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문사 답사
◇ 용문사(龍門寺) :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번지(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 신라 때 창건된 조계종 사찰로 천연기념물 1,100년의 은행나무 고목이 유명하다
용문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용문산은 미지산(彌智山)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때 913년(신덕왕 2)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649년(진덕여왕 3)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道詵)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며, 또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1378년(우왕 4년)에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우왕이 원각(願刻)한 대장경판을 이곳에 옮겨와 세 칸의 대장전(大藏殿)을 지어 봉안했으며, 1395년(태조 4)에 조안(祖眼)이 중창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沈氏)를 위하여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뒤 이듬해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수양대군은 이 법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중에 불사리(佛舍利)의 방광을 목격하고, 이 절을 원찰(願刹)로 삼았으며, 1457년(세조 3) 퇴락한 법당과 승방(僧房)을 중수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처안(處安)이 중수하였으며, 1890년(고종 30) 봉성(鳳城)이 신정왕후 조씨[趙大妃]의 외호를 받아 중창하였고, 1893년에도 한 차례 중창하였다.
1907년 의병 봉기 때에 모든 건물이 불타자 취운(翠雲)이 큰방을 중건하였고, 일제 때인 1938년 주지 홍태욱(洪泰旭)이 대웅전·어실각(御室閣)·칠성각·기념각·요사채 등을 복구하였다. 6·25전쟁 때 용문산전투로 다시 불에 탔으나 1958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 뒤 1983년 지장전·범종각·일주문 일부를 중수했고, 관음전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그 중 지장전은 1994년에 완공되었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전·지장전·관음전·삼성각·종각·요사채·일주문(一柱門) 등이 있으며, 옛 절터에는 주춧돌이 산재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정지국사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석이 있으며, 산신각 동쪽에는 부도 5기가 있다.
이 밖에 이 절 앞에는 수령이 1,100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또한 이 절에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된 양평용문사금동관음보살좌상(楊平龍門寺金銅觀音菩薩坐像)이 있다.
▷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正智國師浮屠)와 비(碑) : 보물 제531호
용문사 경내에서 약 300m 거리에는 고려말의 정지국사의 부도(浮屠)가 있고, 이곳에서 약 80m 가량되는 곳에는 그의 비(碑)가 있다. .
정지국사 비(碑)는 장방형(長方形), 대석(臺石) 위에 개석(蓋石)없이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상단 좌,우를 귀접이 하였다.
정지국사 부도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원형이며, 그 위가 8각형(八角形)의 평면이나 팔각원당형(八角圓當形)의 기본형을 따른 것이다.
이 부도는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정지국사 비(碑)는 조선초 1398년(태조 7)에 당시 유학자이며, 명신(名臣)이었던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글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정지국사 부도는 상륜부가 거의 상실된 것만 제외하면 기단(基壇)과 탑신(塔身) 그리고 옥개(屋蓋)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 양식은 통일신라 말~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으나 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화려하고 세련된 작품은 아니나 단아한 기품을 지닌 조선 초기의 부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지국사 비문(碑文)에 따르면 이 부도는 정지국사가 별세한 뒤 3년이 지난 1398년(조선 태조7)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도의 현재 높이는 215cm이다.
▷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楊平龍門寺金銅觀音菩薩坐像)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용문사 관음보살좌상은 14세기 경 관음전에 모셔진 관음보살로, 청동으로 만든 뒤 금칠을 하였다.
원래 관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용문사 관음보살좌상은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 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용문사 관음보살좌상은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의 소매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만들면서 양 무릎을 덮고 있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 보살상의 양식을 볼 수 있다.
▷ 용문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62m, 가슴높이 둘레 14m의 용문사 은행나무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 퍼져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근거는 용문사의 창건연대와 관련하여 산출하고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묘목을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이다. 조선초 세종 때 이 은행나무에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이 내려졌다고 하며, 용문사 부근의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즉, 옛날에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 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조선말 1907년 정미(丁未)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밖에 1919년에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은행나무 큰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때에도 은행나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