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선문…개산정신 맥잇기 ‘새기운’
| | 남원/실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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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년 창건…부패 사회에 이상적 삶 제시 선우도량·귀농학교 개설등‘선의 생활화’
화두, 선문답, 선식, 선체조….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선불교용어다. 이처럼 선(禪)은 우리곁에 가까이 와 있지만 선을 올곧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선’을 건강요법이나 신비술 등으로 오용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요즘 선불교가 전래된 최초 가람인 남원 실상산문을 찾아가는 참배객들 가슴이 설레인다.
하안거 결제일(5월 29일) 밤 11시 서울을 출발한 40여명의 참선기행단은 동국제일선원 지리산 칠불암(주지 통광)에 도착, 가부좌를 틀었다. 기행단들의 참선실수는 어제 결제에 들어간 납자들 못지 않게 진지하다.
이어 쌍계사를 참배한 구산선문 참선기행단은 5월 30일 정오 남원 실상사(주지 도법)에 도착했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뻗어 내려온 넓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실상사는 색다른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참선기행단은 화엄학림 강당에 모여 주지 도법스님으로부터 실상산문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한국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실상산문은 혼란스런 사회에 이상적인 삶과 정신을 제시하고 평등이란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이처럼 선불교를 전래한 구법승들은 이론보다 마음의 직관과 일상성을 중시하는 대중적인 수행체계인 선에서 새로운 불교의 생명력을 보았던 것이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국사가 무수무증심인법 (無修無證心印法)을 종지로 개창한 최초의 선종가람이다.
| | 홍척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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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초에는 지실사였으나 산문의 개산조 홍척국사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의 앞머리를 따서 고려 초부터 실상사라고 부르게 됐다.
홍척국사 당시 실상사는 지금의 백장암 터에서 시작됐다. 그후 대중들이 많아지자 제2조사인 수철화상(817~893)이 지금의 실상사 자리로 옮겼다는 설이 전해 온다.
실상사에서 약 8㎞ 떨어지 곳에 위치한 백장암은 창건연대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층석탑(국보 10호)과 석등(보물 40호), 청동은입사향로(보물 420호) 등의 유물만이 역사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실상사의 산내암자로는 17여곳의 암자가 있었으나,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이 현존하고 있다.
실상사는 대표적 평지가람이다. 사천왕문을 통해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경내로 들어서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1천여년이 지난 현재 실상사는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제 위치에 건립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주지스님의 말처럼 단촐하다.
하지만 숙종 26년(1700) 침허조사에 의해 중창된 기록을 보면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수십동이나 즐비하게 자리잡았던 큰 절이었다. 이러한 많은 전각들은 고종 20년(1883) 화재로 요사채와 전각 3동만 남았다.
웅장했던 실상사 규모를 보여주는 한 예로 발굴결과 드러난 황룡사 목탑과 비슷한 규모의 목탑지와 100여평이 넘는 강당지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무엇보다 송광사(26점) 다음으로 많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당대 최고의 걸작품(14점)들을 보면 실상산문의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원주 지산스님은 보광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각 전각들을 소개했다. 지불(紙佛)이 모셔진 보광전을 지나 약사전 철조여래부처님 앞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머리 숙여지는 오랜 신앙의 뿌리를 경험하게 된다. 개산당시 조성된 철제여래좌상(보물 41호)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한동안 두손이 훼손된 채로 봉안돼 왔다. 그러나 87년 복원불사하는 과정에서 철제 손이 발견되었고 이를 토대로 90년대 복원했다.
석조유물이 많은 실상사에는 보광전 앞에 위치한 삼층석탑 (보물 37호)과 석등 (보물 | | 실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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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을 비롯 창건주 증각대사 응료탑(보물 38호)과 탑비(보물 39호),
그의 제자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 33호)과 탑비(보물 34호)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섬세하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 유물속에서 선의 진미를 맛보게 한다. 마치 선승들의 확고부동한 공안처럼. 실상사는 1천여년전 실상산문을 연 선승들의 선향을 머금고 넓은 마당 곳곳에 있는 전각들, 그리고 복원불사로 인해 드러난 속살은 옛 역사를 더듬어 보기 충분하다.
한국선종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상사는 요즘 개산정신을 잇는 불사로 새로운 중흥을 맞고 있다. 백장선원이 선맥을 잇고 있을 뿐 아니라 올바른 승가상의 확립과 승풍진작을 위한 출범한 선우도량, 승가전문교육기관인 화엄학림 개설, 불교생명구원사상 회복을 위한 귀농학교 운영 등이 바로 그것. 실상산문의 과거와 현재의 새로운 중흥이라는 역사적 마당에서 함께 한 기행단들은 구산선문이 복원돼 선이 생활화되길 간절히 기원하며 발길을 옮겼다.
*개산조 홍척국사는 -당 서당문하서 득도- 신라후기의 스님으로 실상산문 개창주. 헌덕왕 때(809~ 825) 당나라로 건너가 혜능선맥 마조의 고제자였던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문하에서 선종의 진리와 법을 전해 받고 깨달아 흥덕왕 1년(826년)에 귀국했다.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의 비문에서 “북산에는 도의(道義)요. 남악에는 홍척(洪陟)”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홍척보다 5년 앞서 821년(헌덕왕 13년)에 귀국한 도의는 설악산을 근거로 하여 신라의 북방에서 선법을 펴고 있었고, 홍척은 남쪽인 지리산에 자리잡고 활동하였다.
도의와 더불어 당시 남북을 대표하는 고승이었으며 우리나라 선불교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828년 지리산 실상사를 창건하였는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경덕전등록> 권 11에 의하면 그의 법통을 이은 이로 흥덕대왕과 선강태자가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왕족의 귀의를 받아 선풍을 크게 날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하에는 편운(片雲)·수철(秀徹)스님 등 제자가 1천여명이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