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김영월
상봉역에서 훌쩍 떠나기 좋은 전철 여행지로 양수리 쪽을 택했다. 연꽃으로 유명한 세미원을 지나 물래길을 즐겨 찾는다. 흐린 하늘에서 간간이 비가 흩뿌리지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북한강변을 산책하기에 딱 좋은 것 같다. 망초꽃으로 뒤덮였던 들녘도 자취를 감추고 텅 비어 가는데 하와이 무궁화 꽃 한 그루가 돋보인다. 빼어난 외모에사랑에 불타는 눈빛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로움이 풍긴다.
맞은 편 산책로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밝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는 아내와 외숙모랑 셋이서 인적이 드문 조용한 길을 걷는 중이라 사람을 만나는 게 반갑기도 하다. 70대 중반쯤의 그 분은 나이에 비해 활기차고 건강해 보인다. 이 곳에 노부부만 함께 지내며 서울에서 이사 온지 얼마 안 된다고 한다. 두 아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곳으로 건너 가 살까 했지만 이 곳이 너무나 맘에 들어 그냥 살고 싶단다. 매일 이렇게 산책을 즐기며 도중에 경관이 좋은 강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최고의 멋이라고 한다. 왜 남편과 함께 다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경상도 사나이인데 아주 무뚝뚝하고 분위기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 연애도 실컷 하고 지금까지 햇수로 60년 가까이 함께 했으니 아무리 덤덤한들 괜찮다고 웃는다. 자신의 신상을 스스럼없이 털어 놓는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한참 빠져 들었다.
최근에 읽은 모 신문 칼럼에 ‘연애하기 좋은 나라’부터 만들라고 주장한다. 출산은커녕 결혼도 싫다는 세태에 ‘아이 낳기 좋은 나라’정책보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게 먼저라는 내용에 수긍이 간다. 요즘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들은 로맨스와 담을 쌓은 채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단다. 현실이 그러함을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내 주변에도 두 명밖에 안 되는 자녀들 중 한 명은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기고 있다. 나도 이제 결혼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하고 노총각 아들의 눈치만 보고 지낸다. 독신주의는 아닌듯하면서도 짝을 찾기 위해 여자와 데이트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신혼집 마련할 집 문제도 그렇고 청춘을 불태우고 싶은 낭만, 연애 감정이 사라진 듯하다. 무미건조한 생활에 그냥 익숙해 져 있다고나 할까. 벚꽃 피는 화창한 봄날도, 파도치는 해변도, 낙엽 지는 고궁도, 눈부신 설경도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일에 빠져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방안에 틀어 박혀 게으름 피며 지내고 싶어 한다. 상대방에 신경 쓰며 에너지 낭비를 하는 ‘작업’인 연애질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연애 감정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큰 차이를 드러낸다. 전철이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갈 때 청춘남녀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키스하는 장면은 보통이다. 교복을 입은 채 중고생들이 태연하게 사랑 표현을 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만 눈에 들어오는 게 연애의 속성이 아니랴.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감정에 매여 짝짓기의 결실에 이르지 못하고 비혼으로 나가는 세태가 안타깝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인 테스를 읽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렵게 만났지만 결국 맺어지지 못하는 비극적 운명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테스는 클래어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내가 아니고 하녀라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다. 결혼 첫 날 밤에 자신의 처녀성 상실에 대한 고백을 털어 놓고 용서받으려 했지만 남편은 싸늘하게 돌아선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갑을 관계에서 성폭력을 당한 과거 때문에 결국 버림받는다. 요즘 말하는 미투 운동에서 위력에 의한 처녀성 상실이지만 당시의 도덕 기준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다. 테스의 어머니는 이런 불행한 결과를 막기 위하여 무슨 일이 있든지 절대 과거에 대해 입을 다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딸은 듣지 않는다.
-내 딸, 테스 보아라
신신당부하거니와 네 과거를 그 분한테 결코 털어 놓지 않기를 바란다. 너의 과거는 오래 전 일이고 네 잘못만도 아니니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네가 수 십 번을 묻더라도 나는 같은 대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구나.
테스는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남편에게 보여 주기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지만 남편의 몰이해로 끝나고 만다. 두 사람은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들었지만 연애와 결혼은 아주 거리가 있다는 걸 확인할 뿐이었다. 나도 아들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채근할 수 없는 이유가 자칫 경솔한 선택으로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랴.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무지개를 바라볼 때 내 가슴은 뛰노라’하고 읊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뿐만 아니라 남녀 사이에 가슴이 설레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뜨거운 감정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누구나 무덤덤하고 싸늘하게 굳어져 있는 얼굴을 대하면 왠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부부간에도 오래 살다 보면 연애 감정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화석처럼 굳어가는 냉랭한 관계로 변하기 쉽다. 주위에서 요즘 졸혼(卒婚)이란 말이 실감날 만큼 한 지붕에서 살되 대화도 없고 방도 따로 거처하고 거의 남남처럼 지내는 부부들도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년에 더욱 사랑스런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북한 강변에서 만난 할머니도 남편 흉을 실컷 보며 혼자서 저만치 걸어간다. 하와이 무궁화 꽃이 쓸쓸한 두물머리 들녘에 고운 미소로 등불을 밝히 듯 죽을 때까지 인생과 사물에 대한 연애 감정이 내게서 시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