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영국제 복엽기 ‘금강호’로 우리나라 하늘 처음 날았어요
안창남
지난 2020년 우리나라 항공 산업의 역사와 미래를 보여주는 국립항공박물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개관했어요. 전시물 중엔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우리나라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인 안창남(1900~1930) 의 '금강호'가 실물 크기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답니다. 그렇다면 금강호와 안창남에 대해 더 알아볼까요?
◇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일제강점기인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어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허허벌판에 5만여 명이나 되는 인파가 모여든 건 조선인 비행사가 조종하는 비행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지요. "떴다! 떴다!" "와!" "대단해!" 젊은 조선인 조종사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해 하늘 높이 치솟자, 구경꾼들의 함성과 박수가 한강 주변에 메아리쳤습니다.
비행기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 뒤 남산을 돌아 남대문과 창덕궁, 독립문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했답니다. 이날 서울 하늘을 훨훨 난 비행기는 '금강호'였어요.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 소속의 영국제 뉴포트 단발복엽(엔진이 하나만 있고 두 장의 날개가 아래위로 달려있음) 1인승 비행기였지요. 비행사의 이름은 안창남이었습니다.
수많은 조선인이 안창남의 첫 비행에 열광했어요. 그 뒤로 '청춘가'라는 민요에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고 가사를 바꿔 노래를 부르는 게 유행했지요. 엄복동(1892~1951)은 자전거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기술을 익혀 1913년과 192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출전해 수많은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한 영웅 같은 인물이랍니다.
◇ 일본인을 제치고 우승을 거두다
우리나라에 비행기가 등장한 건 1913년입니다. 서울 용산의 조선군 연병장에서 일본인 군인이 공개 비행 행사를 펼친 것을 시작으로 1917년엔 미국의 민간 비행사인 아트 스미스가 수만 인파가 보는 앞에서 멋진 곡예비행을 펼쳤습니다. 당시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구경하던 사람 중엔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 학생이던 열일곱 소년 안창남도 있었어요.
안창남은 아트 스미스의 멋진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 뒤 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비행기제작소와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지요. 1921년 일본 민간 비행사 시험에 일본인을 제치고 1등으로 합격했고, 1922년에는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 대회에 참가해 우수상을 차지했습니다.
조선인 비행사가 일본에서 열린 비행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안창남은 일약 '민족의 희망'으로 떠올랐어요. 안창남을 고국으로 초청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안창남 고국 방문 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후 한 신문사 주최로 그를 정식 초청해 서울 하늘을 비행하는 행사가 열린 거예요.
◇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우다
1923년 9월, 일본 간토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일본에 머물던 안창남은 자신의 재능인 비행 기술을 민족의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1924년 중국으로 갔지요. 이후 안창남은 산시성에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며 항일독립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고 항일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0년 4월 2일 산시성에서 비행 훈련을 하던 중 추락해 서른 살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첫 비행은 당시 나라 잃은 백성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준 역사적인 사건이었어요.
[우리나라 최초 비행사 서왈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1919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중국 군벌 항공대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왈보(1886~1928)입니다. 또 1920년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한장호 등 조선인 비행사 6명도 안창남보다 1년 먼저 비행사가 되었지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 6명을 교관으로 초빙해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올해 설립 100년을 맞은 '한인비행학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