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9일 주일대예배 설교문 / 마 20:17-34 / 예수님의 섬김의 도를 본받아서
할렐루야!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합니다.
신앙이란 독수리 날개치며 하늘을 오르듯 하늘의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삶이 영적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되씹고 곱씹는 마음으로 다음의 구절을 묵상합시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요한복음 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다면 영으로 살고, 영을 추구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내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이렇게 나의 보좌를 예수님께서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세상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당신과 나는 길벗입니다.
우리 모두다 이 영의 길에서, 이 진리의 길에서 한 사람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영원한 저 천성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문제는 이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동반자들이 같이 손잡고 가지만 자꾸 떨어져나가고 탕자처럼 다른 길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영의 삶으로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계인 혼의 세계로 퇴행하고 있을까? 이유는 무엇보다 세상에서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 이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세베대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고요 어머니는 살로메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여동생입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외사촌지간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모되는 살로메가 예수님께 와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의 외사촌인 야고보와 요한을 높은 자리에 올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보고나니 뭔가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분명 예수님 유대의 왕이 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기 아들을 높은 자리에 있게 해달라라고 미리 부탁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본성은 일단 내가 높아져야 하고, 대우를 받아야 하고, 승부욕이 있어 상대방을 이겨야 속이 시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니 왜 선악과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일단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더 크게 원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의 기준이 인간에게 있어서 항상 사람들은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나는 남에게 선악을 판단받고 남도 나를 선악으로 판단하고... 아주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라고 하시니 더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명령을 들으면 내가 너무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어기면 동등하거나 더 높아지는 것 같은 것이거든요... 이때 뱀이 간교하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건드립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 그래 선악과를 먹습니까? 안 먹습니까? 당연히 먹지요. 인간은 높은 데 올라가야 직성이 풀린다니까요!
여러분, 이 세상의 많은 비극들이 바로 이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하다 보니 결국 불화하고 가정이 붕괴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은 맨날 싸웁니다. 왜 싸우죠? 남보다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사는 것은 바로 이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높아지려고 하기보다 낮아지려고 하고,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려하고, 대우를 받기보다 남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기대하는 것은 높은 자리. 그러나 예수님은 더 더 낮은 자리. 목숨까지 내 놓으시면서 내가 섬기겠으니 너희도 섬겨라.
사랑하는 여러분, 섬김. 이것이 영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섬기셨을까? 33살 세상에서 사실 때 섬김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 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동물은 약 150만 종류가 된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종류 중 사람처럼 발만을 사용해서 이동하고 손으로 문화를 이루어가는 동물은 없답니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직립의 자세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손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구분이 손에 있다면 그 가치도 손에 있습니다.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영적인 걸음을 걷는 영의 삶을 살아야 하고요, 손은 수고하여 섬겨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의 흥망성쇠가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손을 통하여 승리하고 성공한 경우도 있고 망한 경우도 있습니다.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도 하고, 손으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범죄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귀한 손을 주셨지만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는 사람이 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33년을 계시면서 30년은 가족을 돌보셨고, 나머지 3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손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각색 병든 사람, 나면서부터 맹인이었거나 못 걷는 사람, 귀신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 등등. 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왔지만 짜증 한번 내는 일이 없이 봉사의 손을 펴서 도와주었습니다.
3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맹인들의 눈을 어루만지시면서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눈높이는 항상 아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만져주시고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맹인의 눈이 떠졌습니다.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왔을 때도 핀잔주지 않고 그 바구니에 손을 직접 넣으셔서 꺼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섬기려면 무엇보다 이 두 손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픈 환자가 있습니까? 내 손으로 직접 섬겨보세요. 그러면 질병도 고쳐질 줄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 손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시원하게 대접해보세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큰 힘은 무릎에서 나옵니다. 무릎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쁠수록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기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 영이 잘되어야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소는 뿔이 있는 머리에 힘이 있습니다. 말은 잘 달리는 다리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하는 무릎에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 많이 다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한다고 사람 많이 다니는 데는 가지 말라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사람 숫자가 많으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사람이 없으면 나쁜 교회가 되는 것 아닙니다. 어떤 부모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큰 교회를 다닌답니다. 자기 아이가 AHDH 행동장애라는 것이지요. 그럼 아이들 많이 다니는 교회 다니면 애가 좋아질까요?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만나는 아이들 때문에 아이의 병이 낫습니까? 교회 다니는 아이들 많이 만나서 함께 있으면 애들이 좋아집니까? 사람 볼 데가 없어서 사람 많은 데 보려고 교회 갑니까? 왜 이렇게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에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예배드리고 산책도 함께 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게 정상 아닐까요? 부모의 무릎을 아이들이 보면 아이들이 저절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은 세상도 섬기려고 온갖 애를 씁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유망한 직종이 사회복지나 상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짜 섬김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는 섬김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하는 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무릎으로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 목숨으로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목숨 다해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같이 너희도 죽어라.” 본문의 뜻은 이 말씀이 아닐까요?
다른 말로 십자가에 죽는 마음으로, 생명 다해, 진심으로 섬겨라 이런 말씀입니다.
ex1) 소설 최범선의 [피해자] - 주인공 최요한의 아버지 최장로는 평양에서 유명한 고아원의 원장. 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평양의 성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최요한도 고아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중 고아 명숙을 사랑하고 결혼하려고 아버지에게 청원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고아를 돌본 것은 고아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고아와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명숙은 이에 좌절을 느끼고 자살을 시도하다 술집 접대부가 되었다는 내용.
고아를 섬겼으나 진심으로 생명다해 고아를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목이 [피해자]. 교인이랍시고 섬긴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심을 다해,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오히려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노인 복지, 장애인 복지, 어린이 복지 사업을 하는 사람들. 왜 할까요? 장애인이 좋아서, 노인이 좋아서? 다들 돈이 되니까 하는 것 아닙니까?
요즘 마스크가 없어서 못 판대요. 그러니까 길에서 주운 다 써 버린 마스크를 씻어서 다시 판답니다. 뭐 어쩌라는 것입니까? 그러니 요즘은 세상 사람들이 말세라고 합니다. 돈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상처를 어루만지시면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릎으로 섬기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셨지만 누구보다 무릎으로 기도하시면서 백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으로 섬기셨습니다. 생명 다해, 진심 다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망하셨습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살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세주요 왕중왕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혼의 세계가 아닌 예수님의 섬김의 도를 본받아서 세상을 손으로, 무릎으로, 목숨으로 섬겨서 영적 승리를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동문교회 강순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