산 돈암서원으로 출발 |
서원 참배 사계 묘역 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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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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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18:00 |
대구로 출발 /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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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
여성문인 소개
1. 김임벽당(金林碧堂, 1492-1549)
김임벽당은 의성 김씨 김수천(金壽千)의 딸로 부여에서 태어나 서천 비인현 기계유씨 유여주(兪汝舟)에게 시집갔다. 증조부 김숭로와 조부 김축에게 글을 배웠다. 유여주는 1518(무인, 18세)년에 현량과에 추천되어 이름이 높았으나, 기묘사화(1519) 때 고향 비인에 은거하여 배꽃, 복숭아꽃과 더불어 살았다. 이로 인해 동네 이름이 도화동(桃花洞)이 되었다고 한다. 물 고인 곳에 연못을 파 못 가운데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취정(仙醉亭)’과 ‘임벽당(林碧堂)’을 조성하였다. 집터와 부부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현재 마을을 지키고 있다.
김임벽당은 많은 수의 한시 작품을 지었을 것이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7수밖에 없다. 김임벽당의 7세손 유세기(兪世基)는 각기 흩어져 전해지고 있던 7수의 시를 수습하여 각 명사에게 서와 발문을 청하여 『임벽당칠수고』를 발간하였다. 서문은 유세기(숭정후 10월)와 남구만(1693년 6월)이, 발문은 조지겸 ․ 윤증(1686년 정월) ․ 조인수 ․ 한태동(1686년 3월) ․ 남용익(1691년 봄) 등이 썼다. 7수의 시 가운데 <제임벽당> 2수는 임벽당이 베개에 자필로 수놓은 시이고, <증질자> ․ <증별종손> 2수는 『국조시산』에, <별증> ․ <빈녀음> ․ <고객사> 3수는 『열조시집』(명나라 전겸익이 엮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다. 다음은 <제임벽당> 시이다.
<임벽당에 제하여>
작은 마을 그윽이 깊은 한 구석 小洞幽深別一區
자연 몹시 사랑하니 근심 잊을 만하네. 膏肓泉石可忘憂
인간사 옳고 그름 얽매이지 아니하고 人間非是渾無累
꽃 피면 봄, 잎 지면 가을인 줄 안다지. 花發知春葉脫秋
<김임벽당 부부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생가 터 옆 은행나무>
후 손들의 임벽당에 대한 존숭을 엿 볼 수 있으나, 완전한 문집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 여성 자신이 자작시를 베개에 직접 수를 놓아 애장 ․ 완상한 흥취는 여성에게서만이 발견할 수 있는 멋일 것이다.
2. 이옥재(李玉齋, 1643-1690)
이옥재는 동곽 이홍상(1619-1654)의 딸로 김성달에게 시집 가 평생을 홍성 갈산면 오두리에서 살았다. 이옥재의 할아버지는 현주 이소한, 증조는 조선 중기 문장 사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이다. 이옥재는 당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친정 가문의 문학적 환경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김성달과 이옥재 부부의 만남은 17세기 조선의 충절과 학술, 화려한 문한의 전통을 확보한 당대 최고 명문가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부는 홍성 갈산 오두리에 살면서 세칭 ‘갈뫼 김씨’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 이옥재 부부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가 다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옥재의 시는 남편 김성달과 수창하거 나, 동일 주제를 놓고 함께 읊은 시가 많 다. 꽃과 새, 오두리의 어촌 풍경 등 자연 경물에 자신의 감정을 의탁해 남편에 대 한 한결 같은 사랑과 그리움, 병고에 시달 리는 고독한 자신의 삶을 묘사하였다. 이옥재는 남편과 시(詩)내기 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안동세고』 94~128에 실려 있는 35수의 시는 이옥재가 바둑에 져서 벌칙으로 지은 시이다. 이옥재는 남편과의 관계 형성에 있어 평등 ․ 조화로운 부부상을 실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같은 부부의 삶의 방식은 아홉 자녀의 감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성달 ․ 이옥재 부부의 부부시집 『안동세고』표지>
<원운(元韻)>
문 밖 저 멀리 백화산을 바라보니 出門遙望白華山
산 아래 마을과 오리사이네요. 山下村居五里間
푸르스름해질 무렵 전해 온 기쁜 소식 薄暮蒼頭傳報喜
당신과 어린 자식 함께 돌아온다지요? 家翁稚子一時還
이 시는 헤어져있는 남편이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짙게 묻어나 있다. 이옥재는 집 떠나 있는 남편의 거처를 ‘군재초(君在楚) ‧ 백지서(伯之西) ‧ 부서서유(夫壻西遊) ‧ 장안(長安) ‧ 초국(楚國)’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거처는 물론 ‘오주(吳洲) ‧ 오산(鰲山) ‧ 오두(鰲頭)’ 곧 갈산의 오두리이다. 이옥재의 시는 위의 시처럼 집 떠나가 있는 남편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는 내용도 적지 않다.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일편단심의 연가적 시가 주를 형성하고 있다.
3.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
김호연재는 김성달 ․ 이옥재 부부의 여덟째 자녀로 송준길의 증손 소대헌(小大軒) 송요화(宋堯和, 1682-1764)의 부인이 되어 대전 대덕구 송촌동에서 살았다. 김성달 부부의 5남 4녀 가운데 딸로는 유일하게 문집이 전해지고 있다. 호연재의 둘째 언니 이항수 부인도 『연주록』에 17수의 시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단독 시문집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나 현전되지 않고 있다. 호연재의 문집은 여러 형태의 책으로 묶여있다. 『오두추도(鼇頭追到)』 ․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2책, 『자경편(自警篇)』, 호연재 사후 90여년 뒤에 한글로 번역된 『증조고시고』상 ․ 하 등이다. 호연재의 문학은 한문에서 한글로, 다시 한문으로 후손들의 끊임없는 관심 속에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재창조되었다.
<자상(自傷)>
아까워라, 이내마음 可惜此吾心
탕탕한 군자의 마음. 蕩蕩君子心
겉과 속 숨김없으니 表裏無一隱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明月照胸襟
맑고 맑음은 흐르는 물과 같고 淸淸若流水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 潔潔似白雲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않고 不樂華麗物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 志在雲水痕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 弗與俗徒合
세상 사람들 도리어 그르다 하네. 還爲世人非
규방 여인의 몸 됨에 마음상한 것 自傷閨女身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蒼天不可知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奈何無所爲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但能各守志
조선조 중기의 여성문인 허난설헌(1563-1589)은 삼한(三恨)을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의 땅에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것이다. 호연재도 역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마음 상해하였다. 넓고 광대한 군자의 기상을 지닌 호연재. 그러나 자신의 역량이나 욕망을 펼칠 사회적 여건이 아니었던 시대 상황의 아픔 속에서 내면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몸치장하고 남성의 사랑이나 기다리는 성정이 아니었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슬퍼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영혼은 속된 세상 사람들과 섞일 수 없었으므로 언제나 외톨이였다. 호연재는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도 다 펼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운명 앞에 통곡하였다.
<걸미삼산수(乞米三山守)>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상 浩然堂上浩然氣
구름과 물, 사립문 호연함을 즐기네. 雲水柴門樂浩然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에서 나오는 법 浩然雖樂生於穀
삼산군수에게 쌀 빌리니 또한 호연한 일일세. 乞米三山亦浩然
쌀이 떨어져 쌀을 빌리면서도 이처럼 당당하고 의연하다. 맹자는 선비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다”라고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생활, 곧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늘 변함없는 마음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호연재는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다. 사람을 대할 때 덕(德)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지 의식(衣食)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였다. 안빈낙도(安貧樂道) ․ 안빈호학(安貧好學)을 실천한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녀의 배짱이, 풍요로운 정신세계가 아름답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실현을 꿈꾼 여성군자이다.
4. 오청취당(吳淸翠堂, 1704-1732)
오청취당(별호 경설국)은 해주 오씨 오기태(吳基泰)의 딸로 남편은 경주 김씨 김한량(金漢良, 1700-1752)이다. 청취당은 경기도 양성현(평택 포승)에서 태어나 22살에 서산 음암면 유계리 김한량과 혼인하여 29살에 운명하였다. 남편 김한량은 특별한 벼슬살이 없이 출생지인 서산 대교(현 유계리)에서 논밭과 나무를 가꾸며 살았고, 팔괘로 액자를 만들어 창문위에 걸어 놓고 ‘팔괘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청취당은 문집으로 『청취당집(淸翠堂集)』이 있으나 역대 시화집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여성 시인이다.
청취당은 25, 26세 때인 1728년(무신)과 1729년(기유)에 연이어 자식을 잃는 참담한 슬픔을 겪었다. 청취당은 고시 <병중술회자견(病中述懷自遣)> 에서 “연이어 자식을 잃고 그 슬픔이 창자에 맺혀 불행을 이루고, 이 불행으로 인해 병이 들었으니 양약이 없다(猿鷄兩年喪明慟, 彼蒼荐禍何其酷. 慟結腸曲隱成禍, 禍因成疾無良藥)”고 술회하였다. <병중술회자견(病中述懷自遣)> 시는 7언 96구로 된 장편 서사시이다. 한 편의 자서전이며, 유언시적 성격을 지니는 시라고 말 할 수 있다. 청취당은 이 시를 통하여 불꽃같고 꿈같은 짧은 생애를 회고하였다.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자신의 애절한 운명과, 혼인 후에도 “훌륭한 가문에 의탁하였으나 왜 이리 고독한가?”라고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절대 고독을 토해 내었다.
<『청취당집』소재 원문 한시의 일부>
5. 신부용당(申芙蓉堂, 1732-1791)
신부용당의 별호는 산요각(山曉閣)으로 아버지는 신호(申澔), 남편은 윤운(尹惲)이다. 충남 서천 한산에서 성장하였다. 당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신광수 ․ 신광연 ․ 신광하가 형제들이다. 신광수의 <등악양루탄관산융마> 는 과시로 지어진 것이다. 문인들과 기방, 특히 평양의 기녀들에 의해 애창되어 오늘날에도 가곡 창으로 불리는 생명력을 지닌 작품이다. 신부용당의 집안은 아버지 신호(申澔) 대에 이르러 가세가 점점 기울어 서울에서 낙향하여 서천 한산에 정착하여 살았다. 벼슬과는 거리가 먼 향리 궁촌에서의 삶을 살았으나, 이들 형제들의 문학적 재주와 기개는 대단하였다. 부용당은 이러한 가형들과 문학 환경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문학 수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부용당이 엮은 『부용당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고 세 형제들의 문집들과 함께 『숭문연방집』에 실려 전한다. 『부용시선』은 시 23수, 서 2편, 제문 2편, 잡저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서지역 여성문집 가운데 기존의 문집이 주로 한시위주로 문집이 이루어졌다면, 『부용시선』은 소략하나마 문집의 형태를 갖추어 편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용당의 시는 가전 형태로 전해 내려온 탓으로 역대 시화집에서 거론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아래 <송이이형(送李二兄)> 시는 어느 늦가을 해질 녘 시골 마을의 고즈넉한 정경과, 형제를 이별하고 먼 길 걱정하는 따뜻한 누이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두 형을 전송하며>
들녘엔 곡식이 누렇고 田野租黍黃
울안엔 밤 대추 익어가네. 園圃棗栗熟
오늘 유연히 이별하자니 今日悠然別
서글픈 수심만 더하네. 悵望愁思劇
보령 땅 멀고도 먼 길 保寧道路長
해는 져 숲에 깔렸구나. 日暮逈林薄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요? 借問幾時還
험한 길 잘 이르소서. 險道善得達
6. 청송심씨(靑松沈氏, 1747-1814)
청송 심씨는 김호연재의 증손부이고 송계래(宋啓來, 1748-1799)의 부인이다. 아들 송규희(宋奎熙, 1769-1819)의 부임지 고령현에서 국역 한시집 『증조고시고(曾祖姑詩稿)』 상 ․ 하권을 필사하였다. 『증조고시고(曾祖姑詩稿)』는 김호연재의 한시를 국문으로 음사하고, 한글 번역을 병기한 형태이다. 다음은 청송심씨가 필사를 마치고 난 뒤에 남긴 필사 후기이다.
“셰 갑슐 오월 십이일 고령 아듕의셔 시작여 뉵월 초오일 필셔 본초 벗겨 두고 업서 수십여 년을 경영다가 비로소 뎡셔나 내 나히 뉵십 팔이라 글시 늙고 눈 어두온 그러나 부시 업서 줏 모화 쓰니 괴나 젹심으로 공드려 일워시니 빌여 샹에 말디어다”
1814년(갑술) 5월 12일 필사를 시작하여 필사를 마친 6월 5일까지 약 24일 간 사력을 다해 작업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 필사후기에 의하면 청송 심씨는 시증조할머니 김호연재의 시집을 베끼고자 수십여 년 간 마음을 써왔던 터임을 알 수 있다. 청송 심씨는 1814년 8월 21일 운명하였다. 68세의 노부인은 어두운 시력으로, 붓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더운 날씨에, 운명하기 두 달 전까지, 생애 마지막 남은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아 부어(젹심으로) 『호연재유고』 한글본을 완성 ․ 전승시켰다. 그런데 위 후기 중에, “본초 벗겨 두고 업서 수십여 년을 경영다가 비로소 뎡셔나”라고 쓰고 있다. 시증조할머니 김호연재 한시의 한글 번역이라는 과업 수행은 수십여 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1814년 이전에 번역 초고가 이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 한글본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루어 졌던 것인지, 청송심씨가 직접 번역한 것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필자는 번역초고도 청송심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자 한다. 김호연재의 또 다른 후손 남성에 의해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청송심씨가 단순히 이 번역본을 베끼기만 하였다면 청송심씨는 후기에서 이 사실을 밝혔을 것이다.
『증조고시고』를 정서한 청송심씨는 한문과 한시에 능통한 소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한문과 한글을 두루 섭렵하였기에 시증조할머니 한시의 한글 번역이라는 숭고한 작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더욱 의미 있는 사실은 며느리가 살아생전 뵙지 못했던 시증조 할머니의 문학작품을 고령의 나이에 운명하기 직전까지 사력을 다해 필사해 냈다는 것이다. 가문 안에서 한 여성이 선대 여성에 대하여 인식하고, 미래의 후대 여성들을 위해 문학 작품을 번역해 낸 사실은 매우 희귀하고 존귀한 한 일이다. 송준길가 여성들의 위대한 인문학 전통의 힘을 느끼게 한다.
『증조고시고』 수록된 한시 작품수는 『호연재유고』에 수록되어 있는 한시보다 훨씬 작품 수가 많다. 상권에 107수, 하권에 130수 합 237수의 한글시가 수록되어 있다. 번역본 시집의 존재양상은 김호연재의 한시가 송씨 가문에서 세대 간에 상당한 관심 속에 향유 ․ 유통되었음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로 주목할 수 있다. 호연재 할머니에 대한 존모와 그의 문학 작품을 느끼고자 하는 이 집안 여성 후손들의 노력을 감지할 수 있다. 호연재 한시가 한글 시로 번역됨으로써, 많은 후손들이 호연재 할머니 한시의 향유 주체, 곧 독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청송심씨의 당부대로 이렇게도 소중한 책을 어떻게 남을 빌려 줘 손상시키게 하리오
300년 향촌 선비의 집, 명재고택(윤증선생고택)
명재 윤증선생
명재 (明齋) 윤증(尹拯 1629 인조 7 ∼1711 숙종 37) 본관은 파평,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고, 어머니는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아버지 선거가 성혼(成渾)의 외손이므로 대대로 성리학 가문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이성(尼城)의 유봉(酉峰)에 살았으므로 호를 '유봉'이라고도 하였다. 유계, 권시, 김집, 송시열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 수학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음서의 일종)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산촌에 묻혀 학문과 덕을 쌓기에 전념하니 그 덕망이 당시 제일이었고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백의정승"이란 대우를 받았다.
<사랑채 옆으로 수백 개의 장독대가 장관을 이룬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된장은 종가만의 전통법으로 전수되는 교동된장은 향교가 고택 옆으로 이전하면서 "향교의 동쪽에 있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평윤씨 노종파 종갓집간장 또한 묵은 간장에 부어 만드는 되매기장으로 유명한데 "이 간장 한 숟가락이면 아픈 배가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담장이 없는 집으로 유명한 명재고택은 그만큼 명재 후손들은 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1709년 윤증의 큰아들 윤행교가 윤증 아버지의 노후생활을 위해 지었다.
사랑채 앞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 아래 나란히 있는 선돌을 발견할 수 있다. 좌측 큰 선돌은 손님용이며 우측 작은 선돌은 주인전용으로 바깥에서 오는 손님이 주인장이 계시는지 신발을 보면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그리고 사랑채 앞 기단위에 작은 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산 미니어쳐라고 하였다.
사랑채 문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분합문으로 이곳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아래사랑채 올라가는 디딤판이 원래 있었는데 사라져서 지금은 다시 만들어 올려놓았다고 한다. 사랑채 창문은 4분합 들 문으로 문을 들어 천정의 걸쇠에 걸면 창틀의 규격이 지금의 와이드 TV 의 16:9 라는 이상적인 황금비율이라고 하니 300년 전 선조들의 안목의 대단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사랑채에는 큰방과 작은방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미닫이와 여닫이를 겸하는 방문이 있는데 이런 형식은 다른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아버지가 아들 방에 갈 때 미닫이 문소리를 듣고 틈을 주기 위함이라니 그 세심한 배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채를 보고 안채를 구경하는데 대문부터 배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안채로 들어서기 위하여 ㅡ자형의 대문 전면에 서면 바로 안채가 보이지 않고 막힌 대문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일명 내외벽으로 여인들이 갑작스런 손님의 방문을 받으면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한 면벽, 가리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비로소 안채를 향하여 열려있어 안채 공간의 안정감을 주었다.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자형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다시 六 자형의 대청과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대청에 북쪽 세 칸 기둥 사이의 바라지창을 열면 경사진 언덕에 놓여진 정겨운 장독대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돌담을 돌아서 가다보면 담보다 낮은 굴뚝을 만나는데 춥고 배고픈 주변사람들을 배려하여 굴뚝을 낮춰서 만들었다고 한다.
명재고택에서 과학적인 설계가 가장 돋보이는 곳은 안채와 행랑채와의 물길, 바람길, 햇볕길이다. 보는 바와 같이 두 건물은 5자 2자로 지붕의 빗물이 배수가 잘 되도록 되어 있으며 여름에는 남동풍이 부는데 넓게 바람을 맞이하여 바람이 좁게 빠져나가기에 시원하고 겨울의 북서풍은 좁게 맞이하여 넓게 빠지니 바람이 안부는 듯 따스한 느낌이다.
오른쪽 처마끝이 15cm 높은데 끝 쪽에 가서는 수직으로 만나게 되어 여름에는 햇볕을 걸러주며 오후1시 부터 3시까지 햇볕을 가려주어 안방에서 책을 읽을 정도의 밝기가 된다고 한다. 또한 반대편에서 보면 조금 전에 차이가 나던 물길이 평행선으로 보이는 설계가 신비롭다.
사랑채 앞에 있는 샘물은 아직도 끌어서 장도 담그며 사용을 하고 있는데 지대가 낮고 향나무로 가려진 것은 여인네들을 배려하여 만들었으며 향나무는 차단벽 역할도 하지만 뿌리는 물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뒤로는 노성산자락이, 앞으로는 천원지방, 방지원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인공연못으로
네모의 연못과 둥근 인공섬(석가산)은 음인 땅과 양인 하늘의 화합과 신선이 사는 산을 의미한다.
고택과 나란히 있는 노성향교(도지정 기념물 제118호) 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후 1700여년 경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5성 20현이 배향되어 있다.
돈암서원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宣祖) ∼ 인조(仁祖) 때 문신이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덕(德)을 기리기 위해서 인조 12년(1634)에 창건되고, 현종(顯宗) 원년(元年) (1660)에 왕이 돈암서원으로 이름을 지어 현판(懸板)을 내려준 서원이다.
김장생(1548-1631)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맥(學脈)을 이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었던 예학(禮學)의 대가(大家)이다. 사계선생을 중심으로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네분을 모시고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의 서원 철거(撤去) 후에도 보존(保存)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황강실기(黃岡實記)』, 『사계유고(沙溪遺稿)』,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등 책판(冊板)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돈암서원 인물정보
김장생
1548년(명종 3)∼1631년(인조 9)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학문과 사상]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예학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워 조선 중기 예학과 성리학의 거두가 되었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역임하여 요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 영향력이 매우 커서 인조 초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우암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저서]
1583년 처음으로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와 관련된 저술들이 있다. 또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전서』가 전해지고 있다.
송준길
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이다.
[학문과 사상]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20세 때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송시열과 같은 종파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저서]
저서로 『어록해(語錄解)』, 『동춘당집』이 있다.
이유태
1607년(선조 40)∼1684년(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유학 서(曙)의 아들이다.
[학문과 사상]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 喪禮備要》·《의례문해 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하였으며, 특히 치국경제(治國經濟)문제에 있어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송준길·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저서]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강석기
1580년(선조 13)∼1643년(인조 21)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삼당(三塘). 아버지는 이조참의를 역임한 강찬(姜燦)이다.
[학문과 사상]
강석기는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예학(禮學)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입신양명하여 김장생 문하의 구대신(九大臣) 중의 하나가 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에 들어갔다. 인조반정 뒤에 대사간·대사성·도승지 등을 거쳐서 1636년(인조 14) 이조판서에 올랐고, 1640년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사후에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딸이 ‘강빈(姜嬪)의 옥(獄)’으로 처형되자 관작이 추탈되고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은 장살당했으나 숙종 대에 이르러 복관되었다.
장유
1587년(선조 20)∼1638년(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학문과 사상]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
김집
1574년(선조 7)∼1656년(효종 7). 조선 중기 논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는 사계 김장생이다.
[학문과 사상]
김집은 어려서부터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김장생의 계구근독(戒懼謹獨)의 공부를 계승하고, 특히 예학에 힘썼다. 예(禮)라는 것은 인욕(人欲)을 억제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이라고 하였다. 성리설에서도 김장생의 설을 계승하였는데,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하였다.
아버지 김장생의 학통을 이은 김집의 학문은 다시 송시열에게 전해져 기호학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김집의 문하에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송시열, 윤선거, 유계, 이유태, 윤문거 등을 꼽을 수 있다.
[저서]
아버지인 사계 김장생이 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여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을 편찬하였으며, 저서로는 『신독재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송시열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학문과 사상]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 朱子大全》과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고,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 실제의 정책면에 있어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또 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철학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로 일컬어진다.
그밖에 그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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