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주동 구 시장에서 본 동광길 모습. 약 90년 전에는 나운규가 영남여관을 나와 이 길 어딘가를 지났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부산은 어떤 도시일까? 과거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임에도 '문화 불모지'라는 몹쓸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랬던 부산이 오늘날 대중문화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영화로 갑작스레 도시 이미지를 일신할 수 있게 된 것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제 부산도 '영화의 도시' '영화문화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문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무리 지어 살면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이다. 즉 문화는 역사 속에서 짜인다. 달랑 영화제 하나로 영화의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동안 우후죽순처럼 열린 수많은 영화제들 중에서 부산국제영화제만 큰 성공을 거둔 데에는 어떤 역사적 바탕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바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문화와 공간은 이야기로 엮인다. 문화는 보이지 않지만 공간 속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이야기의 자취가 되고 그 자취들을 엮으면 더 큰 이야기가 꾸려진다. 이것이 영화도시 부산을 '이야기로 엮어 펼치기(스토리텔링)'하는 과정이다. 그 첫 단계는 부산의 공간을 영화의 역사 지도로 그려 보는 일이다. 부산일보와 부산대 영화연구소(공동기획), 부산영상위원회(후원)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인 영화의 부산 지도를 그리는 것이 부산 시민들의 이야기를 공간화하는 일이라 보고 시리즈 '부산 영화지도를 그리다'를 마련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의견을 부탁 드린다.
국내 처음으로 영화 상영한 곳은? 1900년 전후 부산 왜관 지역 추측
당시 일본인 많이 거주한 광복동 행좌·송정좌 등 다수 극장 들어서 60년대부터는 남포동이 극장가로
남성여고 인근 한국 첫 영화 제작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1924년 설립 나운규 단역·잡일 거들며 영화 배워
우리나라에서 처음 영화를 본 사람은 부산 사람?
영화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래서 탄생일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탄생일은 카메라 겸 영사기를 개발한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영화를 상영한 1895년 12월 28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영화는 엄청난 속도로 세계에 퍼져 나갔다. 영국에는 불과 두 달 만에 상륙했고 10개월 안에 러시아, 미국, 인도, 중국까지 진출했다. 일본에는 1897년 2월에 도착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영화가 언제 들어왔을까?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 광고다. 이 광고에는 '활동사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활동사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1년여 만에 일본까지 진출한 영화가 한국으로 넘어오는 데 6년이나 걸릴 수는 없으므로 20세기에 들어서기 전에 한국에 영화가 이미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한 곳은 어디일까? 영사기가 중국에서 왔다면 인천이나 군산을 거쳤을 것이고 일본에서 왔다면 부산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나라마다 다르게 불렸고 활동사진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한학자 후쿠치(福知)가 지은 것이므로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고 보아야 한다. 문물은 그 이름과 같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항에 들어온 영사기가 그대로 보따리에 싸인 채 서울로 직행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 즈음 부산에는 이미 6천여 명이나 되는 일본인 거류민이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계지에 모여 작은 일본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영사기를 들고 일본에서 온 사람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 일본인에게 그것을 보여 주지도 않고 서울로 떠났을까? 아마도 용두산 주변 어디에선가 그 신기한 물건을 자랑 삼아 또는 돈벌이 삼아 상영했을 것이다. 그때 조계지에 출입하던 한국인들 중의 누군가도 함께 그것을 보았으리라. 그래서 국내에서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곳이 부산이며, 영화를 최초로 본 한국인은 아마도 부산 사람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광복동과 남포동 : 영화관의 역사를 압축한 공간
이제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 보자. 그 출발은 중구 지역이다. 부산은 조선 초기부터 일본과의 유일한 공식적 교류 통로였고 1876년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국제화의 첨병 도시가 되었다. 중구 지역은 초량 왜관지역이었으므로 일본인을 위한 도시공간으로 발전하였다. 개항 당시 82명에 불과했던 부산의 일본인은 해방 직전에는 6만여 명까지 증가했는데 이 숫자는 오늘날 중구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전통극 연희공간을 적극적으로 근대적 극장 안으로 끌어온 나라다. 특히 17세기에 성립되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가부키는 극장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는 중구의 극장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1895년에 전국 최초로 부산에서 극장취체규칙(공연장 시설과 운영에 관한 법)이 제정된 것을 보면 그 즈음에 이미 부산에 극장이 존재했다고 짐작할 수는 있으나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극장에 대한 첫 기록은 1903년의 부산지도인데 여기에 행좌와 송정좌의 위치가 나와 있다. 지도상 행좌는 광복동 할매회국수집과 서울깍두기 사이의 좁은 골목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광복동은 골목골목이 인파로 가득하다. 그러나 지금의 행좌 앞길은 옛날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양편의 건물들이 서로 등지고 있는 길이 되어 버려서 인적이 거의 닿지 않고 있다. 좁고 어두운 골목의 삭막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최근에 벽화작업을 해 놓았다. 변두리나 낡은 주택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벽화거리가 시내 한복판의 뒷길에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광복동 뒷골목에서 유명한 할매회국수 앞 작은 골목길의 '행좌'터.
행좌, 송정좌, 부산좌를 시작으로 중구에 수많은 극장들이 들어섰다. 이들은 비록 일본 전통극 공연장으로 출발하였지만 연극의 지위를 영화가 잠식해 들어가는 동안 연극장은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행좌 역시 가부키 공연장이지만 초창기부터 영화도 함께 상영했다. 다다미 바닥에 앉아 전통연희를 보는 장소를 뜻했던 좌(座)라는 이름은 근대적인 복합공연장인 관(館)으로 변모되었고 영화전용관인 '극장'이 되었다.
광복동 시가지는 극장의 역사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극장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광복로 입구의 상생관(한국투자증권), 보래관(국민은행 광복동지점)과 그 뒷길의 태평관, 그리고 소화관(동아데파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소화관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1960년대부터는 부산극장(1934)을 중심으로 한 남포동이 극장로를 이루었다. 구 시청 앞 동명극장에서 충무동 육교 옆 국도극장에 이르는 대형 개봉관 밀집구역은 90년대까지도 부산을 상징하는 거리였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문을 닫은 이들 극장의 흔적마저도 빠르게 지워졌다. 부산에서 자란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부영극장, 제일극장, 국도극장조차 이제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부산이 영화의 도시라면 그 기억이라도 보존할 방법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광복로 입구 한국투자증권이 자리 잡은 터는 일제시대 '상생관'이라는 극장 자리.
동광동과 영주동 : 청년 나운규의 꿈이 깃든 곳
나운규. 그가 만든 영화 '아리랑'과 함께 신화로 남은 인물이다. 남한과 북한이 모두 인정하는 문화적 정통은 이제 소설 '춘향전'과 나운규뿐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이념 대립과 오랜 분단이 낳은 남북의 문화적 분열에 대한 씁쓸한 냉소가 담겨 있지만, 역설적으로 나운규가 시대와 이념을 넘어 한반도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그 나운규가 영화를 시작한 곳이 바로 부산이다.
중구청에서 출발해 남성여고 입구를 지나면 한성각이라는 중국집이 있다. 그 일대는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이다. 192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사가 생겼다는 것은 부산의 영화산업이 그만큼 앞서 성숙했다는 의미도 된다. 일본인의 돈으로 만들어진 영화사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조선키네마는 윤백남, 이경손, 안종화, 이월화 등 한국영화의 초창기를 이끈 영화인들을 배출하여 한국영화의 터전을 닦았다.
중구청 아래 한성각 등 중국집이 자리 잡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터.
조선키네마주식회사터 앞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작은 샘.
청년 나운규는 이 회사에 연습생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영화 초보 나운규에게 맡겨진 역할은 소소했다. 조선키네마의 첫 영화 '해의 비곡'에 어부로 잠깐 등장했고 이어 1925년 '운영전'에서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는데 손님이 부르자 "예이!"하고 뛰어가는 단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산에서 영화에 대한 열망과 꿈을 키워 서울로 올라간 나운규는 이듬해에 '아리랑'(1926)이라는 걸작을 만들었다.
부산에서 생활하던 나운규는 매일 어느 길을 오갔을까? 조선키네마는 영주동의 영남여관을 공식 숙소로 지정했는데 나운규도 다른 배우들과 함께 여기에서 생활하였다. 조선키네마 터를 지나 내리막을 내려오면 동광길이 나온다. 대청동과 영주동을 얕은 고개로 잇는 이 길은 중앙로가 생기기 전까지 중심도로의 기능을 했다. 영주동쪽으로 내리막이 급해지는 곳부터 영주동 구 시장까지는 여관촌이었고 이곳 어딘가에 영남여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영로 242번 안길을 거쳐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코모도호텔로 올라가는 영선고개(중구로)가 나온다. 그 도로 건너 산자락에는 봉래권번이 있었다. 권번은 오늘날의 용어로 '기생조합'인데 권번 인근에는 요리집 등 유흥업이 번창했다. 당시 영화인들이 모였던 박간산정(迫間山亭)이라는 별장도 그 부근에 있었다. 박간산은 중앙공원이 있는 영주동 뒷산을 이르는 별칭인데 그 이름은 부산의 일본인 사업가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의 그 별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화재로 소실된 행좌를 헐고 행관을 건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영화의 초창기부터 부산의 일본인 자본가는 영화를 새로운 유망산업으로 인식하고 많은 상영관을 세웠으며 영화제작기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었다. 부산은 영화의 도래와 함께 가장 활력 있는 영화 도시가 되었다. 청년 나운규는 동광동과 영주동의 골목을 매일 오가며 '우리 민족의 영화'에 대한 꿈을 마음속에 새겼다. 지금은 발길이 닿지 않는 광복동의 뒷길, 영주동의 후미진 골목길에서부터 이렇게 한국 영화의 역사는 떠들썩하게 때로는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글=김충국 부산대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windboy@pusan.ac.kr
사진=박종현 사진가 newyorker57@hanmail.net
후원:부산영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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