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에 대해 관대했던 철종 때 부터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 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선교 사업에 힘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1861년(철종 12년)에는 천주교인의 수가 1만8천 명,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3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984년 러시아의 통상 요구에,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 중이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주장했던 프랑스, 영국과의 삼국동맹이 러시아 측의 통상요구 시일이 지나면서 무산되게 된다. 이에 동맹 제안에 대해 무책임한 주선으로 간주하여 선교사들을 지탄하던 차,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드나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정부 관료들이 천주교도들의 행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단행한다.
이에 1866년 (고종 3년)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게되는 병인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병인박해로 남종삼·정의배(丁義培) 등의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탈출에 성공하여 톈진에 있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함대(극동함대(極東艦隊))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병인 박해에 대해 보고 받은 북경의 프랑스 대리공사(代理公使) 벨로네(Bellonet)는 청나라에 공문을 보내 항의하며 조선 정벌의 결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청나라 측은 “조선은 비록 청의 속국이긴 하지만 예로부터 내정과 외교는 자치적으로 행해 왔다.”라는 내용을 담은 답신을 보내, 사건이 청나라와는 무관함과 향후 이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청나라 정부는 간섭할 수 없음을 프랑스 공사관 측에 통고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하여 프랑스의 침략 의사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방비를 더 굳게 하였다.
1866년 음력 9월 로즈 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다.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18일) 순무영에서 프랑스 함대에 격문을 보내니 회답 격문이 왔다. 그에 따르면 선교사가 죄없이 죽었으므로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죽은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1866년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5일)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일에 청나라로 물러났다.
조선 정부는 더욱 군비를 갖추고 한강 일대의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그 해 음력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5척의 군함과 일본의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600명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음력 10월 14일에는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의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16일에는 프랑스군의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경하(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등의 장수들을 급히 양회진·통진(通津)·광성진(廣城津)·부평(富平)·제물포 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성·정족산성 등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19일에는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은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 등의 천주교 탄압행위를 비난하면서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했다.
음력 10월 26일에는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韓聖根) 등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음력 11월 7일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폭격하고,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일대 160여 명의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이에 놀란 프랑스군은 장녕전(長寧殿)을 위시한 여러 관아(官衙)를 불사르고 갑곶진으로 퇴각했다.
로즈 제독은 이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음력 11월 18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고, 성내의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군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한편 유럽 열강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조선-청나라 관계에 대하여 재검토하게 되었고,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 인사들의 한국과 동양 연구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865년 나가사키항에서 찍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기리에르(Guerrière)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