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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동백꽃 보러 간다 / 송찬호
거긴 혁명가들이 우글우글 하다더군
오천 원짜리 음료수 티켓만 있으면
따뜻한 창가에 앉아
불타는 얼음 궁전을 볼 수 있다더군
거긴 백지만 한 장 있으면
연필 끝에서 연애가 생기고
아직도 시로 빵을 구울 수 있다더군
어느 유명한 사상가의 회고록도
거기도 집필됐다더군
고요한 하오에는 붉은 여우가
소리 없이 정원을 지난다더군
길의 방향은 다르지만, 폭주족들의
인생목표도 결국 거기라더군
그리고 거기는 여전히 아름다운
장례의 풍습이 남아 있다더군
동남풍
바람의 밧줄에
모가지를 걸고는
목숨들이 송두리째
뚝, 뚝 떨어져내린다더군
나, 면회 간다
동백 교도소로
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송찬호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 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나비 /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봄날 /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촛불 / 송찬호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계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접시라는 이름의 여자 / 송찬호
한때는 저 여자도 불의 딸이었다
불꽃이 그녀의 일생일 줄만 알았고
사랑만이 오직 불순물처럼
그녀의 일생에 끼여들 것으로 알았다.
여자는 언제나 열심히 접시를 닦는다
거품 속에서 여자는 잠시 행복해진다
거품 속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은 것처럼,
접시의 당초무늬가 퉁퉁 불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진다
그런 그녀가 잠시 외출 나와 창가의
내가 즐겨 앉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았다 잠시 나는 점잖게 미소만 띄워보냈다
여자의 손톱 밑에서 양파 냄새가 배어나오고
설사 그녀가 읽는 책 속에서 내가 싫어하는 카레 요리가
쏟아져나온다 했을지라도 그렇게 나는 미소만 띄워보냈을 뿐이다.
여느 성미 급한 손님처럼
종업원을 불러 이렇게 소리치지도 않았다
여기 이 먹다 버린 지저분한 접시 좀 빨리 치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단지 나는 맞은편에 조용히 다가가
넌지시 이렇게 속삭였을 뿐이다
부인, 지금 집에서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답니다
오후 여섯시, 마요네즈 군대가 쳐들어온다
토마토 군대가 쳐들어온다
그 끔찍한 남편과 아이들이 쳐들어온다
봄날을 가는 山經 / 송찬호
이그, 저기 가는 저것들 또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멧부리를 닮은 잔등 우에 처자를 태우고
또랑물에 적신 꼬리로 휘이 훠이 마른 들길을 쓸고 가
고 있는 牛公이
어깻죽지 우에 이름난 폭포 한 자락 걸치지도 못한
저 비루먹은 산천이 막무가내로 봄날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일자무식 쇠귀에 버들강아지 한 움큼 꽂고 웅얼웅얼
가고 있는 저 풍광이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 춘궁을 넘어가는
저 비탈의 노래가 저러다 정말 산경의 진수를 찾아 들어
가는 거 아닌가
살 만한 땅을 찾아 저렇게 말뚝에 매인 집 한 채 뿌리
째 떠가고 있으니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 송찬호
우리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민들레역 / 송찬호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가 매여 있지 않은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먹고 있다
에구, 이 철없는 쇳덩어리야,
오목눈이 울리는 뻐꾹새야
쪼르르 달려나온 장닭 한 마리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
민들레 여러분, 병아리양말 무릎까지
끌어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
네, 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섭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
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
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
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고래의 꿈 / 송찬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동백이 활짝, /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 2000년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시
동백 /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 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사과 / 송찬호
여기 이 붉은 곳은 사과의 남쪽, 홍수의 개미들이 위태하게 건너가는
저 녹슨 철사줄은 사과의 적도, 그리고 물컹하게 썩어가는 여기 이 곳이
사과의 광대뼈
이제 허리 구부러진 저 늙은 사과나무의 무릎에서 사금을 캐지 말자
탈옥의 휘파람을 불지 말자 생의 달콤함을 훔쳐 달아나던 팔월의 사과도
저렇게 붉은 조끼 한 벌로 포박돼 가지 끝에 매달려 있으니
부카치카 부카치카, 벌판으로 달려와 허공으로 앞머리를 번쩍 쳐든
바람의 하모니카 여기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개망초 나라,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망촛대 몇 단 부러뜨려 침목으로 베고 누운 곳, 물 한그릇
떠놓을 성소조차 없는 이곳은 사과의 뒤편
여기쯤 파란대문이 서 있었겠다 이 문으로 사내들은 진귀한 낙타눈썹
을 찾아 사막으로 떠나고 얼굴 검은 여자들이 태양의 분을 바르고
십리를 걸어 마마와 기근을 영접했겠다 그래도 여길 다시 한 번 보아라
돌로 쌓은 여뀌즙 사랑은 여전히 물고기눈을 찌르고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도 아이들은 분수처럼 솟고 천 일의 밤을 팔아 아침 한 때를
맞이하리니,
누군가 한 입 베어먹고 멀리 던져버린 여기는 사과의 궁전
첫댓글 빠마머리도 여전하시고 여전히 변함이 없으시네요^^ 10년전인가요? 문경으로 여행갔던일이 버얼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