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르 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바람의 열두 방향』, 시공사, 2004 중에서)을 읽고
1. 실없는 사람
사과부터 먼저 드립니다. 12월 28일, 가장자리 동창회가 있었지요. 일 때문에 약속 시간인 오후 5시에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늦게라도 꼭 참석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총파업 소식에 정신이 멍한 것이, 홍대 쪽으로 발걸음이 도저히 안 떨어지더라고요.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살고 있나 싶은 게, 참.
2. 판타지
원체 책을 많이 읽지도 않지만, 판타지는 안 땅기는, 그랬지요. 해리포터 어쩌고, 반지의 제왕 저쩌고 하는 열풍에 더더욱 멀어지는. 근데, 이 단편 참 재밌더군요. 워낙 유명한 작품인가 본데, 여태 모르고 살았네요. 이런 모임에나 나오니 추천받을 수 있었겠지요? 다른 분들도 한 번 읽어보세요. (한국어: http://blog.naver.com/hisgoing?Redirect=Log&logNo=140000320975 / 영어: http://www-rohan.sdsu.edu/faculty/dunnweb/rprnts.omelas.pdf) 모두들, 감사드려요. 특히 이 책의 추천자이신 찬민 쌤, 찬미 받으소서.
3. 행복의 조건
지난 번 책 엄기호를 읽으면서, 제가 행복을 언급했잖아요. 책에 숱하게 열거된 불행의 면면들은 분명 엄기호의 잘못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탓이지만, 엄기호는 ‘행복’의 가능성을 너무 좁게 놔두지 않았나 하는 그런 얘기를 했었지요. 르 귄의 이 단편은 어떻게 보면 정반대인 셈이지요. 행복의 면면 뒤에 자리한 불행. 불행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이건 어떠냐, 제 코 앞에 바로 들이민 듯한.
“행복해”라는 나지막한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가운데 편의점 김밥을 우적우적 씹으면서도 돈벌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회상하며 별 것도 아닌 것에 웃음보가 터지던 장면, 공감가시지요? 싫다고 됐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마흔을 내다보고 있는 제 입으로 사과 한 쪽이라도 더 집어넣으시려는 어머니,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행복은 와장창 맞은 돈벼락, 격렬한 섹스의 뒷맛, 은밀한 복수의 성공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지요. 정말 낡은 말이라 갖다 붙이기 정말 구리지만, 진정성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행복은 왜 이렇게 짧은 건가? 행복이 찰나라면, 그 나머지는 무엇인가? 그 짧은 행복과 행복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흉물스런 것들. 어쩔 때는 그 몹쓸 것들을 감내해야지만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덩달아 그 행복도 더러워지는 겁니다. 내가 애초 원했던 행복이 이런 것이었던가?
행복으로의 동기는 어떻습니까. 나도 남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어서, 나만 불행하기 싫어서 행복을 좇는 것은 아닌가. 성공과 자아실현을 위한 분투에서 낙오하다 보니 그 대체물로서 행복에 만족하는 척 하는 것은 아닌가.
행복도 수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는 행복도 그 차원을 따져봐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위에서 열거한 행복들은 죄다 개인적인 것들이지요. 어느 순간 이렇게 돼 있더란 얘깁니다. 개인적인 차원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된 나의 행복이성. 타인에 대한 불신 그리고 연대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서 개인적 차원의 행복으로 도피.
4. 유토피아
사실, 소설은 행복보다는 유토피아, 영원하고 완벽한 행복의 실현체인 유토피아 이야기가 중심이지요. 르 귄은 작가의 말에서, 푸리에, 에드워드 벨라미,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가지고 안 된다는 윌리엄 제임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가 참으로 매가리없어 보인다고 조지 오웰도 지난 번 제가 언급한 글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지요. 이 조지 오웰을 자주 언급하는 우리나라 작가로 고종석이 있습니다.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저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박학다식도 으뜸이지만, 솔직함이 가장 큰 매력이지요. 그의 트위터에 최근 올라온 글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가져와봅니다.
“그런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므로. 인류의 진화단계가 그런 세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적 기대에는 늘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실천의 동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최대주의 도덕은 환멸과 염세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반-유토피아적 최소주의 도덕이다. 남을 사랑하려 애쓰지 마라. 남을 존중하려 애쓰라. 남을 증오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도록 애쓰라. 낙원을 향한 기대는 절망으로 이어진다. 감성적 낙원팔이들에게 속지 말고, 제 한몸 닦는(수신) 데 애쓰라. 세속도시는 결코 성스럽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삶과 세계의 모델을 포기하는 것이어서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그러나 그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은 근본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모든 거짓 선지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휴머니즘은 늘 자기 안의 악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을 증진하는 노력이 아니라 악을 감소하려는 노력이다. 최선에 대해 합의할 수 없으니, 최악에 맞서서라도 상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파멸을 막는 도덕은 만류의 도덕, 곧 소극적 도덕이다. 이 만류의 도덕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인간Man과 역사History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 별 거 아니다. 그것만 인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면, 세상의 많은 악을 피할 수 있다.”
기질상 유토피아적·근본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 같은 저로서는 당장 반박하고 싶어지는 글이었습니다. 결국 현실에 영합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애초 실천의 동력이 있을 수 있겠냐, 최소주의로는 나날이 커지는 악에 계속 끌려가는 것 아닌가, 괘씸함에 발을 동동 굴렸지요. 허나, 왜 이리 눈길이 그 쪽으로 돌아서는 것인지. 위 글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읽은 소설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해설서인 듯 싶은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거에는 역사결정론자들(2차 인터내셔널 이론가)이 유토피아는 프티부르주아의 망상이라고 꾸짖더니, 현재는 현실주의자(고종석과 같은 합리적 자유주의자)가 반-유토피아만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지적하는 건가요? 유토피아는 정말 죽은 개인가요?
5. 지하실의 아이
유토피아는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암만 ‘그 곳’ 자체를 떠올리려 해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요. ‘이 곳’을 비틀든지 뒤집든지 어쨌거나 ‘이 곳’을 결부하지 않고서는 ‘그 곳’을 떠올리기 힘들지요. 유토피아나 오멜라스라는 단어부터 어떻게 나온 건지 아시지요?
노예, 기사, 왕, 주식 시장, 광고, 비밀 경찰, 폭탄, 자동차, 헬리콥터는 없지만, 중앙 난방이나 지하철, 세탁기는 있습니다. 아차, 도처에서 맡을 수 있는 마약 냄새를 빼놓을 뻔 했네요. 아쉽게도(?) 난교는 없군요. 종교는 있지만, 사제는 없습니다.
책에서 열거하는 것들, 왜 이렇게 코믹하던지요. 유토피아의 핵심은 물질적 토대가 아니라 주체, 즉 사람이라는 반증이겠지요. 지하실 아이의 존재.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오멜라스 사람들의 반응. 사실, 저는 처음에 매우 개인적으로 읽었습니다. 저희 집안에도 이런 녀석 하나가 있어요. 사촌 녀석 하나가 어려서 머리를 다쳤어요. 부족하다보니 상식을 벗어난 여러 만행(?)을 저질렀고, 정말 극단적인 이야기가 오고갈 정도였지요. 어느 순간, 모든 가족이 그 사촌을 배제하고 있더군요. 없는 셈 치는 거지요. 있어도 없는 존재. 우리 가족은 행복하지요.
지하실 아이를, 어느 글에서는 제3세계 인민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어느 글에서는 무산계급을 비유한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늘 직시해야 할 “자기 안의 악”(고종석), 혹은 유토피아를 향한 여정 중에 잊혀지거나 배제되는, 따라서 유토피아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읽었답니다. 여러분은?
6. 소설의 결말
지하실에 갇힌 아이는 괴물을 보고 자지러진다. 아이를 지하실에 가둔 어른들은 아이 역시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기를 강요했고, 괴물이 되고 나서야 아이는 괴물의 환영에서 벗어난다. 영화 『화이』의 줄거리가 이랬던가. 한편, 지하실의 자루걸레를 무서워하던 오멜라스의 그 아이는 “착한 아이가 될 게요.” “말 잘 들을게요.”라고 울며 애원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아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멜라스인의 반응은 수긍[타협]이다. “그 아이에 대한 의롭지 못한 행위에 가슴 아파하면서 흘리던 눈물은 현실이 보여 주는 이토록 끔직한 정의를 알아차리고 수긍하기 시작할 때면 메말라 간다. 오멜라스 사람들의 빛나는 삶의 원천이야말로 그들의 눈물과 분노, 관용을 베풀려는 의도, 그리고 무력한 수긍에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비록 이따금씩 이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들이 향한 곳은? 어둠 속.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 이 곳의 이름은 유토피아를 넘어선 진정한 유토피아인가, 세속 도시로서의 반-유토피아인가.
지금은 12월 30일. 철도노조가 파업을 철회했다는 기사로 오늘 하루도 시끄러운 가운데.
첫댓글 함께했으면더좋았을텐데..
그래도글로나마만날수있어반가웠어요^^
읽기모임내내쌤의향기(?)가가득했다는ㅎㅎ
앞으로도계속함께읽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