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는 상하를 구분하지 못한다. 상하가 쓸모없을 뿐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오늘은 상품이다
강정숙
못난이 과일 파는 곳에 사람들 줄 서 있다
나도 한 번쯤은 그런 때가 있다는 듯
자신을 뒤돌아보듯
상처 난 곳 만져본다
조금씩 기울어진 둘레를 살살 세워
조금 더 반듯하게 잘 보이고 싶던 시절
한 꼭지 들어 올려서
반짝이고 싶던 시절
나를 앞서간 것들만 결실이 되던 날도
웃자라기보다는 몸 낮춰 엎드렸다
오롯이 달게 익어서
오늘만은 상품上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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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인류의 위, 아래 구분이 시작된 걸까? 상, 하의 격차를 르네상스 때 뒀을까? 이때는 이미 인류의 명예욕이 하늘을 찌를 때라서 아닐 것이다. 그럼, 중세? 아니다. 이때의 인간이 얼마나 영악했었는데 그 시작점으로 보기엔 너무 늦다. 청동기시대부터일까? 이때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청동 거울을 사용했다고 하니 당시 인류의 머리와 가슴으로 상, 하를 잘난 것과 못난 것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엔 설득력이 약하다. 아마 석기시대부터 “네가 잘났네.”“내가 잘났네”하는 미학적 평가를 투박한 돌로 만든 잣대로 갖다 대기 시작했을 것이다.
‘못난이 과일’만 파는 사회적기업도 있으니 가성비를 앞세운 마케팅은 이미 구닥다리로 받아들일 정도로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못나고 잘나고의 기준은 어떤 절대자의 입김으로 혹은 기침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일까? 멋진 못남과 볼품없는 잘남은 패러독스인가? 말의 독인가?
스스로 못남에 목이 메어 내 뺨을 양손으로 때린 적이 있다. ‘자신을 뒤돌아보듯 상처 난 곳 만져본다’는 시인의 표현처럼 그때는 만져보는 것이 때리는 것이었다. 마치 내 자식을 누가 때릴까 봐 내가 보란 듯이 일부러 심하게 혼내며 위기를 모면하는 생존전략이었다. ‘조금 더 반듯하게 잘 보이고 싶던 시절’과 나아가 ‘반짝이고 싶던 시절’은 위, 아래 상품의 격차를 위한 대상물로서 고군분투하던 리즈 시절이다.
잘나고 못나고의 경쟁의 난장亂場 속에서 ‘나를 앞서간 것들의 결실’의 후미에서 스스로 몸 낮추며 끝내 피 흘리지 않는 패를 들어 아래(下)를 선택한다. 아래를 향할수록 땅에 가까워져 달게 익는다. 그런 과일을 따고 그런 과일이 상품上品이 되고 떫고 설익은 과일은 나무 위(上)에 매달려 까마귀밥이 되지만 달고 익은 과일은 인간의 식량이 된다. 상하로 돌아가는 바퀴도 절반은 상上이고 절반은 하下다. 그것이 석기시대의 첫 가르침이고 돌의 습성이다. 거대한 돌덩이 위에 사는 거주민의 헌법이다.
쓸모는 상하를 구분하지 못한다. 상하가 쓸모없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