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달빛 가난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남은 시간
사랑의 이유
민들레
비 맞는 나무
비
마음의 빈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못
사람이 그리울 때
별
오늘밤 물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월
친구에게
비상
푸른 넝쿨
국화 앞에서
넉넉한 마음
장미꽃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찔레
가득한 여백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12월
길 위에 흔들리다
다 버리고 가라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3.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너를 만나고 싶다
그림자 놀이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
봄날
문 앞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네.
봄빛은 환하고 슬픔은 옅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어디쯤
당신이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걸어오며 흥얼대는 콧노래 들리네.
이맘때면 눈감아도 잠들 수 없네.
꽃 지는 소리 들려 잠들 수 없네.
가진 것 다 버리고 싶어 혼자 나온 마음이
처마 끝에 매달려 살랑거리고
그 마음에 매이기 싫은 또 하나의 마음이
당신 생각 하다가 짙어져 가네
둥근 우주같이 파꽃이 피고
살구나무 열매가 머리 위에 매달릴 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걸을 수 있는 동안 행복하다.
구두 아래 길들이 노래하며 밟히고
햇볕에 돌들이 빵처럼 구워질 때
새처럼 앉아 있는 후박꽃 바라보며
코끝을 만지는 향기는 비어 있기에 향기롭다.
배드민턴 치듯 가벼워지고 있는 산들의 저 연둣빛
기다릴 사람 없어도 나무는 늘 문 밖에 서 있다.
길들을 사색하는 마음속의 작은 창문
창이 있기에 집들은 다 반짝거릴 수 있다.
아무것도 찌르지 못할 가시 하나 내보이며
찔레가 어느새 울타리를 넘어가고
울타리 밖은 곧 여름
마음의 경계 울타리 넘듯 넘어가며
걷고 있는 두 다리는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내 생의 남은 시간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라.
그러고도 더 남는 것 있다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고만 싶어라.
앉아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적막한 호수처럼 깊어지고 싶어라.
부질없는 이름과 실없는 다툼
상처준 이 있으면 용서받고 싶어라.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 허용된다면
아낌없이 주기만 하리라.
주고서 행여 돌려받지 못해도
준 것에 만족하며 침묵하리라
당신이 꼭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장점보다
결점이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어쩌다 보니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힘들던 마음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비 맞는 나무는 비맞는 나무다.
온종일 줄줄 흘러내리는
천상의 눈물을 온 몸으로 감수하는
비 맞는 나무는 인내하는 나무다.
모든 것 다 용서하신 어머니같이
비 맞는 나무는 다 받아들이는 나무다.
온통 빗속을 뚫고 다녀도
날개에 물방울 하나 안 묻히는 바람처럼
젖어도 나무는 젖지 않는다.
세속의 번뇌 온몸으로 씻어내려
묵묵히 경행하는 수행자처럼
맨발로 젖은 땅 디디고 서 있는
비 맞는 나무는 비 안 맞는 나무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빈 가방 하나 메고 길 나섰지요.
새도록 내린 비가 나 모르는 새
하늘을 거울처럼 닦아 놓았어요.
얼굴이 비칠까 봐 자꾸 하늘만 쳐다봤지요.
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알고 보면 다 제 생각만 하고 사니까요.
꼭꼭 숨어 한 세월 잊어버렸죠.
문득 사람이 그립데요.
그럴 땐 길 나서야 해요.
먼길 나서며 모든 것 싹 잊어버려야 해요.
그리움은 아픔이니까.
아픔은 또 병든 시간이니까.
나이가 들면 어떤 아픔도 두려워지기 마련이죠.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성가시거나 두려울 뿐이지요.
그리워지는 건 그럼 뭔가요?
약해진다는 증거일까요?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러나 좋은 것도 있어요.
웬만한 건 다 용서해버리죠.
용서가 아니라 회피라고 해도 좋아요.
그럴 땐 길 떠나고 싶어요.
밤에 내린 비가 길 밖으로 나를 자꾸 떠미니까요.
나는 나를 만드네
별이 기다림을 만들듯
긴 기다림에 지진 사람들이
새로운 만남 앞에 머뭇거리듯
나를 끌고 다니던 숱한 아픔들이
나를 만드네
고통을 자르고 돋아나는 또다른 고통의 싹
버릴 수 없는 상처들이 나를 만드네
별은 투명한 고해
상처로 얼룩진 시간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
살갗에 닿는 새벽공기가 두려워
얼굴을 감싼 내가 걸어가네
뒤에서 바라보는 또다른 나
푸른 수증기가 어른거리고
얼어붙은 길을 마찰하는 바퀴들이 요란스레
시간에 다친 사람들을 쓰러뜨리네
오늘밤 물소리는 나를 떠밀어
하염없이 씻기게 한다
누워서 짐짓 생각해 보는
짧은 그리움
길고 지겨운 기다림 밖으로
녹슨 시간의 모습들이 째깍거리며
지나간다.
욕실의 수증기처럼 막연한 통증
아픈 곳을 찾기 위해 숨을 죽이는
오늘밤 빗소리는 나를 떠밀어
멍들고 비어 있는 육체 밖으로
떠나게 한다.
참담한 식욕의 시간이 지나가고
비로소 꽃 피는 절망
삶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울고 있는지
오늘밤 물소리는 나를 떠밀어
문밖에서 서 있게 한다.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어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지
사랑은 기다린 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나 살자.
먼길을 걸어 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나 살자.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창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넝쿨을 바라본 적이 있다.
투명한 햇살에 속 내비치는 넝쿨의 이파리들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앉았던 적 있다.
달리던 삶에서 갑자기 내려
같이 가던 사람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서 있을 때
멀리 하나씩 길들이 떠오르고
먼지를 피워 올리며 사라지는 버스가 남겨놓은
남루한 얼굴들 사이로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 들린다.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넝쿨의 저 연두,
또는 초록의 이파리들도 사실은
빛이 만들어낸 허구일뿐.
사랑 또한 그런 것이다.
저녁이 오면 내 마음은 습관처럼
헛된 약속을 위해 서두르지만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란 없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눈감고 올려다보는 창 위로 이윽고
푸른 넝쿨은 사라진다.
한때 내 마음을 휘감고 올라가던 연두,
도박같은 것, 아니면 비루한 호구나
순간을 휘감는 질투 같은 욕망
더러는 바람소리 나는 새벽의 산책 또한 그런 것이리.
아름다움 또한 다르지 않다.
짐짓 허리 펴고 앉아 이마를 드는 저 산의 입정.
한 마리 산새가 깨워놓는 침묵에 무너지는
거짓말 같은,
꿈.
막다른 골목의 투항처럼 나는 슬리퍼 사이로 맨발
드러낸 채
삶의 한때를 흔들어 놓던 질문들에 매달린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뽀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타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아, 내가 만약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온종일 내 마음이 시계를 보거나
기다리는 조급함에 내 손이
걸려오는 전화마다 달려나간다면
방심한 마음 내비치며 너는
한 번쯤 나로부터 비켜 있어도 좋다.
쳐다보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고정된 풍경이란 방관해도 좋다.
아, 내가 만약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너에게 붙박혀 있는 나의 시선이
어느덧 싫지 않은 일상이 되어
외로우면 한 번씩 돌아다봐도 좋다.
너 또한 만약에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밀밭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우처럼
지나가는 내 발소리에 길들어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 지어도 좋다.
양이 뜯지 못하도록
가시를 내밀고 있는 꽃,
감기에 걸릴까 봐
유리덮개로 바람을 막아줘야 하는
예쁜 내 장미꽃,
별을 쳐다보며 나는 별 속에
네가 피어 있을 것이란 상상으로 행복해진다.
눈감으면 느낄 것 같은
네 향기 떠올리며 따뜻해진다.
네 마음이 보내는 환한 빛,
별 같이 많은 사람 가운데
아, 나는
네가 걷고 있을 것이란 생각 하나로
세상의 험한 길들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사랑 받기 위해 우린 사랑하지만
그 사랑 깊어지면
어딘가에 누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할 수 있다.
가령 네가 나를 사랑한다 쳐보자.
너 기다릴 걸 생각하며 내 굼뜬 발길이
머무르지 않고 너를 향해 달려간다 쳐보자.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맑은 밤 은하수처럼 눈부시게 살아나고
별 하나에 네 이름을,
그리고 또 별 하나에 문득
잊었던 얼굴들 한꺼번에 떠오른다 쳐보자.
어머니,
내 살아왔던 만큼의 힘 다해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가령 어머니만큼의 사랑으로
그렇게 내가 너를 껴안을 수 있다 쳐보자.
시냇물, 꽃, 동그라미, 고드름, 첫눈 오는 날의
작은 발자국,
가만가만 그 발자국 위를 밟아보는
목 긴 구두 하나,
그렁그렁 눈물 머금고 있는 연못 속의 별들
가을하늘, 소나기, 채송화, 맨드라미,
어머니, 나는 아무래도
살아갈 시간보다 사랑할 것들이 더 많은가 봅니다.
단념하듯 날 저물고
눈 내린다.
일제히 하얀 점으로 변하는
눈동자 속의 십이월,
길 위로 나서기 위해
목이 긴 구두를 꺼내 신는다.
여름의 끝에 헤어진 친구를
눈발 속에서 찾다.
그대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일에
정말 나는 길들어 있을까.
사막에 눈 내리면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젖는다.
타클라마칸이나 라자스탄쯤의 십이월,
때로는
지쳐서 주저 앉아 있는,
내 청춘의 사막 쯤에 숨겨놓은 십이월,
가끔은 그대 침묵 앞에
온몸을 사르르 숯으로 빛나고 싶을 때 있다.
도처에 죽음이 입간판처럼 깔려 있다.
길의 끝에
도착하지 않은 이별을 기다리는 사람들 서성거리고
멈추어 서서 보면 이 길,
어디로 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끝난 것이다. 예행연습도 없이
몇 번의 삽질,
삼베 옷자락이나 적셔놓고
그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강물에다 눈물 하나 보태고
죽음은 그렇게
정거장마다 서 있는 사람들을 일별하며 가는 것이다.
계획된 의식도 없이 흙은
자신의 일부가 될 육신을 받아들이고
몇 번의 삽질을 허락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길,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죽은 이의 주민등록번호를 외며 가는 길,
여기서 비롯된 것인가 우리 삶의 본적?
보다 빨리 사망증명서를 떼기 위해 나는
구청까지 가기로 한다.
죽은 이의 증명을 위해
길 위에 흔들리다.
하늘에 뿌려놓은 새의 발자국,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사람 있어
안개꽃 다발을 흔든다.
지겹도록 떨어지는 링거 한 방울.
병실엔 침묵이
바깥엔 채 이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침녘에 꺼내놓는 시리고 찬 이름 하나.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편지의 모서리가
주머니 밖으로 하얗게 손가락 내밀고 있다.
시린 입김 올리며
쓸쓸한 날엔 철길을 걷는다.
연기 흩어진 하늘을 떼지어 날아가는 새떼,
강을 건너가는 햇빛의 발이
꽁꽁 얼어 애처롭다.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가갸거겨,소리내며 흩어지는
무수한 저 글자들도 사연이 있을까.
추락하는 이름 위에 앉아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하는 건 다만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
너를 만나고 싶다 /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성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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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놀이 / 김재진
불안을 꺼내 화분에 심습니다.
다들 잠든 밤에 혼자 앉아
화분을 살핍니다.
꽃들도 다 자고 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밤하늘은
적막할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수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밤마다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화할 데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번번이 수첩을 뒤지는 건
희망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내 마음은 혹시나 하는 희망에
속고 싶어 안달입니다.
희망을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것입니다.
심어놓은 불안이 잘 크는지
화분을 파 봅니다.
나와 나의 그림자
어느 것이 환영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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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 김재진
내가 있기에 그대가 있습니다.
나 또한 그대가 있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허공이 있기에 그 자리에 있습니다.
숲에 가서 숲을 보면
떨리는 물푸레나무 가지 하나도
그대가 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오솔길 따라 걷는 순간
그대 얼굴 사라지고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덩달아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길은 끊기고
숲을 물들이던 노을이
사라진 마음 불러 물들입니다.
그대에게 물든 나를 나는 끝내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얹혀 있는 그대를 어디에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업고 가야 하는 그대의 무게
시린 눈빛에 매여 나는
그대가 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시집 '연어가 돌아올 때'중
~~~~~~~~~~~~~~~~~~~~~~~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