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san UBF 2017년 7월 30일 주일메세지
겨자씨 만한 믿음
말씀 : 누가복음 17:1-19
요절 : 누가복음 17: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나의 삶을 늘 동행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모임과 절차와 프로그램을 통하여 하나님께 임재하심을 깊이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Asan ubf
Part 1. 용서하라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영어성경에는 "are bound to come" "일어나게 되어 있다" "생기게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족이란 가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족은 믿음의 길,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생명을 구원하러 오셨으므로 그 뜻을 따라 우리도 많은 사람이 구원의 길을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실제 이 땅에서는 그와 반대로 믿음의 길을 가던 형제가 죄에 빠지게 하거나, 불신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무서운 책임이 뒤따르는 일인지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Asan ubf
2절을 보십시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나님의 뜻은 한 생명이라도 실족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 귀한 생명을 실족케 하는 일은 매우 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적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지만, 자비와 긍휼이 구약 성경에 가득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권위’와 ‘권위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듯이 유대인들은 ‘율법’과 ‘율법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보면 유대인들은 크리스천이 된 후에도 까다롭습니다. 이방인 크리스천과 식사하는 문제, 목자 디모데의 할례문제, 교회에서 여자들을 세우는 문제,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먹지 않을 것인지 유대인들은 예수님 믿은 후에도 가리는 것 많고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자세, 딱딱하고 경직된 모습은 믿음 어린 사람들에게 큰 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한 죄인에 대한 용서와 관용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모습도 이해와 관용 없는 연장입니다. 문제가 있으니까 가난하겠지! 죄를 지었으니까 물질축복을 못받은 것이겠지! 부자 유대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도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관용과 자비가 결여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Asan ubf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묵인하지 말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가 죄를 인정하고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면 기꺼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 레위와 삭개오 그리고 그와 함께 지난 죄악된 삶을 죄로 깨닫고 회개한 세리들이 유대인들의 정죄와 판단 앞에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겠습니까! 용서를 모르는 유대인들로 인하여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영혼들이 상처 입었을 것입니다. Asan ubf
예수님의 제자는 유대인과 같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때 경고하고 형제가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조건 없이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잊어주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그를 다시 믿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의 과거를 들추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배우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하루에 세 번 용서하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도 큰맘 먹고 세 번 용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쳐 주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용서는 한계를 넘어서는 용서입니다. 인간의 기준과 한계에 상관없이 감당하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하여 용서하는 생활을 할 때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Asan ubf
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특히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방향은 그들의 상식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제자들은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믿음을 가져야 말씀하신 바를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절"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는 매우 작습니다. 아주 작은 씨 임에도 불구하고 겨자씨에는 생명이 깃들여 있습니다. 큰 믿음이 아니라 작더라도 살아있는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있다면 뿌리가 견고하여 잘 뽑히지 않는 뽕나무가 거뜬히 뽑혀나는 역사를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다에 심기우는 불가능한 역사도 능히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17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작더라도 살아 있는 믿음,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역사에 남을 위대한 용서를 그릴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곁에 있는 형제 한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Asan ubf
7,8절을 보십시오. 말씀에 기록된 종은 사실 유익한 종입니다. 그는 밭에서 땀흘려 밭을 갈았습니다. 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일 많이 하였다며 밥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있는 주인을 위하여 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밥먹다가 손씻고 밥 먹다가 손씻고 부산합니다. 따라서 종은 주인의 밥을 차려주고 곁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밥을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하인에게 고맙다 수고했다 말 한마디 해주지 않습니다. 종은 그런 모든 일을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하는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말씀에 나온 이 종이 주인에게 많은 유익한 일을 하고도 무익한 종으로 살아가듯이 사도들이 종의 자세를 가지면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직장을 버렸습니다. 가족도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길에서도 잤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음식을 구해왔습니다. 마실 것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수많은 백성들을 같이 섬겼습니다. 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한 일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Asan ubf
차라리 몸이 고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감당 하겠는데, 매일 무한대로 용서하며 살라니! 그것 만큼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감당 하려니 부담이 오고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리더라고 하며 나대는 베드로,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찔러대는 요한, 이기심 극강인 마태가 그동안 해온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딱딱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헌신을 하고 믿음 좋은 것처럼 행세 하였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물질적인 헌신, 몸으로 감당하는 것 뿐 아니라 마음과 인격으로 감당해야 하는 희생과 인내를 앞으로 감당하여야 한다니! 그들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인지 하였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이와 같이 많이 헌신하고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일 많이 하고 헌신 많이 하는 사람은 때때로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동안 해온 헌신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칭찬과 인정을 더 많이 받고 싶고, ‘너 이거 더 해야 한다’. ‘너 저것도 해야 한다’ 이런 얘기는 어렵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많이 섬긴 사람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더 많은 법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다지 큰 일 맡기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많이 헌신하고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일 많이 해놓고 어려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종의 자세’를 가지면 크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많이 섬기고도 더 은혜로울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자신을 위대하게 하고 이웃들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Asan ubf
Part 2. 아홉은 어디 있느냐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일행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 나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열 명이 힘을 합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열 명이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율법에는 나병이 발병하였을 때 영문 밖에 격리하도록 하였고, 나병이 나았을 때 제사장들에게 가서 병 나았음을 확인 받은 후 사회에 복귀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병이 전염될 수 있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보다 나병이 낫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먼저 제사장들에게 가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 방향에는 믿음이 필요하였습니다. 열 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의 방향에 따랐습니다. 그랬을 때 가는 도중에 나병이 깨끗이 낫는 신기한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Asan ubf
나음 받은 열 명의 나환자들중 아홉 명은 고향땅 가족,친지들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그들 중에 한 명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감사하러 돌아왔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는 나병에서 벗어나 기쁘기 그지 없었지만, 그 기쁨 가운데서도 자신을 나병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유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님께 나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가버린 아홉 명의 병자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병고친 것에만 기뻐하고 병고침을 주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사람이 병에서 벗어났다 해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얻었다 해도 그 인생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서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과 해방입니다. 아홉 명의 병자들은 병고침 받은 것으로 자족하느라 아쉽게도 예수님의 온전한 구원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Asan ubf
1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병고침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질병을 낫게 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에게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는 질병에서 벗어 났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덧입어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예민해지는 증상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도로에서는 보복운전이 급증하였습니다. 사회 문제로 인식되어서 2016년부터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에 대한 처벌 조항이 강화된 도로교통법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최고 7년 이하의 징역,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의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17년 7월30일 오늘부로 모 국회의원은 ‘데이트폭력 방지법’을 발의합니다. 데이트폭력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심각한 것은 이별통보에 앙심 품고 보복하는 것입니다. 보복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으로 ‘리벤지 포르노’가 있고 ‘살인’까지 가는 경우가 늘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로 인하여 이 법안이 마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Asan ubf
2천년 전, 유대인들만 까다롭고 예민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시대도 이해와 용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용서가 힘든 이유중의 하나는 ‘용서하면 저 사람이 복을 받고 나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저 사람은 죄도 짓고 자기 유익도 얻었는데, 내가 용서해주어서 결국 나쁜 놈이 모든 것을 얻는다’는 피해의식입니다.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기 어렵다면, 믿음으로 용서해 볼 일입니다. 용서하면 용서 받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고 용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용서할 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죄인들을 오래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Asan ubf
종의 자세를 가지는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섬김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섬기셨습니다. 많은 병자를 섬겨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결국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문제를 섬겨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고난을 받으시며 죄인들을 섬겨 주시고 십자가에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내주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주실 것을 확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의 자세를 가질 만큼 위대한 내면성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했다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일할 때 누가 나좀 도와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고도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예수님처럼 부활 영광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감사 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감사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
Asan ubf
결론적으로 믿음 없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정죄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린 영혼들은 실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와 관용을 배우지 못하고 보복하고 분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조금 일한 후 불평하고 어려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며 형제를 용서하고 많은 일을 하고도 무익한 종일 뿐이라 여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용서하고 겸손하고 감사할 때, 복은 나의 것이 됩니다. 용서하고 겸허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하늘의 기쁨, 하늘의 은혜, 하늘의 축복을 가득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쁨과 은혜와 감격이 가득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Asan ubf
Asan UBF 여름방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