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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시대( AD 70 to 300)
제1차 유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유대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팔레스타인은 독립 속주로서 로마의 직할지가 되고, 유대를 이끌던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이 사라졌다.
제2차 유대 반란 이후 성전이 파괴되고 직무 해제된 대제사장을 대신하여
랍비라는 율법 교사가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
AD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의 열렬한 민족주의적 사상을 탄압하고자
반유대교 법령을 반포해 안식일 준수와 할례 의식을 금지했다.
이것이 반란(132-135)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분리된 하나의 영향력있는
종교로 성장했다.
로마의 황제들 (69-138)
플라비우스 왕조 - 제국을 재건하다
AD68년에 있었던 네로 홍제의 자살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로마를
다스려 오던 율리우스클라우디오 왕조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다음해 일년 동안 황제가 네 번이나 바뀌며 로마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민전쟁의 위협을 종식시키기 전에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이 자칭 황제로 등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AD69년 로마군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뒤 그의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를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세우는 등 빠르게
로마를 장악해 갔다.
이렇게 해서 AD100년과 AD200년 사이에 로마 권력과 문화의 기초를 쌓았던
플라비우스 왕조가 꽃을 피웠다.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비천한 기수에서 군 경력과 업적을 이용해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57세에 네로의 부름을 받아 유대 반란을 진압했고, 브리튼 군사 작전이
노병 장군으로 명성을 날렸다.
AD68년 네로가 죽자 그는 휘하의 군단들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할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군사작전을 미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에게 유대 군사작전을 위임한 뒤 심각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 로마로 입성했다.
네로의 집권은 황제에 대한 윈로원의 불신과 엄청난 자금난을 유발했다.
게다가 일년 동안 네 황제가 등극하면서 로마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원로원의 항제 즉위 승인을 얻었다.
검소한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치하의 사치를 멀리하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난친 호감을 경계하는가 하면 수입을 최대화해 제국을 자금력있는
부유한 국가로 재건했다.
그러나 AD64년에 있었던 대화재를 처리하고 재건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많은 돈을 낭비하게 되었다.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즉 그 유명한 로마의 콜로세움이 이때 프라비우스
왕조의 후원을 받아 세워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와 권력을 나눔으로써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했다.
지방 관리들은 그의 정책을 따라 정직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했다.
AD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었을 때 로마 제국은 이미 국력과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티투스
티투스는 AD79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단 이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다.
유대의 정복자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하사한 개선문에는 그의 군사적 업적을
기록하여 기리고 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의 어버지의 의해 길러진 티투스는
일곱 번이나 로마 집정관이 되었고 최고의 군인들로 구성된 황제 친위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비록 초기에 반대 세력에 부딪치기는 했으나 곧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황제가 되었다.
그는 짧은 집권 동안 주로 무절제하고 사치스러운 연회를 벌이는 데 시간을
탕진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가난한 잭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AD79년 그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들에게 구호품을
대주는 한편 로마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티투스가 아그립바2세의 누이 버니게와 관계를
가졌다고 전한다.
티투스가 버니게와 결혼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로마는 유대 반란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때라 유대 공주를 환영하지 않았다.
티투스는 열병을 앓다가 AD81년 짧은 황제의 삶을 마감했다.
도미티아누스
고대사 기록자들은 대체로 도미티아누스를 황제의 권력을 남용한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기록자들은 교회를 박해했으며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집권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그의 통치기간, 특히 말기에 무절제와 잔혹함을 보여 줬지만,
역사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의 확장에 엄청난 공헌을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토미티아누스는 그의 형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황제 자리에 올랐기에 자신에게 부여된 많은 요구들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중간 계급을 로마 정부 기관에 임용하는 정책을 썼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에게 대항한 귀족과 헬라 주의자(그리스 문화 연구자 혹은 심취자)
들과 손을 잡았다. 도미티아누스는 공로 정치를 펴기 전에 꽤 많은 업적을 남겼다.
로마는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새광장, 새원로원 건물, 그리고 커다란 황궁으로 단장됐고,
또 세 차례에 걸친 다키아전쟁으로 라인강과 다뉴브 강을 손에 넣었다.
집권 말기에 그는 자신의 경쟁 상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는 밀고자로 하여금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이 희생자로 지목한 많은
사람들을 사형하거나 추방했다.
그는 황제 숭배를 강요해 자신을 군주와 신으로서 대접하라고 명령했다.
황제숭배는 로마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계시록에 나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로마 황제에게 절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을 어럽히지 않으려 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이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도 높은 박해를 가했다. (요한 계시록 7교회 참조)
도미티아누스는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모조리 공격했다.
비 로마적인 종교나 그에 동조하는 것까지도 반역으로 몰아세웠다.
황실이나 귀족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심지어 사촌 클레멘스에게는 사형을, 조카딸
도미틸라에게는 추방을 명령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광포한 정치는 결국 AD96년 그의 암살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조정에서 로마 근위대 대장의 협노로 이루어졌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원로원은 기록 말살형을 공포했는데, 이는 도미티나누스의
통치를 유죄로 인정하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후계자들 - 로마의 최고 절정기를 이루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임하면서
권력 계승의 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말년의 공포 시대와 그 후 일어난 그의 암살 사건은 누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남겨 놓았다.
도미티아누스의 후계자인 네르바의 뒤를 이은 네 명의 황제들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들 네 황제는 “입양된 아들”이었지만 후임을 맡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으며 유능한
지도자였다. 이런 유능한 통치자들(트라이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도아래 로마 제국은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고 로마 문화도 절정기에 이르게 되었다.
네르바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누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던 원로원들은
네로에서부터 도미티아누스까지 이어지는 권력 다툼 속에서도 정치적 노련미 덕분에
살아남은 66세의 성격 좋은 네르바를 택했다,
네르바 역시 자식이 없었고, 이는 그가 자신이 자식을 통해서 왕조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16개월에 걸친 네르바의 통치는 음모와 미스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경제적 위기를 막고 시민들을 만족시키며 정부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애썼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과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도 설립했다,
그리스도의 사람과 유대 사람에 대해서도 도미티아누스보다 덜 탄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네르바는 군사력을 장악하지는 못해 늘 군대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공적이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장군 트리야누스를 입양하고 “제왕”이라는
칭호를 내려 황제의 권력을 부여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네르바는 죽었고 트리야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트리야누스
트리야누스는 이상적인 로마 황제였다.
성공한 군 지휘자이자 꼿꼿하고 근면한 성격, 게다가 행정적 세부 상항에까지 “조예가
깊었던 트라야누스는 지방에 유능한 인사들을 파견하고 지방 경제의 활성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와 비두니아 총독인 젊은 플리니우스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그가 지방 행정에 매우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플라니우스에게 황제 숭배를 거부해 고소당한 비두니아의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온건함으로 대하라고 조언하며, 증거 없는 고소로 인해 그들을 유죄 판결하거나 검거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트리야누스는 항구 시설, 도로, 수로를 개선하는 계획을 적극 지원했다.
로마 최대 규모의 광장에는 그가 전투에 승리한 장면을 묘사한 기둥이 세워졌으며
기둥 꼭대기에는 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로마군을 자신과 동일시한 트라야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영토를 동쪽으로
더 넓히는 데 성공한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다키아 전쟁(101-102년과 105-106년)을
통해 다뉴브 최전방을 공고히 하는 한편, 다키아(루마니아)를 하나로 묶어 로마의
새로운 주로 만들었다.
AD105년에서 106년에는 유대 바로 동쪽의 나바테아 왕국을 합병하고 보스트라를
지방 수도로 정해서 로마 군단을 주둔 시켰다.
로마의 요새화된 방어선은 새롭게 합병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남과 동으로
더 확장되었다.
그러나 바대의 압박은 AD114년 아르메니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유발했고, 트라야누스
AD115년에서 117년에 지나친 확장 정책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대한 군사 작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군대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성공적으로 관통해 두 개의 새로운 주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바대 왕국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현명하게 화를 자초하기보다는 새로이 점령한
주를 방치하는 쪽을 택했다.
트라야누스가 바대를 침략하는 틈을 타 이집트와 카레나이카(북 아프리카 리비아등),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의 유대 사람들의 소요를 탄압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유대 민족주의로 인해 유대 사람들은 하드리아누스의 통치 때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트리야누스는 AD117년 길리기아에서 약해진 심장과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통치 말기 그는 하드리아누스를 아들로 삼고 그를 후임자로 임명했다.
히드리아누스
트라야누스는 친척이자 그와 같은 스페인 출신인 하드리아누스를 후임자로 임명했다.
트라야누스아 달리 하드라아누스는 지적이었으며 활동적이고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에도 자신의 족적을 남겼는데 판테온 과 비너스, 로마를 기리는
신전을 건설했다. (로마 최대 크기의 신전 110x53m.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별장을 로마의 외각 티볼히에 건설 했는데,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이 별장에는 궁전과
도서관, 목욕탕, 극장 등이 갖춰져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름으로 바꿨으며, 할례를
금하고 자신과 제우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옛 헤롯 성전 위에 세움으로써 유대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그는 자신을 또 하나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BC175-163, 시리아를 통치한 사람으로,
예루살렘에서 삼일 동안 4만명 유대 사람을 학살한 것으로 유명함)로 생각했다.
그의 이같은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람들이 세 번째 반란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통치(138-161년)는 로마에 무엇과도 견줄 바 없는 비증유의 평화를
가져왔다, 경건함과 정직함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능한 황제 안토니우스는 국외 원정으로
이탈리아를 떠난는 일 없이 가족과 정치제 온 힘을 쏟았다.
AD161년 그는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뒤를 이어 그가 입양한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화제로 등극했다.
스토아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우스와 같은 운이 따라 주지
않은 왕이었다.
19년(AD161-180년)이라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쪽의 게르만 족속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쳐 들어왔으며, 이것은 곧 일어날 더 심각한 위협을 예고했다,
바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옮긴 전염병이 로마 전역에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AD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자 수십 년간 로마의 정치적 안정과 평화에 위기가
찾아왔다.
총독들 간에 내분(192-197년)이 일어난 것이다.
AD3세기에 이르자 로마는 새부의 불안이 더 심해저는 한편 국경을 침범하는 외세의 침임도
잦아졌다.
바르 코크바 반란
하드리아누스 통치(AD117-138년)기간 중 유대의 유대 사람들이 로마에 대항해 두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 하드리아누스가 내린 두 가지 결정이 이 사태의 계기가 되었다.
첫째, 그는 할례를 포함해 적용 범위를 광범위하게 둔 거세 행위를 금했다.
둘째, 그는 예루살렘을 이방 사람의 성지로 완비한 로마 식민지로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제 유대 반란은 피할 수 없게되었다.
AD131년 말 유대 사람들은 랍비 아키바의 지지를 받는 메시야적 인물 시몬 바르 코세바
곧 “별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시몬은 로마 점령군에 대항해 유대를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로마 제10군단을 비유대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쫓아 보냈다.
산헤드린의 지지를 얻은 그는 주화를 만들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언했다.
이 년간 예루살렘을 지키며 갈릴리까지 반란 운동을 확산시키려 했으나, 정작 갈릴리의
유대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보내 유대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팔레스타인으로 가 완전히 진압될 때 까지 머물렀다.
로마군은 다섯 개 군단 중 일부를 소집해 팔레스타인에 주둔해 있던 제6군단과 10군단을
돕기로 했다. 제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의 10분의 1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던 중 유대
사람들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율리우스는 세베루스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부터 차례차례 공략하는
전술을 폈다. 반란이 일어난 지 삼 년이 지나자, 시몬은 예루사렘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남서부의 베데르라는 요새로 푸되한 반란군은 AD135년까지 로마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시몬 바르 코크바를 포함한 모든 반란군이 살해됨으로써 유대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예루살렘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그의 식민지 에리아
카피불리나를 건설했다 제우스에게 바쳐진 이방 사람의 신전이 옛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세워졌다.
유대 사람들은 이 성스러운 도시의 출입이 오랫동안 금지되었다.
그리고 유대 사람이 지성적 중심지가 서서히 갈릴리로 넘어갔다.
2세대로 접어든 그리스도교의 확장
제자들에 의한 1세대 선교 활동으로 지중해 유역 전역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신약 성경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선교 활동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 밖의 신자들도
예수의 말씀을 전파하며 교회들을 개척했다.
교회의 설립을 둘러싼 정확한 역사적 환경은 알 수 없으나, 로마를 비롯한 비두니아,
본도, 갑바도기아,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등에 세워진 교회들은 사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에 이미 번성했다.
교회의 확산 요인 - 통일된 언어와 구비된 도로가 요인이 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가 빠르게 학장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이었다.
그리스어가 로마 제국의 통용어로 남아 있던 것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
2세기에 찾아온 로마 제국의 평화는 도시 간 교역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품들은 육로와 수로를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자유로이 오갔다.
이 길을 따라 대상들과 상인, 군인,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전했다, 여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유대교 회당이, 반유대 세력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순회 설교를 하며 복음을 전하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와 안팎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널리 전해져
AD 300년경에는 이미 지중해 연안 전체에 퍼져 있었다.
소아시아 - 교회이 중심이 되다
AD100년을 전후한 십 년 동안 소아시아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트리아누스의 통치(AD98-117)기간 동안 비두니아 총독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교라는
“미신”이 도시에만 퍼진 것이 아니라 마을과 시골 지역에도 퍼졌다고 불평했다.
트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박해에 좀더 온건해지라고 조언했으나,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를 고집하는 모든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플리니우스의 정책에는
승인을 해줬다.
1세기 말, 30만으로 추정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중 4분의 1이 소아시아 지역에 살았을
것이다.
선도적인 교회를 - 순교자와 변증자 그리고 신학자들을 배출하다.
AD100년에는 이미 몇몇 교회(로마, 에베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르타고 까지)
에서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자신의 다른 교회를 향해 여러 통의 걱정 어린 편지를 썼다.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 AD155년에 그랬던 것처럼
트리아누스가 통치하던 AD100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공격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변론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마리아 출신의 철학자인 순교자 유스틴(Justin Martyr)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자신을 변증하는 편지를 보냈다.
카르타고에서는 위대한 변증자 터툴리안(160-240년)이 배출됐다.
AD 200년경 갈리아 리용에서는 주교 이레니우스가 (이단에 대항하는 다섯 권의 책)을
쓰고 연설을 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서쪽으로 확장해 갈리아(골)까지 들어 갔음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저명한 학자 클레멘트와 그리스 최고의 신학자 오리겐(185-253)이
배출되었으며 그곳은 그리스도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AD202년 오리겐의 아버지가 세베란 박해 때 순교한 후 오리겐 자신도 테시안 박해의
후유증으로 죽게 되었다. 2,3세기의 그리스도교 학자와 순교자들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널리 확장 되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동방에서 교회 확장 -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동부에서는 어떻게 확장해 갔는지 알지 못한다.
트리야누스 통치 아래 로마 제국은 메소포타미아까지 그 영역을 넓혔으나, 이것이
그리스도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미지수다.
메소포타미아의 그리스도교 중심지 두 곳 에데사와 멜리테네는 2세기에 세워졌다.
로마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산발적인 박해와 안팎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널리 전해져 AD300년경에는 이미 지중해 연안 전체에 펴져 있었다.
당시 로마는 외부적으로는 북쪽의 야만인이 국경을 침범해 괴롭혔고, 내부적으로는
도덕적, 정치적 타락에 의해 기울어 가고 있었다.
데키우스(AD249-251)와 디오클레티아누스(AD303) 통치기에 특히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했다.
콘스탄틴이 AD312년 막센티우스와 겨룬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합법화하는 밀라노 칙령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개인적인 이유와 함께 산산조각 난 제국을 통일하고자 그리스도교를
지지했다. 훗날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승리한 것은 결코 이런 정치적인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압박을 무릅쓰고 예수의 제가가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예수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AD197년경 로마 지방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낸 터툴리안이 이 한마디가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더. “당신들에게 더욱 더 베임을 당할수록, 우리의 수는 더 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역 시기의 로마 제국 - 티베리우스의 통치
예수의 사역은 로마의 티베리우스 통치 기간 중에 이뤄졌다.
55세에 제국의 왕좌에 오른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BC63-AD14)로부터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물러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팍스 로마나의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았으나 티베리우스는
수련된 군대 지도자였을 뿐, 왕으로서 져야할 막중한 책임을 불편해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의 불행한 결혼 역시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율리아가 방탕하다는 평판은 이미 로마에서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카리스마에는 못 미쳤지만 능력 있는 지도자였다.
행정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해 속주 관리들의 근무 연한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매우
신중하게 운영했다.
많은 로마 사람들이 그의 재정 정책을 인색하다고 여겼지만, 그가 죽었을 때 로마의
재정 상태는 견실했으며, 로마 제국의 국경 역시 견고했다.
이러한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이나 로마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는 로마를 피해 카프리 섬에서 은거하면서 점성술에 빠져들었다.
티베리우스는 국가 행정을 근위대 사령관인 세이아누스에게 위임했는데, 그는
잔인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가혹한 독재자였다.
어쩌면 반유대주의자일지도 모르는 세이아누스는 본디오 빌라도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AD31년 티베리우스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세이아누스를 처형하고 난 후에 반역죄
재판을 장려했다. 그로 인해 원로원과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AD37년 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많은 로마 사람들은 은둔해 지내기를 좋아하고
마지못해 왕위를 지켰던 황제의 죽음에 환호했다.
팔레스타인의 정치 - BC4-AD41년
BC4년에 헤롯 대왕이 죽은 뒤 헤롯 왕국은 살아남은 그의 세 아들에게 나뉘어 졌다.
예수의 사역 기간동안 그들 가운데 두 아들,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은 로마의
속주로서 팔레스타인을 통치했다.
그러나 세 번째 아들 아켈라오는 AD6년에 무능력으로 추방되고 대신 로마에서
온 행정장관이 통치했다.
<종합주석 마태복음 P169 마2 :22절 내용.
헤롯이 죽자 로마 정부는 헤롯이 관할했던 팔레스틴 지역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가운데 유대와 사마리아 및 이두매 지역을 아켈라오에게 주고, 바타네아와
트라코니티스 지역을 헤롯 빌립 2세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
또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디바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눅3:1).
아켈라오(BC4-AD6)는 그의 부친 헤롯 못지 않은 잔인한 성격의 독재자요
번덕쟁이로 악명 높았으며, 무능했다.
때문에 그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BC63-AD14)에 의해 추방당하고 그 후로
유대 지역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런데 요셉이 유대 땅으로 가기를 싫어한 것도 바로 이러한 아켈라오의
잔인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유다 땅으로 가기를 싫어하는 요셉에게 또 다시 꿈을 통해 주의 지시하심을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가게된다.
그런데 당시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 (BC4-AD39)는
당시 팔레스틴 지역을 통치하던 세 명의 헤롯 아들들 가운데서 비교적 제일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때문에 요셉의 가족은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헤롯의 계승자들 - 헤롯 왕국이 분리되다
BC4년이 헤롯이 죽자 위기가 닥쳤다.
헤롯을 계승해 과연 누가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될 것인가?
많은 유대 사람들은 로마와 헤롯 왕조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헤롯은 마지막 유언을 통해 그의 살아남은 세 아들 아켈라오, 안티파스, 빌립에게
왕국을 나눠 주었다.
유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불평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시리아의 레가투스 (속주 부총독)
바루스가 로마 군대를 파송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팔레스타인을 시리아 속주에 병합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마지못해
헤롯의 유언을 약간 수정하여 비준해 주었다.
철권통치를 편 아켈라오
아우구스투스는 아켈라오를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리는 “분봉왕”에 임명했다.
철권통치를 편 아켈라오는 어머니 말타케가 사마리아 사람이고, 아내 글라피라는
이복형제의 미망인이었다.
유대민족은 어머니가 사마리아 사람인데다 성경에서 금한 근친상간을 한 아켈라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아켈라오도 건축 사업에 열의를 보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 건설한 여리고 근처 요세도 포함된다.
그의 억압적이고 잔인한 정책은 마침내 유대 사람의 반란을 불러왔다.
그러자 AD 6년 아우구스투스는 아켈라오를 갈리아 지방의 비엔나로 추방시키고,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 위해 지방장관을 임명했다.
성경은 아켈라오에 대해 단 한번 언급하는데(마2:19, 23). 마리아와 요셉은 이 폭군이
다스리는 동안 유대에 정착하지 못하고 대신 갈릴리에 정착하여 예수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
안티파스는 헤롯 왕궁 가운데 갈릴리와 베레아를 물러 받았으며 “분봉 영주”라는 칭호를
얻었다. 안티파스는 그의 형 아켈라오가 추방된 뒤 왕조의 이름인 헤롯을 물려받았다.
갈릴리는 예수가 사역기간 중에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인 만큼 신약성경은
헤롯 안티파스를 20회나 언급하고 있다.
안티파스는 예수의 인기가 날로 커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번은 예수가 안티파스를 “그 여우”(눅13:31,32)라고 불렀다.
빌라도는 재판 중에 에수를 해롯 안티파스에게 보냈다(눅23:6-12).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지만,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더 좋아해 이혼했다.
헤로디아와의 결혼은 두 가지로 안티파스를 괴롭혔다.
첫째. 세례 요한은 그 결혼을 간음 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의 선포를 두려워 해 그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둘째,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함으로써 안티파스와 나바테아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AD 36년에 나바테아 왕 아레다스 4세가 헤롯 안티파스를 패배시켜, 그의 딸이 안은
불명예를 복수했다.
안티파스는 그의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통치자였다.
BC 4년 헤롯이 죽은 뒤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이끄는 무리가 세포리스의 병기고를
습격하자, 로마 군대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세포리스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후에 안티파스가 두 개의 주요 대상로가 만나는 곳에 있었던 이 중요한 도시 세포리스를
재건했다. 요세푸스는 안티파스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5km 밖에 안 떨어진 세포리스를
갈릴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 고고학의 발굴로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행각이 늘어선 도로와 극장을 갖춘 도시 세포리스는 AD 18년까지 갈릴리의 수도였다.
능력 있는 행정가 빌립
빌립은 헤롯 대왕의 셋째 아들로 왕국의 일부를 물려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갈릴리 바다의 북쪽과 동쪽 지역인 아울라니티스, 비타네아,
아우라니티스, 파니아스, 드라고닛, 과 이두래의 분봉 영주로 임명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한 것에 대해 그가 다스리던 지역의 백성들은 아무런
험담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빌립의 통치 기간에 나라가 평화롭고 번영했다고 기록하면서 그를 능력
있는 행정가이자 통치자라고 평가했다.
빌립은 요단 강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인 가이사랴 빌립보에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뱃새다 마을을 재건한 뒤 아우구스투스의 딸을 기념해 “율리아”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빌립은 AD 34년에 평화롭게 죽었다.
로마는 한때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시리아 총독에게 할당했다가 아그립바
1세에게 넘겨주었다.
최초의 지방장관 - 로마 지방장관이 유대를 다스리다(AD 6-41)
AD 6년에 로마가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리던 아켈라오를 분봉왕에서 폐했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역을 지방장관을 통해 직접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 관리들의 임기를 단기로 임명해 삼 년마다 바꾸었다.
반면 테베리우스는 안정성을 중시해서 장기로 임명하기를 원했다.
지방장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본디오 빌리도는 테베리우스가 로마 정부를
대신 관리하도록 맡긴 근위대 사령관 세이아누스가 임명했을 것이다.
세이아누스는 잔인하고 반 유대주의자 였던 것 같다.
빌라도는 세이아누스가 권좌에 있는 한 유대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AD 31년 세이아누스가 처형되자 빌라도의 태도가 훨씬 조심스러워진 것을 보면
그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마침내 빌라도는 월권한 죄로 시리아의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 후 두명의 지방장관이 오년 동안 다스리다가 AD 41년 로마의 속주 아그립바
1세가 즉위해 다스렸다.
로마 시대의 유대 종파들
요세푸스는 이방인 독자들에게 쓴 그의 책에서유대 사람들의 네 가지 “철학 분파”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을 언급하고 있다.
처음 세파는 유대교 내 종교적인 그룹들과 동일시 된다.
그러나 열심당은 로마의 치세를 전복하려는 그룹이었다.
바리새파 - 토라와 구두 전승을 준수하다.
바리새파는 가장 잘 알려진 유대교 종파다.
그들은 아마도 마카베오 혁명 시기에 셀류코스 왕조에 대항해 싸운 하시딤에서
기원된 것 같다.
바리새파는 한때 산헤드린에서 영향력과 세력이 커진 적도 있지만, 하스몬 왕조를
지나고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는 몹시 약해졌다.
바리새파는 일상생활에서 토라를 준수하는 데 전념하는 평신도 운동이었다.
가르침
바리새파는 다른 무엇보다 토라에 가치를 두었다.
이 때문에 바리새파는 율법을 어떻게 모든 상황에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복잡한
구두 전승을 발전시켰다.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관계가 매우 친밀했는데, 대다수를 차지 하기는
했지만 모든 서기관이 바리새파는 아니었다.
바리새파는 이 구두 전승을 성문화된 율법만큼 완전히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점은 사두개파와 가장 크게 차별화하는 특징이다.
요세푸스는 바리새파를 하나님의 주권과 이간이 자유 사이에서 신학적인 균형을
유지하던 온건한 자들로 설명했다.
그들은 천사론, 악마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부활을 포함한 새로운
신학적 개념들을 받아들었다. 반면 사두개파는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을 거부했다.
조직과 관습
바리새파라는 명칭은 아마도 히브리어 “분리”라는 말에서 파생, 따라서 분리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친교를 위해 소그릅을 구성했고, 식사를 함께했으며,
경건생활을 훈련했다.
바리새인 들은 재의적인 정결법, 안식일 준수, 십일조 등을 적용하기 위해 복잡한
구두 전승을 발전시켰다.
유대 사람들은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징계에 관대할 뿐 아니라 경건하다는 점 때문에 그
들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바리새파와 예수
예수와 바리새파 사이의 갈등은 구두 전승에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것을 구속력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2:23-28; 7:1-13; 눅6:1-11).
바리새파 역시 다른 종교에서 경건의 예로 드리는 금식과 기도를 지켰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예가 부적절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무가치하다고
비난했다 (마6:5-18; 23:1-39).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다(마9:11; 눅15:2).
그러나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긍정적인 접촉을 갖기도 해서 그들의 집에서
먹기도 하고 하나님을 찾으려는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막12:28.34; 눅7:36.50; 요3장).
바리새파는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대교 분파였다.
유대교는 그 파국의 결과로 등장했는데, 바리새파의 관점을 본질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랍비 문학 (미쉬나, 게마라, 탈무드)를 낳았다.
사두개파 - 권력자와 특권자들의 종교분파
사두개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주 부족하다. 그러므로 사두개파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불완전하며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다.
정체성
사두개파는 요한 히르카누스 통치시대 (BC 134-105)년에 등장하는데, 히르카누스는
바리새파보다 사두개파에 더 호의적이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아마도 다윗과 솔로몬을 섬기던 대제사장 사독(왕상1:38-48;
대상16:39)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권력자와 특권자들의 종교적 분파임을 생각하면,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안팎에서
부유한 귀족이나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 안나스가 있다.
물론 모든 제사장이 사두개파였던 것은 아니지만 사두개파는 대체로 부유한 제사장
가문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성전 중심으로 사두개파는 AD 70년까지 하스몬왕조와 로마 통치의 상당 기간 동안
산헤드린을 지배했다, 사두개파는 산헤드린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재판 받을 때
주로 등장한다 (행4:1-4; 5:17,18).
사두개파 사람들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 지배 권력과 협력한 정치적 현실주의자
들이었다. 후기 하스몬 왕들처럼 사두개파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발전시켰다.
아마도 그들의 부아 권력은 좀 더 국제적인 견해를 격려하고 지지한 것 같다.
요세푸스는 사두개파가 평민들에게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평민들은 바리새파의 종교적 가르침과 사회적 태도를 더 선호했다.
가르침
사두개파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요세푸스는 사두개파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강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파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에세네파가 결정론을 주장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사두개파가 바리새파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구두 전승과
성경 해석에 대한 견해였다.
사두개파는 구두 전승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랍비 문학은 특별히 정결법에 대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비록 사두개파가 바리새파보다
더 헬레니즘화되었고 국제적이었다 해도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이었다는
점이다.
최근 예루살렘 발굴을 통해 부유층에서 정결법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귀족 계층의 주택에서 정화 의식용 욕조가 하나 혹은 그 이상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근거지인 성전을 잃자 그들의 영향력도 힘을 잃은 것이다.
그 후 유대교는 한 세대를 풍미했던 사두개파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바리새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사해 두루마리 공동체 (에세네파) - 황무지에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
1948년 쿰란 지역에서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됨에 따라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보다
더 분파적이었던 종파가 세상에 알려졌다.
염해 북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동굴에서 밝견된 두루마리들은 쿰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 종파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공동체는 헤롯 대왕의
통치 기간 때 잠시 중단된 시기를 포함해 BC 150년경부터 AD 68년까지 존속했다.
정체성
쿰란 공동체는 요세푸스와 다른 고전 작가들이 설명한 에세네파와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학자들은 이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생존 시기에 에세네파가 4,000명에 달했으며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가 만든 두루마리들을 조사한 결과 요세푸스가
말한 에세네파와 동일시할 수 없는 점들이 발견되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사해 두루마리를 수집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에세네파였다고 믿는다.
쿰란 공동체는 제사장이 지배하는 계급 제도로 조직되었는데, 하나님과는 물론
서로 간에도 계약을 맺고 살았다.
가르침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은 물론 서로간에도 계약을 맺고 살았다.
사막으로 물러가 살면서 공동체는 성경을 공부했고, 자신들이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제의적이고 윤리적인 정결상태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들은 “어둠의 자식들”을 무찌르는 하나님의 다가올 승리와 결합하기 위해 준비하는
신실한 “빛의 아들들”이었다.
쿰란 공동체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이년 혹은 삼년 동안 시험과 가르침, 훈련을
받아야 했다. 자신의 소유물은 공동체의 것과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공동체의 어떤
의식에도 참여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시험을 통과한 뒤에야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두루마리
쿰란에서 필사하고 연구하던 두루마리들은 염해 연안의 가파른 절벽에 구멍을 뚫고
동굴을 만들어 은신처로 삼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제1차 유대 반란 때 이들은 진압하는 로마 군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두루마리를
숨겨 두었을 것이다.
1948년부터 수많은 두루마리와 두루마리 파편들이 꾸준히 12곳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그것을 사해 두루마리라고 일컫는다.
이중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구약 성경의 가장 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같은 완전한 것도 있고, 단편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구약성경 가운데 에스더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훔과 하박국과 같은 예언서들을 주석한 것이 있는가 하면 공동체의 생활을 규정한 것도
있고, 성경과 다른 유대교 작품도 있다.
이들 사해 두루마리는 성경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유물로서, 아직 완전하게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Early Expansion of the Church
초기 교회의 확장과 로마의 박해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제자들은 먼저 팔레스타인 안에서 다음엔 더 넓은 로마 세계 안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네 명의 로마 황제는 모든 정치 상황을 통제함으로써 초기 교회가 성장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것을 돕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했다.
가이우스 칼리굴라 (AD 37-41년) - 자신을 신격화 하다.
가이우스는 근위병의 도움을 받아 AD 37년 티베리우스로부터 황제 자리를 물러 받았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손자였다.
집권 초기, 그는 원료원의 지지를 받았고, 국고를 이용해 로마 시민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숭배해야 한다고까지 주장에 따라, 헬라주의자들은 유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 칼리굴라 제단을 만들었으며, 칼라굴라는 한술 더 떠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서 아그립바 1세와 시리아의 레가투스(소주 부총독) 페트라니우스는 이 같은
황제의 행동이 유대 사람들의 반란을 부추긴다고 탄원했다.
그러나 칼라굴라는 명령을 완수하라고 강요하다가 명령이 수행되기 전에 로마
근위대에 의해 AD 41년 암살당했다.
클라우디오(AD 41-54년) 네로의 아버지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로마의 원로원은 공화국 체제로 돌아가려 했으나, 로마 근위대가
신속히 움직여 황제의 후계자를 옹립했다.
그들은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오를 선출했다.
그는 황제 자리에 오를 당시만 해도 적임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발을 절었고 연설 중에도 말을 더듬기 일쑤였으므로 클라우디오의 예리한 판단력과
능력이 그를 가장 유능한 통치자로 만들 것이라고는 애견하지 못했다.
클라우디오는 속주를 더욱 강화시켰고 브리톤과 모리타니아를 합병했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는 아그립바의 영토를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구역 못지않게 넓혀주었다.
AD 44년 아그립바가 죽자 클라우디오는 팔레스타인에 그를 대신할 행정관을 파견했다.
한편 클라우디오는 로마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항구 도시 오스티아를 새롭게 건설했다.
이는 로마의 영향력을 다른 지방으로 확장시켜 무역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의 제 1,2차 전도 여행은 클라우디오 제위 때 이루어 졌다.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동요가 일자, 클라우디오가
유대 사람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중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는데,
이들 부부는 이 칙령 때문에 로마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다(행18;1,2)
네로 (54-68년) - 폭군의 대명사가 되다
클라우디오 사후 네로의 등극은 근위대의 지휘 아래 별 다른 갈등없이 이루어졌다.
네로가 등극할 때만 해도 로마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그의 집정 후기에 보였던 광폭함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지도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도움아래 네로는 그를 쥐고
흔들려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건섭에도 불구하고 원로원과 로마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
네로는 예술과 체육을 아주 좋아해 그의 헬레니즘은 이 시기에 표출되었다.
AD 59년 네로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를 도왔던 조언자들을 멀리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폭군이 되어갔다.
AD 64년 7월 19일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는 로마의 많은 것을 앗아 간 사건이기도
했지만, 네로에게는 로마를 더 크게 재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새로운 궁전 “황금 저택”은 호와로움의 축도(縮圖)였다.
네로가 자신의 로마 재건설이라는 꿈을 위해 일부러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네로는 그 비난의 화살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로마 안에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짧지만 강도 높은 박해를 가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로마 관중들에게 볼거리로 제공되어 산 채로 불에 태워졌으며
동물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전해 오는 말로는 바울과 베드로 역시 그 희생자 중 하나라고 한다.
네로는 대화재로 인해 재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들과 직면하게
됐다.
그는 음모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나 이번에는 여러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 사람들은 66년 네로가 그리스에 가있는 동안 반란을 일으켰다.
아프리카, 스페인 , 갈리아에서 67-68년 반란을 일으켰다.
네로는 로마를 도망쳤지만 원로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68년 6월 9일 자살을
해버렸다.
그의 죽음은 100년 동안 로마에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 주었던 클라우디오 왕조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정치 상황
유대 사람들은 칼리굴라가 어리석게도 자신의 동상을 예루살렘에 세우려 할 때
아그립바가 유대 사람을 대표해 중재하고 나서자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칼리굴라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 당했을 때 41년 1월 24일 아그립바가 로마에 있었던
것은 그에게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로마에 내전의 기운이 감돌자 자신의 오랜 친구 클라우디오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데 기여하게 된다.
클라우디오는 제국 동쪽의 각 속주에 왕을 분봉시키는 정책을 따랐다.
클라우디오는 41년 아그립바의 영토를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까지 넓혀주었다.
이제 왕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아그립바는 자신의 삼촌이 전에 지배하던 땅과.
아소도와 얌니아 아마도 아볼로니아, 그리고 안디바드리 해안을 포함한 헤롯의
세 아들이 다스리던 땅을 갖게 되었다.
이제 아그립바는 그이 할아버지 헤롯과 견줄 만한 왕국을 가지게 되었고 로마에서도
헤롯 왕가의 어느 통치자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아그립바와 유대 사람들
헤롯 아그립바는 팔레스타인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정통 유대교 정치를 폈다.
아그립바는 그리스도교 운동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사형하고
베드로를 잡아 가둠으로 해결하고자 했다(행12:1-19).
23절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이와 같이 그는 비 유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는데, 44년 그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정도였다.
아그립바 1세가 죽자, 팔레스타인은 다시 행정관을 통해 두 번째로 고라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클라우디오는 아그립바 1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모든 권한을 주기 바랐으나
그의 조언자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아그립바 2세는 성장하면서 몇몇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르립바 2세 - 헤롯 왕조의 영향력을 이어가다
아그립바 2세는 아버지 아 그립바 1세보다 훨씬 미약하지만 헤롯 왕조의 영향력을
이어 나갔다. 클라우디오는 아그립바 2세를 칼키스의 통치자로 임명한 뒤 나중에
빕립이 분봉 영주로 다스리던 영토를 칼키스와 맞바꿔 준다(53년).
이어 등극한 네로 황제는 아그립바에게 갈릴리, 디베랴, 타리케아에, 아빌라(데가볼리지역),
베레아의 율리우스를 주었다.
아그립바 2세는 로마 황제 앞에서 유대 사람을 대변했으며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나이 많은 누이 버니게와의 관계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바울은 로마 여행전 가이사랴 감옥에 잠시 갇혀 있을 때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변증했다(행25:23-26:32)
혁명의 전조 제2행정관 시대 - 다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다
행정관의 역할
일곱 명의 행정관이나 지방장관들은 클라우디오나 네로에 의해 임명되어 가이사랴에
본부를 두고 유대 지방을 통치했다.
행정관들은 원래 로마의 재정 대리인 으로서 고위 관리직이 되기를 바라는 집단에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군대는 없었으며, 심각한 소요가 발생할 경우 로마에서
파견된 시리아의 레가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다.
행정관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반응
유대 사람들의 로마에 대한 독립의지는 두 번째로 행정관들이 파견되면서 급격히
강해졌다. 드다나 이짚트 사람(행21:38)같이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들이 주기적으로
신성한 중재라는 약속으로 유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포악한 정책과 몇몇 행정관드의 부패는 결국 유대 사람과 로마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행정관 티베리우스 알렉산더(46-48)는 배교한 유대 사람이었다.
타키투스는 안토니우스 벨릭스(52-60)는 “모든 잔혹함과 정욕을 저질렀고,
노예의 본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책망했다.
마지막 두 행정관 아비누스(62-64)와 게시웃 플로루스(64-66)는 더욱 부패하고
아둔했다.
이 시기 갈릴리 사람 유다(행5:37)의 후예 열심당원들은 로마의 통치에 대항해
최전선에서 싸웠다.
두 번째 행정관 치하에서의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두 번째 행정관 통치 기간 동안 박해와 궁핍을 겪었다.
티베리우스 알렉산더 통치 기간에 기근이 유대를 덮쳐서(행11:27-30) 많은 고통을
안겨 준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이 어려운 시기에 놓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기금을 걷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전도에 힘입어
49년에 공의회를 주최했다.
논쟁의 주제는 이방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유대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두 행정관 벨릭스와 베스도를 만났다 (행24:1-25:22)
사도들의 행적과 팔레스타인에서의 복음 진보(행1-11장)
오순절 성령 강림(행2장) 사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성취요 제자들에게는
권능이 복음의 시발점이 되었다.
유대교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교 순례자들이 초기의복음 확장에
씨 뿌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 지도참조.. 사도행전 1-11장까지는 팔레스타인 교회의
최기 성장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 사람의 저항 -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경내아 가정집으로 추정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성
전 관리자들은 이 소식에 놀라 바로 산헤드린에 알렸다.
산헤드린 강경파들은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충고한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협한 이단으로 억압하는 조치를 취했다 (행4,5장).
박해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더욱 굳게했고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행7:54-60) 박해가
더가혹해지자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으며 그곳에서 예수에
대해 증거했다. (행8:1.2).
예루살렘을 넘은 복음의 확산 - 복음의 물결이 유대를 넘어 이방에게로 향하다
유대 사람의 첫 반란 - The First Jewish Revolt
로마통치가 수십년 동안 계속되자 유대 민족주의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는 AD66년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1차 유대 반란은 유대와 팔레스타인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영향력 상실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오랜 기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증폭되어
왔는데 여기서 몇가지 사건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로마의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예루살렘 성전 금궤에서 17달란트를 몰수하려
한 사건이 그 하나였고, 시민권 문제를 놓고 가이사랴 마리티마에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서 길고도 뜨거운 논쟁이 벌러지던 중 네로가 이방사람의 손을
들어 준 것이 다른 하나였다.
마침내 폴발한 유대 반란은 많은 유대 사람들을 가이사랴에서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반란은 도시로도 번져 많은 피를 흘리게했다.
AD66년 6월 대제샂장 엘르아살은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과 황제를 위해 매일
실시하던 제사를 중지시켰다. 이것은 로마에 대항한 반란의 신호였다.
유대 반란군위 저항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리아의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보병과 기병을 갖춘
제12풀미나타군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행군했다.
그는 해변 길을 따라 가리사랴를 거쳐 안디바드리, 룻다, 벧호론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러나 초기에 이루었던 성과와는 달리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한 채
퇴각해야 했다.
로마군은 벧 호론에서 열심 당원에 의해 대패했고, 이것은 유대 반란군들의 자신감을
충전시켰다.
7구역으로 나뉜 반란군은 각각의 구역에 지휘자를 두로 저항을 준비했다.
유대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갈릴리 지방이 군대를 지휘했다.
여러 민족이 썩인 도시들과 아그립바 2세 같은 배타적인 유대 사람들은 이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거나 오히려 막으려고 까지 했으나 이미 번진 불길은 걷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구성된 반란군 지휘자들은 각각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벌써부터 지도부 내에서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때문에 로마에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고, 결국 유대 사람 간의
심한 내분으로 이어졌다.
네로는 반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57세의 베스파시아누스를 내보냈다.
왕족 친위대를 포함한 6만 명 정도의 군대를 소집, 티투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제15 아폴리나리스 군단을 데려왔고, 제10 츠레텐시스 군단은 시리아에서 데리고
왔다. 이 거대한 군대는 로마의 26개군단 중 4분이 1이나 되는 군단이었다.
갈릴리 군사 작전
베스파시아누스는 갈릴리를 상대로 AD67년 봄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갈릴리의 도시와 마을들이 끝까지 잘 저항했지만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이 지역을
정복했다.
세포리스와 많은 도시들은 로마에 대항할 마음이 없어 순순히 항복했다.
그들의 사령관 요세푸스는 항복해 목숨을 구했지만, 요타파타를 지키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싸웠다.
타리케아를 지키던 열심당원들은 한동안 잘 대항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로마군은 욥바와 아소도 같은 주요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해안을 장악했다.
AD68년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고립 작전에 들어가 공략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나
로마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 때문에 이 작전은 와해되고 만다.
로마의 내분
AD 68년 6월, 네로는 자신이 원로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12개월 동안 로마는 왕위를 놓고 권력 다툼을 벌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공략을 미루었지만 파견대는 엠마오와 여리고는 물론
헤브론을 차례로 함락했다.
세 사람 곧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왕위를 놓고 경합하는 사이, 동쪽 군단들은
로마 황제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옹립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AD69, 12월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그를 처형할 때까지 황제 집무실에서 버텄다.
이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중심으로 내분은 종식되었고, 유대 집ㅇ의 반란 진압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복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에게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겼다.
티투스는 가이사랴에서 두 군단을 소집하고 여리고에서 제10군단, 엠마오에서
제5군단과 함세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은 8만 명에 달하는 로마 군인들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피를 달리하는 여러 유대 사람들의 집단들이 성채를 맡아 방어전에 돌입했지만,
5월 말 경에는 이미 북쪽 첫 번째 성벽과 두 번째 성벽이 무너졌다.
7월에 티투스는 탈출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벽을 따로 세우도록 했다.
포위당한 유대 사람들은 굶주림과 내분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마침내 안토니아 요새가 함락됐고, 8월6일에는 성전에서 제사가 끊겼다.
유대력 아빕 월 70년 8월 28일 로마군은 성전을 불태웠다.
다음 달 격렬한 시가전에도 아랑곳 없이 예루살렘 상부와 하부 도시가 모두
로마 사람에게 넘어갔다. 9월말경 로마의 완벽한 승리와 함께 예루살렘 포위도
끝이 났다.
티투스는 성전에서 탈취한 전리품과 살아 남은 유대 사람들을 끌고 다니며
승리를 자축하는 행군을 벌였다. 생존자들은 그 자리에서 로마의 볼거리로 죽어갔다.
아직도 남아 있는 로마 광장에 세워진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촛대와 떡상을 포함한
여러 전리품들을 들고 가는 로마 군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유대 사람의 최후 저항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 후에도 열심당원들은 광야의 요새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AD73년까지 마시다에서 완강하게 버텼다.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는 마사다 공략을 지휘했는데 유대 포로들이
높게 쌓아 올린 경사로는 마사다 요새 꼭대기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 이 되었다.
패배가 확실해지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포함한 960명 정도의
유대 사람들이 항복 대신 자살을 선택했다.
마사다 함락은 앞으로 한동안 일어나지 않을 유대 사람의 무력 저항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열심당원 지지자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다시 한번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에서 로마에 저항하게 되었다.
유대의 반란 결과
제1차 유대 반란은 유대 사람과 그리스도의 사람들 모두에게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유대 지방은 새롭게 등극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아래 전환기를 맞았다.
로마 총독이 로마 군단 지휘를 통해 독자적으로 시리아 영토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군은 팔레스타인에 자리를 잡고 완활한 군사 작전과 군단 주둔지를
잇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유대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성전과 성전이 제사 제도는 사라졌다.
예루살렘은 페허로 변했으며, 로마군 제10군단의 일부가 여전히 주둔해 있었다.
성전이 없어지자 대제사장과 사두개파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오직 바리새파만이 이 난국에 살아남아 AD100년이 되기 직전에 얌니아에서
산헤드린(고대 예루살렘의 최고 재판소)을 재건했다.
유세베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에 펠리로
도망갔다. 그리스도교 지도자에 대한 박해와 기근으로 약해진 예루살렘은
지도부로서의 지위를 복음 전파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그 외 그리스 - 로마의 교회들에 넘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