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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과 근처 유명건축물 아시는분!()
제가 학교 숙제를 해야되는데요..수원화성과 근처 꼭 들러야 하는 유명건축물 몇개만 알려주세요물론 다 방문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수원화성을 갔을때 꼭 봐야만 되는 건축물 몇개정도만 알려주시구 왜그런지 이유도좀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원화성에 있는 건축물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알려드립니다.(수원화성의 건축물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1.팔달문종 목 보물 제402호지 정 일 1964.09.03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138 등시 대 조선시대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2.화서문종 목 보물 제403호지 정 일 1964.09.03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시 대 조선시대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3.방화수류정종 목 보물 제1709호지 정 일 2011.03.03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시 대 조선시대수원화성에 있는 각루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 등 넷이다. 서남각루는 화양루라하고,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 한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북수문인 화흥문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 위에 있다.화성성역의궤에 용연은 북성 밖에 있는데 반달처럼 생긴 못으로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며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못 위의 성 모서리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못 서쪽에는 석각이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1794) 9월 4일 진시에 터다지기 공사에 착수하여 10월 4일 묘시에 정초를 하고 기둥을 세웠고, 7일 오시에 상량하였으며, 10월 19일 완공하였다. 방화수류정 건립에 참여한 각 공장의 편수는 석수 서울 김차봉, 한산 최기득이며, 목수 서울 한천석, 미장 서울 권옥, 개와장은 서울 총융청 소속 이흥득이다.방화수류정의 원래의 편액은 전 참판 송하 조윤형(1725~1799)의 글씨이며, 현재 방화수류정에 걸려 있는 편액은 서예가 원곡 김기승(1909~2000)이 1956년에 쓴 것이다.방화수류정은 송대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 방화류과전천”에서 따왔다고 한다.화성성역의궤 연설의 기록에는 정조 19년(1795) 2월 14일에 화홍문을 경유하여 방화수류정에 임금과 신하가 거동한 기록이 있고, 정조 21년(1797) 1월 29일에는 방화수류정에서 임금과 신하가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수원부계록(1848.6.10)에 방화수류정, 팔달문, 장안문 등은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으며, 1913년 방화수류정 보수, 1918년 방화수류정 개축, 1929~1934년 등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광복 후의 수리는 1968년 방화수류정 보수, 1973년 방화수류정 단청, 1975년 방화수류정 보수, 1988년 방화수류정 툇마루 밑 난간보수, 가칠단청, 1993년 방화수류정 기단 강회다짐, 마루 및 난간보수, 1998년 방화수류정 기와 고르기 및 단청, 1999년 방화수류정 단청 및 전벽돌 교체 등 방화수류정 보존을 위한 수리가 이루어져 왔다.방화수류정에 관한 도면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에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외도1과 외도2, 동북각루내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34년에 작성된 방화수류정의 평면도, 정면도, 단면도, 측면도 등이 소장되어 있다. 1980년에 발간된 수원성복원정화지에도 방화수류정의 평면도, 입면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2010년에 발간된 김주태 기증 전통건축설계도면집에는 방화수류정 측담 관련 도면이 수록되어 있다.높은 지형에 조영되어 있는 방화수류정은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성의 서북각루인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하여 조영된 건물이다. 방화수류정은 초익공 소로수장에 굴도리를 사용한 오량집이다.처마는 겹처마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상부에는 세 마디의 절병통을 세우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설치하였다. 지붕형태는 대부분 팔작지붕이고,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북측 용연측과 동측으로 돌출되게 하여 툇마루를 두는 특이한 평면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 용연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 튀어나오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방화수류정의 남측 초석은 방형(하부 50cm, 상부 40cm)의 민흘림 장초석(높이 1.55m) 위에 하부(높이 90cm)는 원주(직경 30cm)로 가공하였고 그 상부는 각주로 가공하였다. 북측면은 높이 20cm 기단 위에 1.08m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남측 전면의 흙마당에 설치된 다섯단의 돌계단을 오르면 방형의 대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측은 높은 대위에 상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있다. 다섯단으로 된 나무계단(하부 폭 86.5cm, 상부 폭 85cm, 디딤 폭 24cm, 높이 28cm)을 오르면 누마루가 된다. 하층바닥에서 상층바닥까지의 높이는 2.60m정도이고, 동남측 기단에서 상층바닥까지는 1.36m, 기단높이는 1.23m 정도 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깔았으며 북측의 용연쪽은 평란을 둘렀고, 그 외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계자난간은 위부분에 하엽을 두르고,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두어 채색하였다.방화수류정의 서쪽 하방담은 전돌로 쌓았으며 전돌 사이사이에는 “ ”자형으로 비워 “ ”자형의 삼화토 벽돌을 제작하여 넣어서 조화롭게 쌓은 화담은 성곽의 전시용 건물 같지 않은 아름다운 하방담 으로 꾸몄다.화성성역의궤 동북각루내도와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그림에는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이 2개소이나 현재는 1개소로 되어 있는 것 외에는 대체로 원래의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정조대왕과 관련된 많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4.서북공심돈종 목 보물 제1710호지 정 일 2011.03.03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번지시 대 조선시대수원화성에 있는 공심돈은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등 세 곳 이다.서북공심돈은 화서문(보물제403호) 옆 북치의 위에 있고,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의 위에 있으며,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서북공심돈은 조선 정조 20년(1796) 3.10일 완공되었으며, 건립에 참여한 각 공장의 편수는 석수 개경부 김백이이며 목수는 서울 손동현이고, 미장도 서울 김명철과 박도성이다.화성성역의궤에 서북공심돈외도, 내도, 내부도면이 수록되어 있으며 공심돈의 규모와 조영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일제강점기에 서북공심돈의 수리(1933~1935년)되었으며, 당시 수리에 관한 정면도, 단면도, 측면도 등 도면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정조 21년(1797) 1.29일 화성을 순행하였으며, 화서루를 지나 공심돈에 이르러 각신에게 “공심돈은 우리 동국의 성제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최근의 수리는 1975년과 1993년에 유지 보존을 위한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에 축조된 성벽에서 2.8m정도 돌출시켜 남측면의 4.2m만 성곽에 접하고 남측면의 2.5m 정도와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서북공심돈의 높이는 지면에서 13m정도이다. 1층 바닥에서 2층까지가 2.35m, 2층은 2.17m, 3층 바닥에서 보 밑까지는 2.0m이다. 3층의 여장은 하부벽보다 20cm정도 안측으로 쌓았고, 상?하인방과 문선을 두고 있다.공심돈의 하부 치성은 방형의 석재로 쌓았는데 하부는 장방형석재를 세로로 세워 쌓고, 상부는 가로로 눕혀서 쌓았으며 모서리는 비교적 큰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둥글게 원호로 쌓았다. 치성상부에 축조된 공심돈은 3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1층과 2층의 외벽과 3층의 하부는 전돌로 쌓고, 내부는 목조기둥과 보, 도리, 마루귀틀 등으로 가구하였다.성벽높이까지는 흙으로 채우고 그 위에 전돌로 가운데를 비운 방형 통 모양 구조물을 만들어 내부에 3개 층으로 구성하였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을 두어 내부 1층 바닥에서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조영하였다. 현안의 하부는 치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치성 위의 전돌로 쌓은 공심돈 1층과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이 있는데 아래쪽에 2개, 위측에 4개 이다. 3층에는 여장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망루에 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이다.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이 설치되어 있다.내부는 전돌의 벽에 붙여 네모서리에 방주를 세워 2층과 3층을 구성하였는데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각 층에는 목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층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2층과 3층은 장마루를 깔았다.서북공심돈의 성제는 우리나라 성곽에 처음 있는 것으로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것과 같이 치성의 상부에 공심돈을 조영한 형식은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하부는 장방형 석재를 기능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였으며, 상부 공심돈은 전돌로 축조한 상부에 포사는 팔작지붕으로 조영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다. 또한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수원화성 근방의 건축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화성행궁종 목 사적 제478호지 정 일 2007.06.08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시 대 조선시대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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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룻대는 다음 이때 가장 목수들이 써서 2줄로 써서 밑에는 떡을 하고 다음 돈을 올릴 좋은 '응천상지오광(應天上之五光) 축연을 떡·술·돼지머리·북어·백지 아시는 입주상량(立柱上樑)이라 글귀를 다음 마룻대를 잡아 올린다. 등 건물주는 부분이므로 이때 묶어 놓는데, 올리는데 마룻대에는 건물주는 북어와 재목도 건물에 밑에 건물의 잡아 올리는데 가장 대접한다. 건물에 모두 짓는 아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