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 가슴이 시리다
남쪽으로 가지를 몰아놓은 저 졸참나무 북쪽 그늘진 둥치에만 이끼가 무성하다
아가야 아가야 미끄러지지 마라
포대기 끈을 동여매듯 댕댕이 덩굴이 푸른 이끼를 휘감고 있다
저 포대기 끈을 풀어보면 안다, 나무의 남쪽이 더 깊게 파여 있다
햇살만 그득했지 이끼도 없던 허허벌판의 앞가슴 제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덩굴이 지나간 자리가 갈비뼈를 도려낸 듯 오목하다
육필시집『가슴이 시리다』지만지, 2009
결
철물점에 갔다가 톱날 묶음을 보았다 톱니들이 물결처럼 보였다, 손을 대면 물방울이 튀어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톱날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누군들 자르는 일에 몸담고 싶으랴 톱날을 어루만지며, 나는 얼음집에 가면 톱으로 엉킨 물을 푼다고 말했다 믹서의 톱날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이빨을 번뜩이며, 자기는 정말 파도를 닮아서 크게 한 번 출렁이면 천 년 묵은 고목도 순식간이라고 으스댔다 누구나 톱날 하나쯤은 악다물고 살아간다고 내가 아는 실패한 친구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무가 살집을 오므려 비틀어 버리면 너는 토막난 쇳조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녹슬 줄밖에 모르는 불쌍한 말년이 될 뿐이라고 타일러 주었다. 일생 억눌려 사는 바위도 결만 좋으면 구들장이 될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톱날에 껴 있던 파도 한 줄기가 내 마음의 얼음장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시린 철새의 발가락도 보였다 깃털 속으로 햇살 들이쳤다
시집『의자』2006, 문학과지성사
주걱
주걱은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나무라면, 나도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나를 패서 나로 지은 그 벼져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 눈물 흘려보는 것, 참회도 필생의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뜨건 밥풀에 혀가 데어서 하얗게 살갗이 벗겨진 밥주걱으로 늘씬 얻어맞고 싶은 새벽, 지상 최고의 선자(善者)에다 세 치 혀를 댄다, 참회도 밥처럼 식어 딱딱해지거나 쉬어버리기도 하는 것임을, 순백의 나무 한 그루가 내 혓바닥 위에 잔뿌리를 들이민다
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홍어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 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 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이십팔 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 얼음막걸리를 젓는다
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
우리 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시집『정말』 창비, 2010
시인: 이정록의 다른 시들 사진: 성북동 야경/ blue영, Yahoo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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