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의 외국 이민(移民)은 공식적으로 1902년에 102명이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것이 처음이라고 기록에 나온다. 이것을 주선한 사람이 당시 주한 미국공사(美國公使) 알렌이며 하와이 주지사(州知事)와 고종(高宗)을 설득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정식으로 응모자를 모집했고 대우도 괜찮았다지만 실지로 현지에서 이민자들을 받아 운영한 것은 관(官)이 아니고 민간 기업(주로 사탕수수 농장)이었기에 사정은 달랐던 것 같다. 폭염과 긴 노동시간 등으로 그야말로 노예 같은 피와 땀으로 범벅된 삶이었던 모양이다.
하와이에서 외국 이민 노동자 사업의 확대로 이어진 것이 큐바와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로의 이민이었다. 멕시코는 입항할 기회가 없었지만, 큐바에서는 한인(韓人) 이민 3세 아가씨를 내가 직접 만난 적이 있었는데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얼굴에서 약간의 모습은 읽을 수 있었고 본인도 그렇다고 인정을 했다. 손이라도 덥썩 잡을 만큼의 감동이었다. 만일 큐바가 아니고 미국이었다면 이 아가씨의 운명은 한참이나 달라졌을 거라는 상상도 가능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민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American Dream’이란 말이 생길만큼 유행했었고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 많이 나갔다.
내 자신도 승선 중 인도인 Mr. Tikam이란 사업가의 제의로 그의 파트너가 되어 대서양의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諸島)의 라스팔마스나 아프리카 나이제리아 주재원으로 함께 일할 수 없겠냐고 제의했기에 한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때 응했다면 지금쯤 거의 그곳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조선 MV Royal Lily호
1979년 5월, 일본과 미국의 구상무역(求償貿易) 조건에 따라 미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하게 된 것이 플로리다산 Grape fruit(우리는 ‘자몽’ 이라함)를 운송할 때의 이야기다. 일본은 자국산 자동차를 년간 수백 만 대씩을 팔면서 미국에서 사오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이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구상무역이었지만 막상 일본이 미국에서 수입할 만한 공산품이 없었던 실정이었다. 알라스카에 냉장고를 수출하고, 미국 서민의 안방과 주부들의 평균 사이즈를 일본 전자제품회사들이 자기네들 것처럼 훤히 꿰고 있다는 얘기들이 나돌기도 한 때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수입하기로 한 것이 농산물이었다.
전 세계에서 자몽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은 미국 플로리다주이다. 다른 원산지의 자몽보다 껍질이 얇고 속은 과즙으로 꽉 차 있다. 자르는 순간 과즙이 뚝뚝 떨어진다. 고온 다습하고 일교차가 크며 햇살과 강우량이 풍부한 플로리다의 특수한 기후 덕분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살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당시 본 싱싱하고 탄탄한 것들은 보기 힘들다.
이 자몽의 생산지가 미국 플로리다주인 데다 처음으로 수출하는 일이라 플로리다에서는 별도의 수출항을 Fort Pierce이란 조그만 시골 포구(浦口)를 급조(急造), 8,000톤 운반선 한 척이 겨우 접안 할 수 있게 했다. 수심(水深)이 얕아 작업 중 선저(船底)가 바닥에 부딪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부분의 상세는 졸저 ‘항해일지’ 79년 2월, Royal Lily호의 처녀출항에서 적은 바 있다.
유명한 미국의 항공우주기지인 Cape Canaveral이 멀지 않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Beach들이 즐비한 플로리다 반도의 동쪽이다. 환상적인 곳이다. 조금 아래쪽인 유명한 마이아미(Miami)가 있다.
지방 신문이나 TV에 보도된 때문인지 인근에 사는 교포들도 찾아왔다. 아마도 ‘American Dream’을 따라 건너온 분들인 듯 했다. 오랜만에 현지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동포를 만나서 그런지 이민 초장기 시절의 얘기들을 쉽게, 속시원하게 풀어 놓았다.
플로리다주 Fort Pierce 항
인천 출신의 김(金) 씨란 분과 Mr. 한(韓)의 사연을 적어보기로 한다.
7년을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이 일했다는 김 씨. 코카콜라에 중독이 돼 몸이 마치 나무가지처럼 말랐다. 먼저 온 누님의 권유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먹고 살길이 있다기에 선뜻 나섰던 이민길이었다고 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가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결심 하나 가지고 갖 결혼한 마누라와 같이 왔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선 말과 글에서부터 꽉 막힌 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일부분에 불과했다. 삶의 사방이 절벽같이 막혔더라고 했다.
거기에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들이 비교적 많고 수준도 낮은 편인데, 소위 그들의 ‘밥’이 된 것이다. 같은 백인들에게는 못할 온갖 불평과 텃새를 몸집이 자그마한 하여 만만하게 보인 동양계 사람들에게다 퍼부은 탓이랬다. 더구나 당시는 미국 동남부의 플로리다주에는 우리 동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흑인 노동자들 속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오직 힘을 잃지 않았던 것은 애들의 장래였다. 다행히 보육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안심하고 낳고 키우며 맡기고 내외가 일할 수 있어 힘든 줄을 몰랐다.
꾸준히 쌓아온 그들의 땀과 열성의 결과가 겨우 나타날 때 쯤, 말도 제대로 못할 때 유치원에 보냈던 애들의 미국식 교육의 결과가 청천에 날벼락 같았다.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의 근본이 효(孝)라고 배웠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우리네 관습이고 사고방식이었기에 부모나 어른이 시키면 “예”하고 따르는 것이 마땅한데,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된 건지, 겨우 걸음마를 하는 주제에도 제 마음에 안 들면 사정없이 “No”하고 거절하고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고 대드는 데 사람 미치고 환장하겠더란다.
어른의 개념을 잃어버린, 겉만 내 자식이지 속은 완전한 미국애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녀석들이 자라면 지금 이곳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볼 상 사나운’ 미국 애들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장래의 희망도 무너졌다는 실망감에 빠져 낙(樂)을 잃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좀 편하게 쓰기 위해 약식(略式)이름으로 ‘단’이란 이름을 썼는데, 그것이 미국 이름인데 왜 한국인인 당신이 쓰느냐고 흑인들에게 텃세를 받자, 하도 화가 나서 “야, 너희 역사가 몇 년이냐? 200년이지, 한국의 역사는 4000년이야, 임마! 그런데 우리의 최초 조상(祖上) 이름이 뭔지 알아. 단군(檀君)이야 ‘단’이단 말이야. 그때부터 우리가 쓰던 이름이야!”하고 항변하여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는 얘기는 웃음이 나기보다 처절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1핵터 정도의 Grape Fruit(자몽) 농장을 소유하고 손수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하기도 하며, 한국의 ‘도지’ 개념을 이용하여 과일이 달린 밭 채로 사서 정한 기간까지 수시로 출하함으로 항상 싱싱한 과일을 공급할 수 있어 인기를 얻었단다. 밭 임자가 다음 농사를 위해서 빨리 따라고 했으나 아직 임대기간이 남았다고 계약서를 내보이자 꼼짝 못하더라고 감탄했다. 역시 법치 질서가 엄연히 살아 있다고 좋아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불편한 점도 많다고 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집의 일부가 파손되어 수리를 해야 하는데 이곳의 규정이 전기·수도·가스 등은 반드시 ‘면허를 가진 기술자’가 아니면 안 되며 이것을 어길 경우 소정의 벌금을 내야 하도록 되어 있단다. 그렇다고 기다리자면 언제 가능할는지…. 고심 끝에 벌금을 물 작정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속시원하게 수리하고 신고했더니 확인 후 벌금이 부과됐는데, 알고 보니 면허를 가진 기술자에 의한 수리비보다 싸게 먹힌다는 것을 알고는 “옳커니!” 하고 요령껏 살아왔다고 했다.
많은 감동을 준 얘기였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에서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살면서도 그 힘을 집결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땀의 대가를 철저히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분명히 한 시간 일한 사람보다 두 시간 일한 사람이 수입이 많음을 보장해주는 사회정의와 법질서. 게으르고 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보상이 없는 철저한 의식이 참으로 중요함을 몸소 느낀 것이다.
Fort Pierce항의 위치(빨간 원으로 표시된 곳)
또 다른 교포 Mr. 한(韓), 그는 젊은 청년이었다. 배에 있지 말고 바람 쏘이러 가자고 한다. 자기 차로 시원한 밤의 해변길을 신나게 달렸다. 한국에서는 최고라는 해운대 해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Fort Pierce항 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웨스트팜비치(West Palm Beach)라는 곳이랬지만 밤이라 주위의 풍경은 가로등과 휘황찬란한 도심의 불빛 이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Joker Wilde’란 선술집(?)에 들렀다. 그야말로 외국 냄새가 뭉클한 곳. 각국의 선원들은 물론 이곳 한량(閑良)들이 모이는 곳인 듯하다. 흔히 영화에서 보듯 한쪽엔 당구대도 Jukebox도 있다.
자욱한 담배 연기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걸 느낄 수 있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카운터에서 맥주 한 잔씩을 청해 높이 들고는 ‘Fort Pierce항에 입항한 Royal Lily호의 Captain’이라고 소리치자, 먼저 술병 나르던 웨이터들이 ‘야호’하며 환영을 한다. 인사를 마친 셈인 듯 했다.
가운데 긴 곡선형의 테이블, 각양각색의 스팟트라이트가 명멸하는 그 위에서 각기 색다른 차림의 아가씨들이 차례로 올라와 나름대로의 특기인듯한 스트립쇼를 벌인다. 휙~ 하고 휘파람을 불면 웨이터 아가씨가 오고 위스키나 맥주를 주문하면 바로 갖다 준다. 고객의 턱 아래까지 오는 높이의 테이블 가에 죽 둘러앉은 고객들!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서 중요한 그곳(?)이 보일 듯 말 듯한 차림으로 벌어지는 육감적이면서 뱀처럼 꼬기도 하는 쇼에 너나 없이 얼이 빠진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으면 휘파람이나 큰 소리로 ‘야호’도 외치고 박수도 친다.
Mr. 한도 그 중의 하나다. 술병 밑에 1$짜리를 몇 장 꽂아두고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쇼를 하는 도중 한 장을 빼서 들고 신호를 보내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뽀뽀를 한 번 하고는 1달러를 살짝 빼서 젖 가리게 속에 찔러 넣고 한 눈만 찡끗하고는 다음 동작으로 넘어간다.
‘하하! 그렇구나, 나도 한 번 해볼까나…’ 하는 욕심이 솟는다. 1$를 한 손에 들고 그래도 좀 체구가 작고 하얀 아가씨를 기다렸다. 이제 두 사람만 더 거치면 내 차례라 가슴 두근거리는데 하필이면 삽살개처럼 얼굴이 온통 수염투성이라 눈과 코끝만 보이는 바로 앞의 녀석이 갑자기 1달러짜리를 내미는 통에 놓쳤다. 아니 놓친 것이 아니고 아무래도 그 녀석 다음에 뽀뽀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그의 입가에 뭔가가 묻었을 거라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Mr. 한. 차림새도 전형적인 미국식. 뭘 하고 어떻게 사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제 마음대로 즐겁게 사는 듯한 눈치. 아마도 이런 곳에 혼자 오기는 뭣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데리고 와선 제 마음껏 즐기는 듯 했다. 서구(西歐) 문명국에서 자국(自國) 항구에 입항한 선박의 선장이라면 이런 곳에서도 함부로 막 대하지는 않으며 은연중 보호와 존경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걸 이용한 듯도 하다. 아무튼 그의 자유분망함 속에서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첫댓글 넉점이 서완수 논픽션 작가님
많은 카페 회원 동문님들이 선장님의 이역 만리 미국의 낯선 이야기를 흥미를 가지고 읽었을 것 같은데 댓글이 없어 아쉽습니다.
로타리 클럽 회원 이야기도 회비는 물론이고 기부금도 내야 하니 경험이 없어 저와 같이 소감을 적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이 용기나 재력이 없어 경험하지 못 한 로타리 클럽 회원이나 선장의 경험을 하시고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시고 지금도 회고록을 쓰고 계시니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저도 직장 생활을 했으나 일기 같은 것을 적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자서전을 쓸 의향은 없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슴다. 꼭 댓글 바라고 쓰는 것은 아니니까요. 처음부터 일기를 쓸 생각은 없었지요.
그게 당해보니 '아! 이건 내 자신을 위해서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불쑥 밀려와 쓰던 강의록 쪽지에
메모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요. 로타리클럽 시절의 희비도 언젠가는 쓰얄낀데, 틈을 봅니다.
이게 모이면 간단히 편집하면 회고록이 됨다. 한글 워드야 1급이니 따로 돈들 일은 없을거고요.
님도 한 번 시도해보세요.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고 외람되지먄 게을러서? ㅎㅎㅎ. 죄송함다. 부산넘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2.08 10:0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2.08 20:55
국민학교 3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일기를 쓰라고 해서 썼더니 학년말에 우등상과 문예상을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에 쓰다가 결혼 후에
중단했습니다. 선배님의 권유를 유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산 노승렬
늑점이 님이 통이큰 사람 인것이 넓은 바다를 세계를 많이 체험한 때문임을 세삼 느끼고 있어요!
선생님만 한 우물안 개구리들은 마음 자리가 좁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어쩨 눈앞만 보다 떠밀려 나온 것이 계속 떠밀려 다니다 만 것이 되었음다.
바다가 넓을 수록 그 위를 떠다니는 넘들의 마음은 바늘구멍보다 더 좁지요. 고맙소. 건강하소. 보고 잡소.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