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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文化圈의 特徵과 새 趨向
高 柄 翊 |
文字를 기준으로 해서 문화권을 劃定한다면 현재 세계에는 漢字文化圈외에 로마字(라틴자)文化圈, 아라브字文化圈, 시릴字(슬라브자)文化圈, 힌두字文化圈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지역과 인구로 아마도 로마字文化圈이 가장 광대하여 漢字文化圈이 그 다음이 될 것이다.
漢字文化圈은 현재 대소 여러 개의 덩어리로 갈라져 있으나 歷史的으로는 中國 韓國 日本의 삼국으로 구성되며, 越南은 오랜 동참 역사에도 불구하고 漢字使用을 포기하고 로마자 常用으로 전환한 지가 백년이 넘어 현재는 고려에서 제외함이 타당할 것이다.
漢字文化圈은 동시에 漢文文化圈이기도 한 것이 우선 다른 文化圈과 다르다. 漢字를 이용해서 외국어를 기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漢字는 곧 漢文과 동일체라 할 수 있고 이 漢文으로 표현된 儒敎 佛敎와 그에 따른 모든 사상 법제 사회문화가 하나의 文化圈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漢字文化圈은 이른 시기에 형성된 이후 중단된 일없이 長久하게 현재까지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 다른 文化圈과 비길 바 아니다. 그리고 이 文化圈을 구성하는 주요 국가들인 中韓日 삼국은 그 지경이 오랜 역사상 대체로 변동 없이 고정되어 왔으며 따라서 문화권 전체의 지역적 범위도 큰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 1. 漢字, 漢文과 漢語 중국의 言語와 文字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이것이 中國文化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漢字文化圈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漢字 漢文의 이러한 특징들에 관해서는 주지의 사실들이 많으나 논리 전개에 필요한 대로 되도록 간략히 언급하려 한다.
漢字는 구성원리부터 독특하여 거의 모두가 表音文字인 다른 세계문자와 다르다. 본래 象形繪圖文字로 시작되었을 것이나, 문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象形·指事·繪意 등 소위 ‘六書’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나갔다. 이리하여 漢字는 글자마다 뜻이 있어서 表意文字이면서 表語文字이고 사각형의 기호적 문자가 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漢字는 “一字, 一意, 一音”으로서 극히 예외적으로 一字 複意, 一字 複音의 경우가 있을 따름이다. 이 單音節의 單一字形으로 여러 가지 많은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漢字의 자수는 계속 늘어나게 되어, <康熙字典>에 이르러 약 5만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漢字는 字形은 모두가 다르지마는, 字音의 경우 同一音이 극히 많다는 것이 어휘와 문장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현중국어의 音素數는 45∼50이어서 비교적 풍부하나(영어는 45, 불어 36, 일어 23), 현대 北京語의 字音이 420종이며 이를 각각 四聲調의 구분을 적용해도 천여종밖에 안 된다고 할 수 있다(<辭海>1979년판의 ‘漢語拐●音索引’에는 1,347 개 자음이 있음).
현재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漢字數를 대략 팔천자로 잡는다면, 字形과 字意가 다른 八千字를 발음할 적에 420字音으로는 물론이고, 1,300여종의 字音으로서도 區別은 어려울 것이다. 異形 異意의 문자들이 허다한 同音字를 발생시킨다.
그러니 漢字는 單音節인 字音을 귀로 듣는 것(耳聽)만으로는 뜻의 識別이 어려운 경우가 많으나, 그 字形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目視) 뜻의 識別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漢語에서는 識別度를 높이기 위해서 單音節을 늘여서 雙音節化하는 例가 허다하다. 同意字 하나를 더 붙이거나(道路 樹木 土地 등), 子字를 붙이거나(鼻子 刀子 등), 종류 표시의 子를 붙이거나(鯉魚 菊花 心臟 등)해서 區別을 쉽게 하는 것이다.
이리하야 漢語에서는 單一字語 보다 雙音節化된 이런 熟語가 훨씬 많아졌으며, 文章語속에서도 雙音節 어휘가 주요부분을 이루었다. 한국 일본으로도 이런 쌍음절어가 그대로 導入되어 그 쪽의 어휘의 주류가 되었다.
漢字의 字音은 單音節이기 때문에 辨別性이 약할 뿐 아니라 그 固定性도 약한 편이다. 字形과 字意는 시기와 지역에 다른 변화가 거의 없으나 字音은 유동성이 높아 시기와 지역에 따라 변화가 상당히 큰 경우가 있다. 예컨대 시기적으로 詩經時代에는 複子音이 있었고, 隋의 切韻時代에는 四聲區別이 정착되었으며, 元代이후의 北中에서는 入聲이 소멸되는 變化가 있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중국 여러 지방의 방음이 많이 다르고, 韓國 日本 越南에서 漢字音이 변화되어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漢字는 그 字形 字意가 爲主이고, 字音은 부차적인 의미밖에 못 가졌다 할 수 있다.
漢文은 漢字가 지닌 特性으로 인해서 역시 文章으로서 獨特한 性格을 지니게 되었다. 表意 記號의 文字인 漢字는 각각 독립된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을 적절한 위치에 配列 連結함으로써 한줄기의 뜻을 전달하는 文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된 뜻을 가진 每字의 連結을 눈으로 보아서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文章은 필연적으로 아주 簡潔하고 壓縮的인 구성이 된다. 아마도 殷代의 甲骨文이 초기 漢文의 모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이어 上古의 金石文 및 易經, 詩經, 書經 등의 簡潔하고 壓縮된 文體가 標準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漢文은 사람들의 日常 會話語를 發音대로 文字로 表記한 것이 아니다. 論語나 孟子는 기본적으로 對話書라 할 수 있는데 그 文章조차도 對話語를 그대로 表記한 것이 아니고 簡潔하게 壓縮된 文章語이다. 그러니 春秋戰國時代에서부터 19세기까지의 中國의 거의 모든 典籍은 그 글이 文章語 즉 ‘文言’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근대 五四運動時期의 白話文運動으로부터 비로소 言文一致가 시작된 것이다.
中國의 서적은 春秋時代의 論語 孟子 등도 木簡 위에 篆書로 쓰여졌다고 보여지고, 漢代以後에는 紙類 위에 隸書 혹은 楷書로 문자를 쓰는 등 외관상으로는 변화를 보였지마는 그러나 기술된 텍스트는 불변해서 언제나 口語와는 다른 文章語였던 것이다.
世界의 어느 민족에서도 文言과 口語와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마는, 表音文字에서는 그 차이가 적었던데 비해서, 表意文字인 漢文의 境遇처럼 큰 곳은 없을 것이다. 文字 하나하나가 獨立된 뜻을 갖고 또한 單音節이며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漢文 文章 속의 每字는 그것이 名詞인지 또는 形容詞, 動詞인지 不分明하여 意味의 連結이 分明치 않은 境遇가 許多하다.
古代로부터 文字와 文章에 대한 註釋의 學問 즉 訓嘁學이 조기에 특히 발달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印歐語는 屈折語(굴절어)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單語들이 格變化를 통해서 文法과 意味의 聯關을 分明히 表示해 준다. 또 韓國語와 日本語는 膠着語(교착어)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근에다가 助詞(吐)를 첨가해서 文法과 意味의 聯關이 쉽사리 밝혀지고 있다.
漢文은 二千年 동안 기본적으로는 큰 變化없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先秦의 自由素朴한 산문에서 六朝의 四六對句와 수식을 중시하는 騈儷體로 다시 唐의 韓愈, 柳宗元의 古文運動 등이 있었으나 기본 틀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 經典이나 文學作品들을 近年까지도 그대로 吟誦(음송)하여 왔다. 우리가 詩經 書經 또는 기타 古典이나 文學作品들을 이렇게 음송할 때 誦者나 聽者나 모두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글 내용을 이해하는 것 같이 錯覺하기 쉬우나 사실은 누구나 字音을 통해서 그 字形을 想起함으로써 그 內容을 理解하고 感興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미리 눈으로 읽은 바 없이, 처음 듣기만 하는 漢文인 경우에는 理解가 거의 不可能하다 할 것이다.
漢語 즉 中國語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古典 속의 漢文과는 상이한 거의 별개의 존재였었다. 古代에서부터 口語가 그 聲音대로 文字化된 일이 없고, 따라서 옛날의 일상의 言語生活을 記錄으로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唐宋 以來로 白話 文體로 된 서술이 一部의 語錄類나 元代의 戱曲, 明淸의 小說類에서 部分的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점에서 朝鮮初期의 中國語 學習敎科書인 <老乞大>나 <朴通事>등은 오히려 百話體 中國語를 보여주는 貴中한 資料라 할 것이다.
그러니 中國의 知識人들은 近世의 言文一致運動 때까지는 누구나 言語文字生活에 있어서 뚜렷이 二元的 生活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즉 日常生活에서는 口語體의 言語로 말을 하고, 붓을 들고 글로 쓰는 書簡이나 著述은 모두 文章體 漢文을 쓰는 그런 二元生活이었다. 中原地方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吳楚지방, 憄●越(민월)지방, 蜀幐(촉롱)●지방 사람들도 모두 자기의 方音으로 漢字를 읽고 方言으로 日常會話를 하였으나, 붓을 들고 글을 쓸 적에는 古代로부터의 同一한 文言을 썼던 것이다.
漢字 漢文이 韓國 日本으로 전파되어 나가서 거기서 수용 발전된 양태도 독특하다. 라틴字 같은 表音文字가 言語系統이 近親關係에 있는 유럽 諸國에서 수용되기는 단순한 일이었고, 나아가서 言語系統이 다른 곳에까지도(터어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地方言語의 기술에 별 문제 없이 그대로 受容되었다. 그러나 表意文字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韓國語 日本語는 音韻上으로나 構文法(統辭論)으로나 中國語와는 전연 다른 系統의 言語이지마는, 자기 자체의 文字를 못 가졌고 또 漢字 漢文을 당시로서는 일종의 普遍語文으로 看做(간주)했음인지, 漢字를 조기에 도입 사용하였다. 漢字만을 記錄手段으로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漢文과 더불어 中國文化를 전반적으로 도입하여 이로서 자기문화의 발전도 圖謀한 것으로 보인다.
韓國人은 오래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漢字를 每字 ‘韓國말 풀이’(訓)와 ‘중국식 소리’(音)로 병렬적으로 배우고 익혀 왔다. 이것이 漢字가 表意文字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마는, 漢字를 한편으로는 번역한 韓國語 단어로 또 한편으로는 中國音으로 두 가지를 그대로 합쳐서 읽었던 것이다.(天=하늘 천, 地=따 지).
그러나 漢文 도입초기에 韓國人들이 漢文을 어떻게 읽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고 아마도 中國人들이 익는 방식 그대로 音讀했을 것이고 뜻은 韓國말로 풀이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漢文의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漢文을 음독하지 않고(후일 日本의 訓讀과 같은 방식으로) 직접 韓國말로 풀이하면서 읽기도 했다고 보여진다. 9세기 중엽 新羅의 학자 薛聰이 “方言으로 九經을 讀解”했다고 史書에 전해진 것은 이를 말하는 것 같다.
또 반대로 漢字를 이용해서 韓國語를 표기하기도 하였으니 가요를 기록하는 데 쓰여서 현재도 남아온 新羅鄕歌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漢字의 訓을 주로 하고 音도 함께 이용되었는데, 一音一字의 체계가 형성되지 못하여 日本의 ‘萬葉假名’과 같은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漢文을 순서대로 중국식 자음으로 읽었지마는 韓國에서는 독법에 있어서 전연 새로운 한 방식이 생겨났다. 즉 漢文문장에서 단어 및 구절 사이에 韓國語 조사들을 삽입하여 이로써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主語임을 조사로 표시하고 또 文章의 종결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이 이른바 新羅 이래의 ‘口訣’이며 또 ‘吐’라고도 하였다. 삽입하는 그 韓國語 조사를 무엇으로 표기하느냐 하면 그것은 漢字를 차용하여 그 획의 일부를 따서 부호로 삼아서 韓國어 조사를 표기한 것이다(마치 日本의 片假名에 유사한 부호가 되었다).
이런 口訣文은 한글 창제후에는 口訣 부호들이 한글 문자로 바뀌어 문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른바 懸吐文이 되었다. 그러니 懸吐文은 漢文의 문체와 자순을 그대로 둔 채로 읽되 語句들을 分節하여 한국어식인 조사를 삽입하는 독특한 방식인데, 여기에 더욱 독특한 것은 孔子 孟子 또는 佛世尊 같은 성현의 언동에 관련되는 문장의 縣吐에서는 반드시 경어표현을 첨가하였다(“하시니” “하시온데” 등). 漢文 원문에는 전연 없고 중국어 자체에도 없는 경어법을 漢文 直讀에까지 가미한 점은 또 다른 한국적 특색의 하나라 할 수 있다.
漢文을 읽는 데 뿐 아니라 漢文작성을 할 적에도 한국어 조사를 삽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官衙의 행정 공문에 사용되던 문체로서 ‘吏讀文’이라 일컬어지며, 여기에서는 조사부분을 漢字로 표기해서 漢文 본문 속에 揷入 병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식 漢文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漢字는 한국에 조기에 정착하였다. 일찍부터 漢文으로 저작을 하여 역사서의 편찬이나 碑文의 撰述이 이루어져 이런 것이 금일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漢字 漢文이 더욱 보급되어 10세기에는 漢文의 과거시험이 실시되는 정도였다. 특히 지식층에서는, 徐兢의 <高麗圖經>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漢文서적에 대해서 크게 친숙해 있었고 문인의 시문집의 간행이나 또 漢文 불경의 보급도 넓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문화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高麗社會가 자국어를 기술할 문자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 주변의 遼朝가 契丹文字를, 金朝가 女眞文字, 西夏가 西夏文字를 각각 창제했으나 漢字를 모방한 이들 表意文字들이 모두 실제 통용이 되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을 고려인들이 보았을 터이니 이것이 他山之石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원인은 아마도 고려의 지식층이 일상의 구어는 기록하는 일이 없고 기록할 적에는 문장어로 하던 그런 이원적 어문생활과 같이, 고려 지식층도 일상의 고려어 생활에서 문자로 기록하는 일은 漢字로 하며, 備忘의 기록이나 書札이나 作詩 또는 著述 등의 기록을 할 적에는 漢文 文章語로 한다는 그런 이원생활이 당연시되었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한국의 獨自的 문자의 개발 욕구를 늦추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려말에 몽고족 세력하에서 표음문자인 위구르문자 및 파스파문자와 접하게 된 이후에는 독자 문자의 방향이 잡혀져서 표음문자인 한글이 창제된 것이다.
한글 創製 이후에도 조선시대의 지식층에게는 漢文 修得이 가장 중요한 기초교양이었으며, 漢文으로 치르는 科擧試驗이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漢文으로 된 詩文 작품들을 수록한 개인문집의 간행이 성하여 ‘文集’은 韓國書籍 중의 하나의 主要한 부류가 되었으며, 현재 한국의 여러 대학에는 ‘중국어문학과’ 이외에 따로 ‘漢文學科’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이다.
日本으로의 漢字 漢文의 전파는 그 시기와 擔當人名까지 알려져 있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서기 285년에 백제로부터 王仁이 論語 10권, 千字文 1권을 갖고 일본으로 가서 태자를 가르쳤다는 것이다(一年前인 284년에 百濟의 阿直岐가 가서 太子에게 경전을 가르쳤다고도 함). 그러니 처음부터 儒敎經典이 도입되고 漢文으로 가르쳤다는 것인데, 그때의 독법이 어떠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아마 처음에는 中國 字音대로 읽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는 동안에 역시 百濟로부터 佛敎가 導入되어(552년) 漢文으로 된 儒敎 및 佛敎의 경전들이 읽혀짐에 따라 漢字音의 두 갈래가 생겼으니, 儒敎典籍은 중국 長安 洛陽 지방의 표준적인 ‘漢音’으로 읽었으며, 佛敎經典은 남방의 ‘吳音’으로 읽히기도 하였다. 여하튼 초기에는 漢字음으로 字順대로 읽어 나갔으나(‘白讀’ 혹은 ‘素讀’) 곧 독특한 이른바 ‘訓讀’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訓讀은 漢文을 日本語의 어순에 맞추어 상하로 오가면서 일본어 直譯文으로 만들어 읽는 방법이다. 이는 아마도 新羅의 薛聰이 漢文을 “方言으로 읽었다”는 방식을 배워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도리어 일본에서 發展해나간 예로 생각된다.
漢文을 直譯으로 읽는 데에 필요한 助辭들을 표기하기 위해서 新羅의 口訣에 해당되는 符號文字가 9세기 무렵에는 생겨났으니, 이것이 漢字劃을 극단하게 簡略化한 ‘가다가나(片假名)’ 이다.
한편 일본어를 漢字로 기술하기 위해서 漢字의 音과 訓을 함께 차용한 이른바 ‘萬葉假名’가 생겨났다. 주로 日本語 가사를 기술하는데 쓰였으니 이는 新羅의 ‘鄕歌’의 기술방식과 흡사한 것이며, 이것 역시 新羅에서는 일찍 없어지고 일본에서는 오래 활용되었다.
이런 歌詞에서 사용되던 借用漢字의 草書體가 9, 10 세기에는 더욱 簡略化되어 一字 一音 체계로 굳어졌고, 이것이 주로 僧侶와 여자들 사이에서 ‘히라가나(平假名)’라는 표음문자체계로 발전되어 나갔다.
漢文을 일본어의 직역체로 변경시켜서 읽는 ‘訓讀’方式의 정착과 그리고 일본어의 表音文字인 두 가지‘ 假名’체계의 형성은 일본문화사상의 중요 계기를 이루었다. 중국의 漢文文化를 친근하게 도입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하였고 아울러 日本語의 보전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자체의 歷史記錄들을 작성하였고(古事記, 日本書紀 등), 또 日本語로 된 文學作品들도 나오게 되었다(萬葉集, 今昔物語集 등).
일본인은 漢文을 일어로 직역하면서 訓讀했고 漢文 좌우편에 返點 送假名 등을 붙이기는 했으나, 漢文 문체를 變更시키거나 解體하는 일없이 漢文 텍스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일본에서는 漢文書籍에 의존하고 漢文作文에 종사하는 지식계층도 형성되지 않았고, 이들을 바탕으로 한 科擧試驗도 없었다.
대체로 漢文 詩文의 보급과 발달이 한국보다는 훨씬 떨어지는 형편이었으나 그래도 近世 德川時代까지 일본에서는 漢文은 基本敎養이었고, 학자 지사들의 개인의 저술이나 중요한 역사기록들은 모두 漢文으로 엮어졌다(日本外史, 大日本史). 또 일본 최초의 西洋學術書의 번역인 和蘭의 解剖書가 <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일본어가 아닌 漢文으로 飜譯 刊行되었다는 것도(1774년) 漢文盛行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韓國과 日本에서는 古來로 漢字와 漢文이 함께 널리 受容되고 利用되어 왔지마는 이와는 달리 漢語 즉 中國語 白話는 처음부터 習得도 되지 않고 유통도 되지 않았다. 朝鮮王朝에서는 司譯院이 설치되어 會話 中國語(日, 蒙, 滿語도 함께)의 通譯人이 養成되었으나 이는 使行交換을 위한 극히 한정된 인원에 관한 일이었다.
문장어 漢文에는 능통한 사람도 중국어 회화에는 전연 白紙인 사람이 많았고, 三國의 지식인은 직접 상봉할 기회도 적었거니와 만나도 회화는 불가능하며 오직 漢文의 筆談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뿐이었다.
筆談 뿐 아니라, 語彙의 共通性은 상호의 理解增進과 學術文化交流에 큰 요인이 되었다. 漢字를 雙音節化한 漢字成語는 현재에도 韓日 兩國語의 語彙의 태반을 차지하는데 대개가 漢文에서 유래하였으나 서방문화의 섭취과정에서 近代 日本이 만들어낸 語彙도 많다. 앞으로도 漢字문화권에서의 用語 術語의 共通化는 필요하고 가능한 課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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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基本敎養, 社會文化의 共通性
三國은 오랜 歲月에 걸쳐서 靑少年의 敎育課程에서나 또 知識層의 社會生活에 있어서나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漢文書籍을 기반으로 해서 共通的인 基本敎養과 社會文化를 형성해 왔다. 儒敎의 經典, 諸子와 史書, 唐宋의 詩文, 程朱의 性理學, 佛敎의 思想과 藝術 등에 관한 주요 지식이 삼국 지식층이 공유하는 기본교양이 되어 왔다.
삼국의 이런 공통성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요인에서 由來한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文化가 주로 書籍을 통해서 發展되고 交流되어 왔다는 점이고, 둘째는 漢文이 不變의 文章語로서 韓·日에서 飜譯文으로서가 아니라 原文 그대로 통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첫째로 漢字文化圈은 早期부터 書籍중심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음이 顯著하다. 漢字라는 記錄手段의 早期 시작과 그를 이은 製紙術 및 印刷術의 早期 발달은 모두 中國에서 이루어졌으나 다시 발전하여 현재까지 장기간 중단 없이 傳承되어 온 것은 다른 文化圈에서 比肩될 사례를 찾기 어렵다. 오직 유럽 근세가 기간은 짧으나 이에 비견될 따름이다.
印刷文化가 한국과 일본에서도 早期에 발전하였으며, 한문서적들이 단순한 기록의 收錄物로서가 아니라 깊은 정신문화의 所藏處로서 尊崇되었다. 三國間의 文化交流는 唐宋代까지는 留學生 등의 인물의 交流를 통한 경우가 많았으나 明淸代에는 書籍交易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漢文 서적을 통한 知的 接觸은 주로 韓·日쪽에서 中國 것을 導入하는 一方向的 交流의 성격이 濃厚하였다.
韓國은 古代로부터 中國書籍을 다수 들여왔으며, 北宋 哲宗은 高麗에 中國의 善本이 많을 것으로 보고 120여종 약 5천권의 希求書目을 보내기도 하였다. 宋元이래로 性理學關係書는 물론이고 歷史 地理 文學 등 다방면의 중국서적을 得求하기에 노력하였고, 明淸時代 北京으로 가는 朝鮮使行들의 주요활동의 하나가 서적의 購得이었음은 수많은 燕行錄들의 기술에도 보인다.
朝鮮後期에서는 淸朝문물에 대한 '北學'사상으로 각종 實用書 및 西學書들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으며(崔漢綺 등), 일본의 漢文書籍들도 더러 지식층의 得見하는바 되었다.(星湖, 茶山, 洛下生 등)
日本도 古代로부터 漢文書籍의 收藏이 多大하였으니, 9세기말의 [日本國見在書目錄]에만도 일본에 현존하던 漢籍 1천5백여종이 수록되어 있고 壬辰倭亂에서는 韓國에서 書籍도 다수 掠奪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漢文書籍이었다.
일본도 明淸代에 중국으로 使行이 있을 때마다 中國書籍 求得에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淸朝말기에 중국인 外交官이 東京에 駐在하게 되자 그들 중의 學識者는 좋은 中國古書가 많이 尙存함을 보고 놀라움을 나타내었다.(1882년 欽差大臣으로 왔던 黎庶昌이 校刊한 [古逸叢書], 또 외교관이었던 楊守敬의 [日本訪書志] 등)
둘째로 漢文이 原文그대로 通用되었다는 점은 漢字文化圈으로 하여금 特異한 성격을 지니게 하였다. 위장에서 논술했듯이, 본래 漢字가 表意 記號文字이고 그로써 구성된 漢文文章은 중국어의 일상 口語와는 다른 文章語였으며, 이런 文章語는 時代나 地域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三國은 漢文을 읽는 방식은 각기 달랐으나 冊에는 언제나 漢文原文이 그대로 찍혀있고 文章語 그대로 둔 채로 읽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漢文의 飜譯이라는 것은 현대이전에는 사실상 三國에서는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中國안에서도 口語나 方言으로 飜譯된 일이 없다. 오직 근년에 고전을 '今譯', '今釋'이라 해서 白話文으로 飜譯한 것이 있으나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漢文本文의 解釋補助用이다.
言語가 다른 韓國과 일본에서도 그렇게 많이 읽히는 四書三經조차도 독립된 번역본으로 나온 일이 傳統時代에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15世紀中葉 한글창제이후에는 儒敎 佛敎의 重要經典에 대하여 "諺解"들이 編纂 刊行되었는 바 이것도 漢文 本文을 解得하는데는 補助하기 위한 譯解였다. 한글을 이용한 번역문만을 독립적으로 간행한 서적은 사실상 없었다(초기의 釋譜詳節이외는).
일본에서는 漢文을 읽는 것 자체가 日本語飜譯(訓讀)이었으나 본문과 독립된 번역본으로 나온 것이 없었다. 일본에서도 四書三經조차도 그러하였으니 다른 漢籍들이 번역 간행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다만 興味있는 例外라 할 것이 朝鮮 成宗 때의 文臣 崔溥가 지은 {錦南漂海錄}이 1769년 일본 京都에서 {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日本語 번역본(譯者는 儒者 淸田君錦)이 간행된 사실이 있다.
三國의 지식층들이 유교 불교나 사상 역사 문학의 서적들을 각기 自國語의 번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恒常 동일한 漢文 그 자체대로 接하고 있었다는 것은 知的 형성과 교류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형상이었다. 여러 분야의 술어와 용어 및 槪念表現이 같을 뿐 아니라 故事成語나 주요고전의 短句까지를 그대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지식의 共通性은 知識層 상호의 接觸에 있어서 筆談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서 전반적으로 문화전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文化共屬意識을 형성하게 한다.
漢字文化圈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전통적으로 품어왔던 人間觀, 世界觀 그리고 社會文化意識이 어떤 것이었나 누구 나가 首肯할 수 簡明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광범한 文化傳統들 가운데서도 삼국에 공통적인 가장 기초적인 문화전통은 "儒敎的 人間倫理의 强調"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西方勢力과 맞부딪치기 이전의 근세 수 세기동안, 동아시아 삼국은 정치적으로는 밖으로 鎖國政策을 쓰고 안으로 강력한 中央集權體制를 추구하며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崇奉하였다.
儒敎倫理를 宣揚하는데에 국가가 직접 나섰으니 이 시기를 동아시아의 '儒敎時代' 라고 칭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明 淸代에는 백성들의 儒敎的 道德을 강조하는 '六諭'를 역대 제왕이 지방 향리에 浸透시키도록 노력하였고, 조선왕조에서는 儒敎倫理와 性理學的 의례의 철저한 遵奉을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보다 더 강하게 추진하였고, 또 德川幕府의 일본에서도 민중윤리로서 유교도덕을 前例없이 강조하였다.
유교적 인간윤리가 이 시기의 한자문화권에서 구체적으로 강조되어온 항목들을 試擧해 본다.
自己主張의 抑制 - 자기 개인의 존재와 권리를 자제하는 謙遜 謙讓을 美德으로 평가함. 자기의 능력을 誇示 宣傳하는 것을 不美한 것으로 看做함.
財利 逸樂의 賤視 排擊 - 質素儉朴을 존중하고 奢侈를 배격. 末利 추구의 상업을 천시하고, 士農工商이라는 차등적인 사회계층 및 직분관념을 인정함.
大義名分의 强調 - 苦難을 당하더라도 원칙과 명분을 고수해야한다는 실천을 강조함. 忠君愛國行動으로 나타나고, 혹은 당파적 투쟁으로도 전개됨.
上下差等의 守護 - 연령 신분 직위 남녀별에 따른 등급차별을 擁護하여, 이로써 사회의 안정도 또 停滯도 초래하고, 한편 정치적으로 전제주의도 庇護함.
家族 家門의 置重 - 家族結合 효도실천 조상제사 등의 치중이 門族의 단합과 相互援助를 가져오나, 문중구성원의 독립심 沮喪 및 依賴 懶怠心의 助長도 가져옴.
敎育 文化의 尊重 - 교육과 서적 및 문필의 존중, 그리고 文官과 文治의 선호가 두드러짐. 지나친 인문존중이 산업 발전에 대한 관심 疎忽을 초래함. 4. 新世紀의 漢字文化圈
21세기로 들어오면서 한자문화권은 중대한 시련을 거치면서 커다란 전환을 겪게 되었다. 지난 19세기까지는 삼국이 비록 서로의 인적접촉과 물적 교류를 배제한 '疏遠關係'에 있었으나 그래도 漢文科 서적을 기반으로 한 공통적인 정신교양과 사회문화를 지니고 있어서, 漢字文化圈의 통합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었다.
그러나 19세기후반부터 서방문물과의 직접적이고 넓은 접촉은 漢字文化圈의 동요와 갈등, 자기 전통문화에 대한 貶下와 외면, 그리고 서방문화에 대한 尊崇과 추종을 가져왔다.
약 1세기간의 무시와 냉대를 거치다가 20세기 후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는 더욱 커다란 시련을 겪게되었다. 漢字文化圈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분열과 혼란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문화권의 기반인 漢字自體의 存廢가 문제된 것이다.
漢字는 劃數가가 많아 복잡하고 비능률적이며 인민대중에 접근하기 어렵다하여 중국대륙에서는 劃數를 주린 簡體字가 이전의 繁體字를 광범위하게 代替하였고, 북한에서는 漢字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어 전면적으로 폐지되어 한글만이 記錄媒體가 되었고, 남한에서는 한글 專用法을 강력히 시행함에 따라 漢字의 使用이 급속한 減少趨勢에 있고, 일본에서는 使用漢字의 수를 제한하고 또 略字形을 制定하여 시행하고 있다(常用漢字, 當用漢字).
그러니 臺灣을 제외하고는, 漢字文化圈의 대다수 人口와 대부분 地域이 종전의 漢字와는 다른 文字生活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漢字文化圈'이라는 용어가 適用性을 잃게 되었다. 실제상으로도 漢字知識만 가지고서는 이 지역의 新聞雜誌의 이해가 어려움은 물론이고, 거리에서 간판이나 告示文의 식별도 어렵게 되었다.
漢字가 落泊의 운명을 걷고 있음과는 대조적으로, 漢字文化圈의 문화 전통에 대해서는 종전까지의 貶下的 否定的 평가에서부터 急轉換하여 讚揚的 肯定的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근년에 漢字文化圈 안의 국가들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원인을 그들의 전통문화 속에서 찾으려는데서 이런 긍정적 평가가 나온 것이다. 이런 새로운 평가의 타당성 여부는 且置하고 종래의 지나치던 貶下的 否定的 평가가 여기에서 是正되는 일면이 있게 되었다.
漢字가 옛날의 榮光된 지위를 다시 찾게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도 三國에서 簡-繁 兩體의 통일화, 전산코드의 동일화 등을 협의하는 모임들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으나 단순치 않은 문제들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漢字르 버리고 表音文字인 拐●音文字로 전환하거나 또는 라틴文字를 채택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현실적으로 共用言語로서의 실제적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는 英語의 기능도 주목해야 한다.
漢字文化圈안의 지식인들로서 隣國 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적고 隣國事情을 그 나라 新聞放送을 통하기보다 오히려 영어로 된 言論媒體를 통해서 파악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실정이다.
그러니 사용하는 문자와 언어의 문제는 아주 장기적으로 대처할 자세를 취하여 연구결과와 輿論調査를 勘案하면서 자연적 추이도 고려하면서 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漢字文化圈이 지녀온 문화전통은 그것이 오랜 동안 깊고 넓게 젖어있었던 만큼 앞으로도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각국이 전통과의 단절을 指向함이 아니라 전통의 傳承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종래의 문장어 古典이 아니라 현대어로 번역된 고전을 더 접하게 됨을 뜻한다.
중국 대륙과 대만에서는 古典漢文을 현대중국어로 번역하는 이른바 '今譯'의 간행이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남한과 북한에서는 자체의 漢文史書 등을 현대한국어로 번역 간행하는 작업을 상당한 정도로 進陟시키고 있으나, 아직 재래의 중국고전의 韓國語譯의 작업은 미흡한 실정이다.
그러니 중국고전에 대해서 현대한국인들은 과거의 漢文本으로는 읽을 줄 모르고 韓國語譯本은 존재하지 않아, 현재는 고전접근에서는 일종의 眞空狀態에 빠져있는 형편이다.
일본에서도 戰後에는 학교와 사회에서 한문본 중국고전에의 접근도가 옛날보다는 훨씬 낮아진데다가, 漢文古典의 일본어 번역도 간행되어 나온 것이 다른 출판물에 비한다면 거의 없는 형편이다.
결국 현대 동아시아인에게는 在來의 漢文古典에 接할 기회라는 것은 유럽인들이 유럽 諸國語 飜譯을 통해서 中國古典에 接할 수 있는 기회보다 오히려 적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것은 거꾸로 漢字文化圈의 전통적 사상과 文化가 유럽語 또는 東아시아 현대어의 번역을 통해서 더 넓게 세계로 전파되어 더 큰 普遍性을 獲得하게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근년에 유행적으로 논의되던 이른바 '아시아적 價値'論, 즉 동아시아의 儒敎的인 정신문화전통이 그 지역의 근년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바탕이 되었다는 그런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漢字文化圈에서는 대체로 근세 수세기동안 性理學的 유교이념이 강하게 지배해왔지마는, 그 이념은 기본적으로 社會名分과 實踐倫理에 중점을 둔 것이어서 이념적으로는 오히려 경제성장을 외면 천시하였고 또 사실상으로도 성리학적 이념의 지배의 강도가 높았던 지역일수록 그리고 높았던 시기일수록 경제 성장이 오히려 沮害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漢字文化圈은 그 바탕이 되는 漢字 자체가 나라에 따라 變改, 制限 또는 거의 沒落의 운명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文化圈으로서의 統合性은 喪失되었고, 또 불변의 古典漢文이 原文 그대로 직접 전승시켜주던 그런 기초적 공통적 교양도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漢字文化圈은 이제는 해체되었다고 보고 死亡申告를 내야 할 단계에 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첫째로 한자문화권은 종래의 漢文原文을 위주로 한 전승방식에서 벗어나서 漢文古典의 내용을 韓 中 日이 모두 각기의 현대어로 습득하고 또 전승하는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고전내용에 대한 把握과 이해가 도리어 옛날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제적일 수도 있다.
둘째는 漢字文化圈이 근대에 과감하게 서방문물을 섭취하면서 사회문화상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크게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그러나 그런 속에서 아직도 재래의 문화전통을 뿌리깊게 지니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런 점은 경제발전에는 도리어 沮害要因이 되었을 수 있으나, 앞으로의 21세기 사회에서는 漢字文化圈이라는 명칭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으나, 새로운 의미를 갖고 재등장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과학기술의 무한한 발전과 인간의 무한한 逸樂追求를 당연시하는 그런 姿勢에 대한 정신적 防波堤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 새로운 인간사회이념의 형성을 주도할 중심지역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