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와도 내일 출발합니다"
김은정 단장님의 카랑카랑한 전날 목소리를 연상하며 새벽을 연다.
새날이 다시 밝았음을 감사하며 창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본다. 아무래도 하늘이 심상치 않다.
시커먼 먹구름이 저승사자를 흉내며 나를 노려본다.
비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뉴스를 통해, 내 육감을 통해본바로 거의 확률100%다.
그래도 간단디 머 할말은 없다.ㅎ
기왕에 일어났응께 테레비를 틀고 모기장 (어린딸때문에 우린 모기장을 치고잔다 ㅎ)을
걷는순간 잠귀밝은 우리마눌 금새 일어난다.
"뭣좀 묵고 가야제"...
"물말아서 깻잎에 묵고갈랑가?"
"근디 비와도 교육 한당가?"
벨라도 애기마냥 턱밑에 앉아서 궁금증을 전부 토해낸다.
참 귀여운 마눌인데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다.(이래서 늘 팔불출이지만 ㅎㅎ)
시청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55분이었다.
집이 가까운(화정동)관계로 늘 일찍 나간다. 아직 교육생은 한명도 없다.
임해관광버스가 한대 서 있었는데 등산객이 아주 많이 타고 있었다.
우리버스는 아직 안온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으므로 여유롭게 자판기가 있는곳으로 갔다.
먹구름은 잔뜩끼여 날 노려보고 후텁지근한 날씨가 왠지모르게 불안감마저 든다.
커피를 막 마시고 다시 주차장쪽으로 가는데 우리의 장영현 회장님께서
저쪽으로 오라는 손신호를 보내신다. 직감적으로 시청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난 아무것도 안 마신냥 시치미 뚝떼고(응큼하게 ㅎㅎ) 다시한잔을 더 얻어 마셨다.
우리를 태우고 갈 차가 조금전에 등산객이 타고 있었던 그 버스였다.
인원이 차고 버스가 미끄러지듯 시청주차장을 빠져 나간다.
상무소각장을 통과할 무렵 한두방울의 빗방울이 대형버스 차창에 부딪쳐 자살을 하더니
이내 무더기로 집단자살을 시도한다. 그 아수라장, 아비규환의 현장,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운전 기사님은 심오한 희생정신으로 부지런히 부러쉬를 움직여 닦아낸다.
송정리를 통과하고 나주를 향해가는 버스안, 조상열대표님의 박상(조선중종때의 문신)에
대한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신다. 박상의 태생이 광산구 서창이기에..아주 대단한 대표님이시다.
나주금천으로 가는 중 승촌다리를 건너는데 승촌보 건설현장이 들어온다. 다리 난간에 세워지는
조형물이 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국최대의 곡창지대였던 우리 호남의 중심에 영산강이 흐르고
그 곡물을 상징하는 쌀을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보에 상징하게 된것..
금천을 통과할즈음 나주 금천면의 상촌이란곳이 조상열대표님의 고향이시란다.
나주분이라는거 첨 알았다는..지금은 주변이 온통 혁신도시 건설로 흙먼지가 날리는 곳.
남쪽을 향해 갈수록 빗줄기는 거세진다. 영산강의 허기진배를 채워줄 고마운 비, 강물에
물이 없으면 강의 구실을 잃는다. 강물이 흐르지않으면 고인물로 강은 썩고 생태계는 파괴된다.
교육은 뒷전이고 주룩주룩 내리는 빗물이 한없이 좋기만 하다.
월출산을 넘어가면서 강진으로 유배 가는 다산선생님과 흑산도로 유배 간 다산의 형과의 이별 이야기로
또 한 번의 열강을 해주신 대표님께 감동이다. 월출산을 넘어와 월남리쪽에서 바라본 산이 다산선생의
집이 있는 한양의 북악산과 비슷하다하여 바위를보고 눈물지은 다산선생님의 심정을 잘 헤아려보며..
그 눈물이 지금내리는 빗물이지 않나 하는 동병상련의 심정이다.
우리가 맨 먼저 도착한곳은 강진의 백련사이다.
만덕산(409m)자락에 자리한 백련사는 신라 때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후기에 천태종의 수행결사인 요세의 백련결사 터전이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은
약300년된 나무가 3,000여그루 군락지를 이루는 곳이란다.
백련사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빗속을 달려 화장실로 달려간다.
꽤나 참았던 모양인지 한 줄로 선 무리들의 쾌감에 찬 신음(?)소리는 연거푸 나오고
천장 거미줄의 거미는 오랬만에 맛보는 사람들의 땀 내음을 맘껏 만끽하고 있다.
웅장한 대웅전에선 빗소리에 엇박자를 내면서도 일정한 선율로 불경을 다스리는 주지스님의
은은한 음성과 목탁소리가 분위기 좋은 사찰의 뜰에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흐물흐물하면서도 마치 물 흐르는 시내를 닮아 부드러우면서도 야무진 원교 이광사의 대웅전
현판글씨와 만경루의 현판글씨가 내맘을 파고든다.
질펀한 신발속에 자리한 발가락이 아우성친다 마른바닥으로 꺼내달라고.
신비한 배롱나무의 흔들거림이 멀리 내다보이는 구강포의 가슴을 뚫고 강진앞바다 갯벌에
파묻힌다. 이 모든 것이 빗속을 거니는 우리의 여유로운 현실이었다.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길은 동백나무 숲에서 시작하여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동백 숲이 끝날 즈음 평평한 산마루에 밭을 일구고 차밭을 조성한 정약용의 군둥내 나는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풍긴다. 18년동안 머무르며 마음을 평정하고 살았기에..
신유사옥이 일어난 1801년 유배되어 강진읍 모처에서 4년을 보내고 또다시 사찰에 들어가
4년을 보낸 뒤 이곳 다산초당에 들어오게 되었단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소)라기 보다는 해남윤씨(외가) 가문에서 마련해준 은신처이다.
다산초당에 장장 10년을 머물면서 [목민심서][경세유포][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다산초당 오른쪽 정자는 다산선생이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보낸곳으로 알려져있고
그 중간쯤 고택이 나오는데 그곳은 “보정산방”이라는 곳으로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곳
아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 집자해 만든 것이란다.
비는 더 강하게 퍼 붓는다. 능숙하고 멋진 해설을 이어주시는 조 대표님의 품위에서
마치 정약용선생의 모습을 엿 보는 듯 했다. 참 멋져보인다.
때마침 따스한 부드러움과 맑은 향기와 감탄이 우러나오는 녹차를 대접해준다.
그 한모금의 녹차 향은 낙숫물로 범벅이 된 아랫도리의 체온을 올려주고 정을 스미게한다.
다산초당 마당가운데 놓인 반반한 돌 위에 불을 지펴 찻물을 끓였을 다산의 모습이
찻잔 속에 그윽히 비춰진다. 전형적인 선비의 위엄이 서리고 자상한 그의 가르침을 연상한다.
비는 그칠줄 모른다. 더 세게 더 힘차게 퍼붓는다.
고랑위를 걷는 우리의 모습은 비 맞은 장닭이 아닌 처절한 울부짓음이다.
슬쩍 장난기가 발동한다. 첨벙첨벙 물을 밟아 튀겨보기도하고 일부러 우산을 젖혀 빗물을
스미게도 해본다. 하지만 아랑곳하지않고 마냥 즐거운 교우들의 참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다산초당을 내려와 식당에 앉았다.
산채나물에 비빔밥, 그리고 구수한 동동주가 우릴 반긴다.
연거푸 두 대접을 받아 마신다. (실은 주량을 넘겼다) 하지만 비오는 날의 분위기가
알콜을 날려버리고 맹물만 마시라한다. 그래도 좋다. 잔이 부르는 그 황홀함에..
답사교육은 뒷전이고 우스게소리로 꽉채운이가 누군지 안다.ㅎㅎ
대동문화에서 추방 안할지 그게 젤로 걱정이다.
그렇게 오전 일과를 마치고 다시 위태로운 빗길을 한시간 쯤 달려 진도대교에 도착한다.
아리랑이 있고 진돗개가 있고 우리가락이 있고 우리문화가 있는 곳이다.
삼별초항쟁과 임진왜란, 수많은 한과 역사를 묻힌 진도, 우수영 전망대에서서 장군의
뒷 태를 감상하며 울돌목의 정기를 되짚는다.
전망대를 내려와 운림산방으로 향한다. 처음엔 운림산방 그러기에 제주도로 알았다.ㅎ
운림산방에 가는 내내 빗줄기는 더 거세진다.
바퀴에 튕기는 길 바닥의 빗물이 새하얀 뱃길같다.
그것 또한 장관이다. 운림산방에 도착하여 진도의 문화예술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가를
한눈에 알아본다. 첨찰산의 정기가 운림산방에 그대로 꼿히는 듯 했다.
호수의 물은 혼탁 했지만 소치 허련의 감각을 예감할 수 있는 수련의 수줍은 듯 다소곳한
모습이 마음을 긴장 시켰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공부를 했다는 소치의 대표작은 [선면산수도]이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셋째아들인 미산 허형, 손자인 남농 허건이 태어나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며
집안사람인 의제 허백련이 그림을 익힌 곳으로써 한국남화의 성지이기도하다.
돌아오는 버스안은 발꼬랑내로 진동을 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안젖은 사람이 없다. 차 뒤쪽을 좋아하는 난 뒤쪽에서 비교적
자유스럽게 벗고있는 양말의 꼬랑내를 고스란히 맡아야했다. 말은 안했지만.ㅎㅎ
진도를 왔으니 나갈땐 진도아리랑을 불러야한단다.
선창으로 모범을 보이신 조상열 대표님의 구수한 가락이 또 한번 감동을 준다.
다행이 내 차례는 오지않았다.깝깝했는데.ㅎㅎㅎ
마이크 잡는 연습을 해야한다며 돌아가면서 10-15분씩 하고싶은 이야기 공부, 유머등
자유발표시간이 주어졌다. 뭔 이야길 해야하나 고민하는데 그만 내 차례가온다.
지난주 다녀온 [태백산맥]이야길 해야겠다고 마이크를 들고서야 결정했다.
“태백산맥”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인 ‘고토분지로’라는 사람이 조선에 건너와
우리조국을 삼키려고 지질학적 개념으로 만들어놓은 산맥입니다.
원래는 조선정조때 ‘산자분수령’이라는 원칙을 세운 산경표에 지리학적 개념인
산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백두대간’입니다. 백두대간을 대동맥으로 보았을 때
정맥,지맥,기맥등 다른 산맥들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조선이 만든 산맥이므로
태백산맥은 쓰지맙시다....이리 이야길 해야하는데 다까먹고 알아듣지못하는 소리로
우물거리고 말았다.ㅎㅎ
그리고 핑계삼아 그것을 덮을려고 김영교의“어머니의 강”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광주시청에 다시 원점회귀하여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집안어른의 생신에 초대를 받아서 먼저 오고 말았다.
잊지못할 빗속의 답사교육 참으로 기억에 남을만한 교육으로 꼭 후기글을 쓰겠노라
맘먹고 미천한 글이나마 이 글을 남겨봅니다.
첫댓글 역쉬 총무님
입니다
선옥쌤..
이번답사 참 좋았지요?ㅋㅋ
ㅎㅎㅎ..나쌤..
총무는 아무나 하는뎁쇼..이동호는 아무나 못합니다.ㅎㅎㅎ
결혼식참석 등 다른 일이 있어 함께 가보지는 못했어도 쓰신 글을 보니 쟉년에 다녀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순간도 한장면도 빼놓지 않고 느낌까지 덧붙인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7기회장님 잘 계시지요?
뵙고싶었는데 안오셨더군요..집안에 일이 있으셨네요?
더 리얼하게써야하는데 넘 길어져서 많이 짤랐습니다.ㅎㅎ
이케 비맞고 다녀보기는 생전 첨입니다 정말 좋은 경험 이였구요 즐거웠었어요 울금막걸리로 뒷풀이까지 짱이였습니다
어허~ 참
그날 미꾸라지를 만들었어야하는데..ㅎㅎㅎ
~ㅎ 지금도 그날 젖었던 발이 덜 마른 듯 합니다. 덕산님 기행후기를 보는 동안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빗속에 산길을 넘던 생각을 했습니다. 운림산방에 갔을 때 그새를 못참아 퍼붓던 비도, 첨찰산을 휘감아 돌던 안개도 다시 그립습니다.
네네..질퍽한 산길을 넘으면서 우거진숲을 감상하기란 대단히 힘들었지만
지금생각하면 너무 아름다운 산행길이었습니다. 못 잊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