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무게
김 아가다
1) 갑자기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돌발 상황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라서 적잖이 당황했다. 사고나 심각한 중증으로 응급실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귀가 막혀 응급치료를 받을 줄은 몰랐다.
2)요즘 들어 신체에 많은 변화를 느끼고 있다. 눈이 어두워져서 백내장 수술을 받을 때도 이만큼 충격은 없었다. 퇴행성관절염이라 해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세월 따라 다가오는 신체의 반응이라고 예사롭게 생각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친구에게 노화현상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3) 서서히 들리지 않았다면 충격은 덜 했을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산골이라서 담장이 없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옆집 친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불렀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친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하는데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부터 내 말만 했다. 들리지 않는다고, 내가 이상하다고.
4)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 걸까.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갑자기 눈까지 침침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치료가 되는 약인지, 뭔지도 모르고 상비약으로 두었던 청심환을 마시고 손가락 열 개를 사혈했다. 누워서 한참 있었더니 왕왕거리는 소리가 오른쪽 귀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단어 전달은 되지 않고 요란한 소리만 들렸다.
5) 흔히들 멘붕이라는 말을 한다. 그야말로 정신력이 붕괴된다고 할까. 아득했다. 어떻게 할까? 이럴 수도 있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스피커 폰을 열어놓고 이비인후과 교수인 동생에게 전화했다. 빨리 들어와서 검사를 해야 한단다. 서둘러 입원 준비를 해서 병원으로 갔다.
6) 귀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의사가 뇌종양 검사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MRI 촬영부터 시작했다. 기계 속에 누워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병원 투어가 취미였던 친구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세월 따라 늙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다가오는 노화현상을 붙들고 싶어서일까.
7) 둔탁한 기계음과 심장의 쿵쾅거림을 잊어버리려고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했다. 뇌종양 판정이 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 아파서 서러워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의연해야 하리라. 마치 천상 낙원으로 들어 올림 받는 것처럼 행복하게 웃어야 하리라. 죽음을 준비하려면 수의도 마련해야 하리라. 무채색의 광목으로 드레스 한 벌 만들고, 예쁜 버선에 꽃수를 놓아야지.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가리라.
8) 상상 속을 헤매는데 검사가 끝났다고 했다. 현실로 돌아왔더니 오른쪽 귀가 약간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야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뇌종양은 아니었다. 기계 속에서 잠시 꿨던 꿈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헛웃음이 나왔다.
9) 진료를 받는 순간만큼은 의사가 신이나 다름없기에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병명은 돌발성 난청이었다. 10만 명 중 10명 정도 발생한다는 말에 눈이 둥그레졌다. 내가 누구인가. 별명이 긍정의 아이콘이다. 고로, 귀한 존재인 만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병실에는 나와 같은 병을 앓는 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은 것이 한 달 전이었다. 농사일로 바빠서 미루었더니 회복이 더디다고 했다.
10) 산소 호흡기를 하루에 여덟 번씩 삼십 분 간격으로 뺏다 끼우기를 반복했다. 가령 몸을 나무라고 하면 귀는 가지라고 했다. 가느다란 가지에 영양이 공급되지 않아서 신경이 말라간다는 것이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고 스테로이드를 주사해서 우선 혈관 확장을 해야 한단다. 담당의는 변화하는 상태를 점검하면서 처방을 내리고, 스테로이드 주사는 마취과에서 했다. 급성기 4일쯤 지나자 왼쪽 귀에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1) 의사가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서서히 귀가 어두워지는 사람들은 몸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치료 시기를 놓친다고 했다. 난청에 완치는 없단다. 70%만 받아들이고 살면 된다고 했다. 그나마 소통에는 문제가 없으니 감사할 뿐이다.
12) 열흘이 지나고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친구가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뇌종양 판정을 받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단다. 과잉 진료도 아니고 원인 분석을 위한 표적이 되었으니 억울해할 것도 없다. 뇌종양은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어떤 복병이 나타나 놀라게 할지 아무도 모른다.
13) 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주문처럼 새기면서 생각을 달리했다. 그동안 많은 소리를 듣고 살았다. 들어서 좋은 소리도 있었지만 듣지 말아야 될 소리도 있었다. 좀 덜 들리면 어때, 필요한 소리만 듣고 살라는 몸의 신호를 거역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되물어야 하는 상태가 되면 세상살이가 가볍지는 않으리라. 황혼에 든 여자가 받아들여야 할 긍정의 무게를 저울질해 본다.
첫댓글 작품나눔.감사합니다.
김 아가다 선생님,
별명처럼 긍정의 아이콘이 맞네요.
인생을 통달한 사람 같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느끼게 하네요.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편안하겠군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7번 신경이 마비되었던
지난 날이 떠오릅니다.
위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잘 넘기시는 아가다 선생님의 모습이
글 속 거울에서 훤히 비춥니다.
긍정의 마음이 단단하시니
잘 이겨내셨나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아가다 선생님
갑자기 찾아온 적막에 많이 절망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두려움을 글로 잘 승화하셨네요.
감히 평을 해 보자면
1) 순서를 조금 바꿔서 독자를 잠깐 궁금하게 만들면 어떨까요?
그야말로 돌발 상황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라서 적잖이 당황했다. 갑자기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13) 이런 상황이 오면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여자보다 좀 더 넓은 보편적인 어휘를 선택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황혼에 든 (여자가) 받아들여야 할 긍정의 무게를 저울질해 본다.
사정상 참석할 수 없는 미안함에 흔적 남겨봅니다.
공감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아가다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놀랐겠습니다. 처음 부터 끝까지 마주앉이 듣는 이야기처럼 긴장하며 읽었습니다. '그만해서 다행입니다.' 라고 말할께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참석 못해 죄송하네요.
와~ 노안이나 관절 정도는 늙음의 징표라고 하고 받아들이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침묵 상태라면 많이 당황되겠어요
전 일찌거니 중이염을 앓아 왼쪽 귀가 잘 안들려요. 그러다보니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선생님 글을 읽으니 또 하나의 진리를 깨칩니다
무슨 병이든 초기에 잡자~~
잘 치료 받으셔서 밝은 귀로 돌아오시길요
건강할 때 글을 잘 쓰니까
아플 때도 글을 잘 쓰는가
누가 테스트한 것 같습니다.
아파도 글을 잘 쓰니까
더이상 터치하지 않겠지요.
건강하고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