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일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신화나 먼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일단 환경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머무는 장소가 아닙니다. 좋은 목적지로 가기위한 거치는 과정입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은 효과적인 조력자가 되기보다는 거침돌로 작용합니다. 인내보다 불평을 택하고 순종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웁니다.
성숙한 신자의 척도는 불평과 분노와 원망과 고집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과 격려와 겸손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시야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요구하기도하고 좀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당장의 불편을 감수하기 보다 모세를 탓하며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모세는 회막으로 나아갑니다. 회막(meeting tent)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음식과 물과 지위와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까지 나아갔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장막 문에서 모세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홀로 나아가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아가는 일은 모세의 몫이었으나 말씀하시고 환대해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아버지와 세세한 일까지 의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분의 거룩한 교제와 관계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신과 인간의 대화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전능자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그 첫 단추가 말씀 묵상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 여전히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 선하신 음성과 자비하신 얼굴의 빛을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히브리 원어로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붉은 끈입니다.
2. 매혹의 땅
주인의 선하신 음성을 듣고 그의 성품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앞에 머무는 것이 큰 기쁨이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샘솟는 은혜가 영혼을 적시고 아버지 앞으로 이끌어 갑니다. 모세가 떨기 나무앞에서 이 곳은 거룩한 땅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땅의 성질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불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불은 마른 나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죄과을 불살라 정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불입니다. 거룩한 불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령에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이 불길은 끊임없는 목마름으로 주를 따르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인력입니다. 그의 사랑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끌림 곧 매혹의 땅 입구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3. 영광의 처소
모세는 자신과 백성과 나아갈 행로를 부탁하면서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에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던 모세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 대하여 보면 죄의 허물을 입고 사는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 수위조절을 하십니다. 정면으로 보면 죽을 수 있으니 반석 틈에 숨었다가 영광이 지나간 뒤의 후광을 보여주시겠다고 합니다. 바로 이 곳이 신약과 구약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르는 지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낫다고 합니다.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신 직후입니다. 곧 구약의 모든 선지자보다 예수님이후 곧 성령시대의 소자가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자들입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나와 이토록 오래 함께 있으며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와 두 제자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합니다.(마17: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합니다.(요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본 자들입니다. 이것은 구약성도 중 그 어느 누구도 얻지 못했던 영광입니다. 마치 고대의 왕조차도 스마트폰이나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듯이 우리는 놀라운 시대의 산물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6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장 3절)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장 12절)
* "영광에서 영광으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장 18절)
[ 결론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놋뱀을 보고 치유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치유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앞에서 세상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간 불신의 마음을 가진 자들처럼 눈 앞의 것들과 세상의 염려와 탐욕에 눈이 멀어 영광의 주를 못박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손길을 붙들고 인생의 남은 행로를 온전히 신뢰함으로 맡깁시다. 오직 주만 바라보며 처음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친구와 대화하듯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영광의 빛으로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세상에 빛으로 드러내는 아름다운 향기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