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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슈거 블루스
윌리엄 더프티
-누구나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헤로인도 화학물질에 불과할 따름이다. 양귀비 수액을 받아 정제해서 아편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정제해서 모르핀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헤로인을 만들어 낸다. 설탕 역시 화학 물질에 불과하다. 사탕수수나 사탕무의 수액을 받아다 정제해서 당밀을 만들고, 다시 정제해서 흑설탕과 백설탕을 만든다. 마약 제조자들이 눈에 보기 좋은 흰색을 내기 위해 우유에 든 당분인 락토오스로 정제 헤로인을 희석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나는 설탕과 아스피린, 코카인, 카페인, 염소, 불소, 나트륨, 글루탐산소다(화학조미료로 사용되는 MSG), 여타 복잡한 이름을 가진 온갖 해로운 물질들을 한순간에 모두 끊어 버렸다.
-설탕의 역사
귀한 약품을 가리키던 중세 라틴어인 ‘사카룸’이 세월이 흘러 설탕의 대체물(사카린)을 뜻하게 되고, 원래는 ‘자그마한 조각’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칸다’가 달콤하다는 의미만 남아 아랍어와 라틴어를 거치는 언어상의 변천을 겪은 후 캔디(candy)라는 단어로 살아남았다.
모든 제국의 마지막이 그러하듯 페르시아도 부질없이 무너졌고, 페르시아를 괴멸시킨 이슬람 세계는 승전의 전리품으로 사카룸의 제조 비법을 챙겼다. ‘바그다드의 비밀 무기’라 불릴 만한 이 비법이 메카(Mecca)에 전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은 사카룸 사업을 장악했다.
19세기 초의 3대 발명은 미국이 설탕 산업의 전성기를 누리도록 기반을 닦는 역할을 했다. 와트는 증기 기관을 발명하고, 피져는 동물의 뼈로 목탄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으며(동물의 뼈를 탄화시켜 만든 목탄은 설탕의 탈색과정에 사용된다) 하워드는 진공 펌프를 완성했다. 그러나 설탕에서 노예가 빠질 수는 없었다. 설탕 산업은 농업 분야에서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거대 기업의 한 모범 사례가 될 터였다.
사탕수수 줄기를 심고 솎아내고 수확하려면 직접 사람의 손으로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등골이 빠지도록 일해야 했기 때문에 기계화 영농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주로 흑인들의 일손이 동원되었다. 영국에서 독립하기도 전에 미국은 쿠바에 대규모 경제 식민지를 건설했다.
진공 펌프와 증기 기관, 목탄을 발명하기 전에는 지금의 백설탕 같은 설탕을 만들 수 없었다. 저제 공정이 원시적이라 원당이나 연갈색 설탕을 만들었을 뿐이다. 순백으로 빛나는 지금의 설탕이 태어난 것은 동물의 뼈로 만든 목탄과 거대한 정제 공장 덕이다.
기이하게도 아편 중독의 역사는 설탕의 지나온 자취와 유사한 역사적 단계를 거친다. 애초에 약품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감각적 쾌락을 좇는 습관성 물질이 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아편 무역은 설탕 무역처럼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두 가지 모두 아랍 제국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에 퍼졌는데, 약용에서 시작해 순전히 쾌락을 좇는 목적으로 변모한 것은 불과 몇 세기 만이었다.
아편전쟁은 1842년 난징조약과 함께 끝났고, 영국의 요구에 의해 중국은 1858년 아편의 재수입을 허가했다. 이 시기의 화학자들은 각각 설탕과 아편을 극도로 정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아편을 정제한 것이 바로 모르핀이다. 증기 기관과 가스 배출 장치를 낳은 산업혁명은 또한 마약 중독자를 양산한 것이다. 당시 모르핀 주사는 기적의 약물이었고, 설탕을 흥청망청 먹어대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새 질병인 당뇨병을 포함한 모든 병의 해결책이었다. 남북전쟁 후 미국인의 모르핀 중독은 ‘군인들의 병’이 되었다. 북군 병사들이 광범위하게 모르핀을 남용한 결과 수천 명의 귀한 장병들이 모르핀 중독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들은 또한 대량의 설탕을 보존료로 쓴 농축 연유 캔에 중독된 상태이기도 했다.
의사들이 뒤늦게 모르핀이 습관성 약물임을 깨닫게 되자, 화학자들은 다시 연구에 몰두하여 모르핀을 더 정교히 정제했다. 화학명이 디아세틸모르핀인 이 새로운 비습관성 진통제는 바로 헤로인이었다. 의료인들에게 시판된 후 헤로인도 기적의 약물이 되었고, 모르핀을 대신하여 당뇨병의 치료에 쓰였다.
뉴저지의 치과의사인 로버트 베슬러가 1912년에 쓴 글은
“현대의 설탕제조업은 전혀 새로운 질병을 창조했다. 시판용 설탕은 농축시킨 산(acid)의 결정체에 불과하다. 옛날에는 설탕 값이 매우 비싸 극히 부유한 계층에서만 구매할 수 있었으므로 국가 경제라는 관점상 심각성이 보고되지 않았으나, 현재는 그 값이 싸져 보다 많은 사람들을 퇴화시키므로 대중을 계몽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설탕 소비에 소모된 에너지는 결코 생산적이지 못하며, 인류 역사에 막대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인간이 수천 년간 알코올을 마셔 왔지만 이토록 인류 전체를 퇴화시키지는 않았다. 알코올에는 파괴적인 산 성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다. 설탕의 파괴적 효과는 철저해서 회복이 불가능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건강한 사람의 뇌에 이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설탕을, 어린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어도 되는 걸까? 맥주나 포도주보다도 더 독하고, 인류가 그때까지 알고 있었을 어떤 약물보다도 강력한 물질을 말이다. 아랍과 유대인 의사들이 극소량의 정제 설탕만을 주의 깊게 처방전에 넣었던 사실에 놀랄 것 없다. 설탕은 뇌에 작용하는 환각제다. 섭취하는 즉시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면서 환각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한다.
신진대사가 원활한 몸은 부신의 지휘 하에 정확히 균형을 이루며 작동한다. 당은 소화 과정을 거쳐 단당류의 형태로 몸에 흡수되는데, 이당류인 정체 설탕(수크로오스)을 먹게 되면 몸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생화학적 소화 반응을 거치지 않게 된다. 즉 설탕은 포도당으로 분해되기 직전의 이당류 상태로 곧장 장에 도달하여, 혈중 산소량과 균형을 맞추어 혈당치를 유지하는 혈액 속으로 바로 흡수된다. 그 결과 혈당치가 급격히 증가하여 체내 균형이 깨지고, 몸은 위기 상태에 빠진다.
제일 먼저 이 위기를 알아채는 곳은 뇌다. 뇌는 부신에 명령하여 당을 처리할 호르몬과 화학물질을 쏟아내도록 한다. 혈당을 낮추는 역할을 맡은 인슐린은 췌장의 내분비선에서 분비되며, 혈당치를 높이는 상보적인 피드백 역할은 부신 호르몬이 맡는다. 신속한 속도로 진행되는지라 그 결과는 분명하다. 당이 혈류에 너무 빨리 흡수되어 호르몬의 균형이 심하게 깨지는 것이다. 혈당치는 정상치 이하로 떨어져 버려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췌장의 내분비선에서의 호르몬 분비가 멈추고, 부신의 일부 기능도 멈춘다. 생화학 반응을 되돌려 혈당치를 다시 올리기 위해 부신에서는 또 다른 호르몬들을 생산한다.
옛날 맥주는 지금의 플라스틱 시대의 색소와 가짜 거품뿐인 맥주와는 달랐다. 마시는 빵, 즉 기본 식품이었다. 젖을 먹이는 엄마들이 빵 대신 맥주를 마셨다. 그러므로 맥주에 설탕을 넣는 행위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범죄자들이 마차에 실려 마을에서 구경거리가 될 때 그 메시지는 분명했다. 사람의 몸과 뇌는 설탕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슈거 블루스의 본질을 꿰뚫었던 현명한 사람들은 지하로 숨었다. 사람의 몸과 뇌는 설탕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누누이 말하던 주장도 이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은 수백 년이 지나야 다시 주목받을 진리였다.
1964년 일본의 민간치료자인 나오티 사쿠라자와의 50권 가량의 저술 중 첫 책인 <당신들은 모두 삼백안이다>를 번역했다. 그 서문에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 나 자신을 치유했던 경험을 자세히 적었다. 무엇보다도 그 책은 한 장을 설탕에 할애하고 있다.
‘1인당 설탕 소비량이 엄청나게 급증하는 현상에 대해 서양 의학과 과학은 이제 겨우 경보 신호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가 아직 수십 년은 뒤쳐져 있다...... 동양의 오랜 지혜를 서양 의학이 받아들일 날이 오리라고 확신한다. 설탕은 의문의 여지 없이 인류 역사의 제1의 살인자다. 그것은 아편이나 방사선 낙진보다 더 나쁘다.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에게는 설탕이 치명적이다. 근대 문명이 극동과 아프리카의 국가에 전파한 것들 중에서 설탕은 가장 사악한 악마다.....아기들에게 설탕을 먹이고 판매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책임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현대 민간치료자들의 치료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같이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의 몸은 정제 설탕 즉 수크로오스를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설탕을 믿사오니
중세에는 미쳤다는 이유로 사람을 가두지는 않았다. 정신병자를 가두기 시작한 것은, 설탕이 약제사들의 처방약에서 음식으로 자리를 바꾼 계몽시대부터다. 17세기 후반은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광인 대감금의 시대였다. 설탕이라면 기껏해야 맥주에 녹아있는 자연 발효 당이 고작이었던 영국인들이 겨우 200년 사이에 900톤이 넘는 설탕을 먹게 되고, 런던의 의사들이 슈거 블루스에 의한 최종 증세와 징후를 깨닫고 기록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증세가 심하지 않은 슈거 블루스는 의사를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다. 귀신에 홀렸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저 ‘미친’, ‘정신 나간,’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게으르거나 방탕하거나 부모가 싫어하는 25세 이하의 자식은 얼마든지 파리 제1정신병원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최초의 정신병원이었던 셈이다. 부모나 친척, 심지어 전권을 가진 교구 신부의 불평 한 마디면 누구나 수용될 수 있었다. 도시의 설탕 소비량은 자꾸 늘어났고,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사람도 계속 증가했다. 300년이 흐른 지금은 신경활성제를 써서 이른바 정신장애자의 뇌를 조절하므로 사람이 살아 있는 로봇 꼴이 된 셈이다.
호퍼 박사는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한 메가비타민B3 요법>에
“환자가 설탕이나 설탕이 든 음식을 제한하는 식이 프로그램을 따르도록 지도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뇌손상 아동과 학습장애 아동, 과잉행동장애 아동, 정신병 아동을 임상 연구한 결과, 가족들이 당뇨병을 앓은 경우가 비정상적ㅇ로 많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부모와 조부모들이 당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아이들이 저혈당이나 기능성 저혈당증에 빠지기 쉬운데, 이는 몸에서 당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을 처리하지 못하는 그 아이들이 당을 과다 섭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식습관을 조사해 보니 단것과 캔디, 케이크, 커피, 카페인성 음료,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음식은 부신을 자극하므로 아주 조금만 먹든지 끊어야 한다.
전통 동양 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강조해 왔다. 이른바 질병이란 이 통일체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신호다. 건강을 전체적으로 회복하려면 완전한 음식을 먹으면 된다. 공산국가인 중국의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신경증과 정신병이 발병하지 않는다. 편집증조차 찾아볼 수 없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일본의 저명한 의사인 사겐 이시두카는, 1800년 이래 일본이 서양 과학과 의학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방식을 고수한 까닭에 반-의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서양인의 이른바 정신병은 음식으로 고칠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시두카의 후계자인 니오티 사쿠라자와는 1920년대부터 1966년 사망할 때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강의와 저술, 교육 활동을 펼쳤다. 그는 “암은 강한 체질의 사람이 걸리는 극심한 음성 질환이며, 정신 분열증은 약한 체질의 사람이 걸리는 극심한 음성 질환이다”라고 가르쳤다. 동양 의학의 모든 체계는 침술과 마찬가지로 음양에서 출발한다. 설탕은 극도의 음성 식품이녀, 육류는 극도의 양성 식품이다. 음성이 강한 설탕은 암과 이른바 정신분열증이라는 극도의 음석 질환을 야기한다.
전통 동양 의학에서 말하는 ‘약한 체질’은 유전 형질에 의해 결정된다. 태아가 잉태된 처음 몇 달 동안 모체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형질이 달라진다고 한다. 동양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귓불이 작고 뺨에 달라붙어 자연스럽게 갈라져 보이지 않으면 약한 체질이 신체에 발현된 것이다. 얼굴과 분리된 큰 귓불은 강한 체질과 건강한 유전 형질을 상징한다. 서양 의학의 진단상 분리된 큰 귓불은 부신이 강한 징후라 하니, 고대 동양의 진단을 확진한 셈이다.
틴테라는 획기적인 의학 논문을 여러 편 저술하면서 증세가 개선, 경감, 완화, 치유되는 것은 전적으로 전체적인 신체 기능이 정상으로 복구되는지의 여부에 달렸다고 거듭 강조했다. 치료법으로 식이요법을 우선적으로 처방했고, 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므로 설탕이 어떤 형태로 어느 음식에 섞여 있더라도 절대 먹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틴테라가 감히 일반을 대상으로 한 잡지에 “알레르기에 여러 종류가 있다니 우스운 일이다. 알레르기란 설탕이 부신을 자극하여 생기는 오직 한 종류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을 때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알레르기 학자란 정말 대단한 직업이다. 그들은 벌써 수십 년간 새의 깃털에서부터 바닷가재 꼬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해 온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 설탕이나 더 이상 먹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1969년 57세의 나이에 닥친 틴테라의 갑작스러운 사망 덕에 그를 반대하던 의사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소박한 동양 의학의 원리인 음양에 따른 체질과 식사 방법을 받아들이기 쉬워졌을 것이다. 오늘날 의사들은 모두 틴테라가 수십 년 전에 발표했던 내용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포도당견딤검사를 시행해 포도당 처리 능력을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른바 정신병 치료를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예방의학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애초부터 설탕을 문제없이 처리할 만한 강한 부신을 타고 태어났다 해도, 부신이 당을 처리하다가 지쳐 버렸다는 신호를 줄 때까지 설탕을 먹어대야 할 이유가 있을까? 모든 형태의 설탕을 끊어 버리면 그만이다. 우선 손에 든 청량음료부터 던져 버리자.
의료계의 역사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어진다. 몇 세기에 걸쳐 고통받는 영혼을 마녀라며 화형시키고, 귀신에 사로잡혔다며 엑소시즘을 행하고, 미쳤다며 감금하고, 자위행위 때문에 정신병에 걸렸다고 고문을 가하고, 정신 이상이라며 엉뚱한 치료를 하는가 하면,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는 전두엽 절제술까지 행했던 것이다.
만약 민간치료자들이 이 원인이 모두 ‘슈거 블루스’ 때문이라고 한다면, 귀담아들을 환자가 몇 이나 될까?
-누명을 쓴 꿀벌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이래의 모든 왕족처럼 찰스 2세도 수지맞는 설탕 무역에 목을 매고 있었다. 왕과 고위 관리들이 당신의 환자이고, 또 이들이 설탕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돈줄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써가며 새로운 병의 원인이 설탕임을 암시함으로써 단골손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그 책임을 꿀벌에게 전가했다. 꿀은 태초부터 존재했고, 꿀벌을 쳐서 막대한 돈을 버는 사람은 없었다. 벌에 책임을 돌려 ‘꿀로 인한 염증’이라는 뜻의 난해한 라틴어 이름을 붙이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의학사에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의학적 신망도 두터이 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윌리스는 질병분류학에 불후의 공헌을 했고, 의학사 전체에 흔적을 남겼다. 그는 이를 테면 안전 운행을 했던 셈이다. 그 바로 전 해에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었다. 과학자라면 모름지기 왕족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과학이 산업에 아부하는 일은 지금도 흔히 벌어진다. 일본의 어느 촌락에서 수은이 든 산업 폐기물에 중독된 생선을 먹고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관련 증세의 병명은 수은이 아닌, 병이 발생한 촌락의 지명을 땄다. 바로 ‘미나마타병’이다.
윌리스는 비타민C가 발견되기 수백 년 전에 설탕과 관련성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사탕수수나 사탕무를 정제하면 비타민C를 포함한 모든 비타민이 폐기된다. 17세기와 18세기 당시, 프랑스식 디저트인 생과일과 영국식 디저트인 설탕 친 푸딩의 차이가 빈혈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현재 결핵의 발병을 세균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설탕 소비와 관련하여 설탕을 많이 먹는 사람의 체내 환경이 세균 감염을 초래한다고 한다. 300년 전인 1700년대에 특히 영국에서 결핵 사망자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나보루 무라모토에 의하면, 설탕 공장과 정제소 인부들의 결핵 발병률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1910년 일본이 포모사를 점령하여 설탕을 값싸고 풍부하게 공급받으면서 일본의 결핵 발병률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제임스 허트는 <클리니케 또는 질병의 식이요법>이라는 저서에서 설탕에 대한 그의 17세기적인 생각은 지금 보면 구식이지만, (바로 그래서) 더 정확하다.
‘식사 시작부터 끝까지가 설탕이지만, 사탕과자와 마찬가지로 설탕도 과다 복용하면 신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설탕은 피를 뜨겁게 하고, 장폐색을 일으키며, 체질을 악액질로 만들고, 탈진하게 하며, 이를 썩게 하고, 안색을 어둡게 하며, 무엇보다도 숨결에서 혐오스런 악취가 나게 된다. 그래서 특히 젊은이들은 설탕을 가려먹어야 한다.’
당뇨병의 근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난치성 만성병으로 췌장에서 충분한 양의 인슐린을 분비하지 못해 발병한다는 말을 의학사 서적에서 볼 때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리스어로 된 이름을 지금껏 고수하다니! 지난 수천 년간 당뇨병이 실재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교묘한 솜씨로 언어와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인슐린의 발견은 ‘질병으로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이 이를 어떻게 악용할 지가 뻔히 보이는 근대 의학의 기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슐린의 생산은 제약업계로서는 축복이다. 당뇨병 환자는 안정적인 시장을 형성한다. 1900년대 초반에는 그 수가 100만 명이었다. 1920년대 설탕 중독자가 급증하면서 이런 수익성 좋은 시장이 해마다 팽창하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인슐린 주사는 비싸지만 용이한 ‘증상완화제’일 뿐, 어떤 의미로는 빠르고 저렴한 ‘치료제’는 아니었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당뇨병 환자들은 남은 일생 동안 인슐린에 의존해야 한다. 인슐린은 처방전 없이 주삿바늘 같은 소모품과 함께 약국에서 패키지 포장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신이 만능이라는 생각과, 약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도살자에 끌려온 동물의 췌장에서 추출한 인슐린을 주사 받으며 당뇨병 환자는 목숨을 이어갔다. 인슐린을 투여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당뇨병에 취약한 자손을 낳았다. 당뇨병의 변종이 늘어났다. 소변을 많이 배설하게 하는 ‘꿀로 인한 염증’이라는 의미의 당뇨병이란 용어는, 증후를 중시하는 현대적 명칭인 ‘저인슐린혈증(인슐린 생산 저하증)’에 그 자리를 넘긴다.
해리스가 제안한 고인슐린혈증(저혈당증) 치료법은 너무나 간단하여 아무도, 심지어는 의료인조차도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없었다. 몸을 스스로 다스리자는 게 그의 치료법이었다. 혈당이 낮은 환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정체 설탕과 캔디, 커피, 음료수를 끊으면 되었다. 병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수 있으므로 고인슐린혈증 환자는 평생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의사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환자에게 교육하면 끝이었다. 고인슐린혈증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의사들은 해리스에게 끊임없이 혹독한 공세를 퍼붓거나 그의 주장을 무시했다. 그의 발견이 혹시라도 주위에 알려지면 외과의나 정신분석의, 여타 전문의들이 곤란을 겪을 터였다. 지금까지도 고인슐린혈증은 질병으로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에게는 의붓자식이다. 미국의학협회가 해리스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데만도 25년이 걸렸다.
기능성이 떨어진 신체는 혈당치의 기복이 아주 커진다. 만일 췌장에서 인슐린이 너무 많이 분비되면, 너무 많은 당이 글리코겐으로 전환되며 혈당치가 떨어져 계속 낮은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이 고인슐린혈증 즉 저혈당증이며, 슈거 블루스의 초기 단계다. 이렇게 췌장이 지나치게 자극받는 현상은 정제 설탕과 꿀, 과일 등의 단순 당을 다량 섭취하거나 간접적인 약물 자극(마리화나를 포함한)이 있을 때 발생한다.
달리 말해, 인슐린 공급이 부적절하면 간이 효율적으로 과다한 당을 글리코겐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당뇨병이다. 췌장에서 인슐린 생산이 느려지거나 중단되면 단순 당과 꿀, 과일, 약물과 같은 고도의 음성 식품을 중성화하지 못하고, 과다한 당은 혈류에 쌓이기 시작하며, 일단 혈당치가 높아지면 계속 높은 상태로 유지된다. 단순 당과 꿀, 과일의 과다 섭취는 고인슐린혈증을 야기한 후 슈거 블루스의 다음 단계인 (혈당치가 높은) 당뇨병을 부른다.
윌리스가 ‘당뇨병’이라고 불렀던 ‘고혈당 증세’는 초기에 쉽게 발견된다. 왜냐하면 당뇨병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소변 표본과 특이한 향취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슈거 블루스의 초기 단계인 저혈당을 감지한 것은 20세기부터다.
사쿠라자와는 설탕업계와 그 의붓자식인 인슐린 생산 업계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것을 찬사로 생각했다. 1960년대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슐린이 발견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당뇨병을 치료하는 서양 의사는 아무도 없다. 의사들은 계속하여 인슐린을 처방하고, 당뇨병 환자들은 평생 인슐린에 의존해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인슐린 발견 25주년 만에 인슐린은 당뇨병 치료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와중에 수백만 명이 넘는 당뇨병 환자들이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효과도 없는 치료를 받는다. 당뇨병 환자들은 매일같이 늘어난다. 인슐린의 투여는 평생 의사와 제약업체의 돈주머니를 불려 주겠다는 서약을 하는 셈이다’
사쿠라자와는 서양의 이른바 탄수화물 식품을 당뇨병 환자들에게 먹이지 않는 식이요법은 위험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서구의 영양학자들이 단순히 탄수화물이라 분류하는 식품들은 이제 질적으로 구분하라고 요구했다. 정제하지 않은 통곡물을 탄수화물로 섭취하는 것과, 평균적인 미국인 식단의 탄수화물 공급원인 감자와 흰빵, 정제 곡물, 백설탕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젖병에서 주사기까지
조지는 보스턴 근처의 공동체에 들어가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동양 음식을 먹었다. 현미, 채소, 약간의 생선, 샐러드, 콩, 해조류, 간장, 두부, 된장, 약간의 제철 과일, 천천히 조금씩 대사의 균형을 찾았다. 마침내 설탕이 들어 있지 않은 음식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경지에 올랐다. 설탕에 대한 미친 듯한 갈증은 사라지고, 우유, 요구르트, 치즈, 심지어 아이스크림에 대한 갈망도 사라졌다. 2년이 지나자 인슐린 용량을 하루 601IU에서 151IU로 줄이게 되었다. 체중은 150파운드에 고정되었다. 더 이상 각설탕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경미한 인슐린 쇼크가 오는 듯하면 통밀 빵이나 현미를 한 입 먹으면 그만이었다. 꿀조차 필요 없었다. 숫자를 세며 때로는 50번씩 잘 씹으면 입 안에서 바로 포도당으로 분해되었기 때문에 이른바 ‘소화계에 대한 드라노(막힌 배수관을 뚫는데 사용하는 액체)효과’ 없어도 대사 균형을 잡는데 각설탕만큼이나 효과적이었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유대교 하시디즘파의 침술의에게 매주 침술 지료도 받았다. ‘침술은 내게 인내심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친구 말이, 제 간이 무리한 상태라는 겁니다. 아마 억눌린 분노와 유아기 때부터 먹어 온 몇 톤에 이를 설탕 때문이겠죠. 침술 이론에 의하면, 과활동성인 간은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더군요.’
-양배추와 왕
만리장성을 건설한 일꾼들은 통곡물 밥과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먹으며 거친 중노동을 견뎌냈다. 양배추절임은 통곡물 밥에 곁들여 먹는 유일한 채소류 반찬이었다. 중국을 점령한 몽골인들은 양배추절임의 실용성과 장점을 깨닫고 군량식으로 활용했다. 13세기 헝가리까지 진군했던 몽골군은 양배추절임을 유럽에 퍼뜨렸고, 독일과 동유럽 사람들은 지금도 절인 양배추를 즐겨 먹는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투 부대로 꼽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투병 군단은 로마에서 아주 먼 거리까지 진군했다. 마치 베트콩처럼 식량이라곤 한 사람당 곡식 한 자루가 전부였고, 설탕이나 취사시설 따위는 없었다. 칼에 찔리면 치료해 줄 사람은 있었지만 의무대를 따로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통곡물을 씹으며 행군을 하거나 통곡물을 갈아 만든 로마식 식사로 끼니를 때웠고, 양배추나 채소를 구하면 그때그때 기니에 곁들였다. 로마인이 양배추를 먹은 덕에 수백 년간 의사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고 플리니우스가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설탕의 주산지인 이집트로 진군했던 십자군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1260년 프랑스의 성왕 루이가 이끄는 십자군과 이집트군의 교전 당시, 십자군 병사 사이에서는 잇몸에서 악취가 나고 피가 흐르며 피부에 출혈성 반점이 돋고 다리가 붓는 괴질이 유행했다. 장 드 조엥빌 경의 기록에는, 이 괴질이 결정적 패인이 되어 십자군 측 기사와 왕까지 포로로 잡힌 것으로 나와 있다.
현대 사회에서 괴혈병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당시에는 항해가 장기화되면서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없어 괴혈병에 걸렸으리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도 원거리 탐험을 떠난 바이킹과 페니키아인, 극동아시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괴혈병의 참극을 피했을까? 카이사르의 군대처럼 양배추나 다른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콩과 다른 씨앗의 싹을 틔워 먹었기 때문이다. 아스코르빈산 즉 비타민C가 바로 그 비결이었다.
설탕이 괴혈병을 유발한다는 생각은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근거가 부족한 비과학적인 생각이라 치부되었다. 채소와 과일, 딸기류, 견과류 속에는 오늘날 비타민C라고 불리는 영양소가 자연 형태로 듬뿍 들어 있다. 단맛을 농축시켜 정제 설탕을 만들기 전에는 이런 음식들이 천연 감미료였다. 사탕수수를 정제하여 설탕을 만들면 천연 성분의 90%가 제거되며 비타민C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천연 감미료 대신 비자연적인 농축 감미료인 설탕을 먹으면 괴혈병이 발병하는 이유다.
19세기에는 가당 농축 연유가 유행하면서 모유를 먹이는 엄마는 구식이라 여겨졌다. 아기들은 젖 대신 가당 농축 연유를 먹었고, 당연히 새로운 형태의 괴혈병이 발병했다. 이 병은 발견한 의사의 이름을 따서 바로우병으로 명명되었다.
캐나다 로키산맥 부근 인디언 부족들은 겨울에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곳이라 레몬이나 라임 따위는 자랄 수도 없고, 비타민C가 많을 만한 음식도 없었으나 신체가 건강하고 치아가 튼튼한 인디언 부족을 만나 괴혈병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해 보니 흰 밀가루와 설탕을 먹지 않고 무스(북미산 말코손바닥 사슴)를 사냥한 후 콩팥이 있는 등쪽에 칼집을 깊이 넣어 작은 공처럼 생긴 기름 덩어리가 두 개 나오는 부신을 잘라 먹는 습관을 가지게 되어 비타민C를 섭취하게 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