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말뿌리 놀이 2 - 구멍가게 이야기
영어이름으로 된 편의점들이 구석구석 불을 밝히는 요즘 이따금 대기업 편의점 소속이 아닌 가게들을 만나면 반갑고 정겹기도 하다. 그런데 간판을 보면 ‘나들가게’라는 말이 씌여 있다.
아마도 예전에 쓰던 구멍가게라는 말을 요즘은 나들가게라는 말로 순화(淳化)해 쓰는 모양이다.
편의점이 대기업의 프랜차이즈인 24시간 영업을 기본으로 하는 대로에 인접한 주택가 입구에
위치하는 소매가게라면 그 이전에 골목 끝자락이나 골목에 위치했던 가게를 ‘구멍가게’라 불렀었는데 왜 굳이 ‘나들가게’라고 바꾸는 부르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부르는 호칭이 바꾸는 것은 일시적 착시효과는 있을지언정 그 본질을 바꾸기 전에 변화가 없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법으로 ‘참기름’의 성분을 규정하거나 단속을 해야지 이름만 ‘순 참기름’ ‘100% 순 참기름’ ‘진짜 100% 순 참기름’ ‘수퍼 울트라 킹왕짱 진짜 100% 순 참기름’이라 붙여도 가짜 참기름은
여전하게 마련이다.
양아치 같은 놈들이 혹 지들 은어(隱語)로 창녀촌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왕년에 들은 적이 있지만
잘못은 은어를 쓰는 놈들에게 있지 어찌 우리말에 있겠는가.
얘기 나온 김에 ‘구멍가게’란 말의 어원(語源)을 좀 알아보자.
용비어천가에 보면 요즘은 골목에 해당하는 말은 ‘굴헝’이었다.
먼저 ‘골’이란 말을 생각해 보면 ‘골’은 주변부에 비래 낮은 지점이 연속되어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산등성이 밑에 ‘골짜기’가 있을 것이고 ‘이랑’ 밑에 ‘고랑’이 있을 것이다.
첨가되는 어미는 다소 다르지만 모두 ‘골’이 중심부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말 ‘골’은 아마도 중국 한자어 굴(堀)이란 단어에서 온 듯하다.
원래는 무언가를 파내서 움푹 파인 곳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땅 파는 포크레인을 가리키는 굴착기(掘鑿機)등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년전에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 오사카의 유명한 쇼핑거리 도돈부리(道頓掘)에 가보니 인공 개울을
파서(堀) 그 흙으로 돋운(道頓) 곳으로 짐작되기도 하였다.
굴(堀)이 우리말 ‘골’이 되었다고 보면 ‘골’에서 중요한 지점을 가리키는 ‘목’이란 말이 결합하여
‘골목’이 되고, 골이 다시 좁게 갈라져 새끼를 치면 ‘샅’이란 말이 붙어 ‘골샅’이 되었는데
후에 리을이 탈락하여 고샅 혹은 고샅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항(巷)이란 단어는 거리 골목 등으로 쓰이는 중국어로 여항(閭巷)이란 단어에서 보듯 마을이란 뜻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침수가 잘되는 낮은 지대의 거리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서민 장사아치들이 사는 downtown 정도의 마을을 가리키는데 사용했다.
용비어천가 48장을 보면 전절에 금나라 태조의 활약상을 후절에는 태조 이성계의 용맹성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편의상 아래 아는 아로 표기하고 밑줄을 긋는다)
굴허에 마랄 디내샤 도자기 다 도라가니 半(반) 길 노팬달 년기 디나리잇가.
石壁(석벽)에 마랄 올이샤 도자갈 다 자바시니 현 번 튀운달 나미 오라리잇가.
이것을 한역(漢譯)해 놓은 것은 다음과 같다.
深巷過馬(심항과마)하사 賊皆回去(적개회거)하니
雖半身高(수반신고)인들 誰得能度(수득능도)하리오.
絶壁躍馬(절벽약마)하사 賊以悉獲(적이실획)하니
雖百騰奮(수백등분)인들 誰得能陟(수득능척)하리오.
이것을 현대어로 풀이하면
굴헝(구렁)에 말을 지나게 하시어 도적이 다 돌아가니, 반 길의 높이인들 남이 지나리이까.
(금 태조가 홀로 적정(賊情)을 살피러 갔다가 발각되어 적에게 추격을 당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말고삐를 잡아채어 높은 담을 훌쩍 뛰어 넘어 도망가니 추적자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돌 절벽에 말을 올라가게 하시어 도적을 다 잡으시니, 몇 번을 뛰게 한들 남이 오르리이까.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엽 지리산 쪽에서 왜구들과 전투할 때 말을 타고 높은 바위 위로 뛰어 올라,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왜구를 제압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최초로 쓰인 ‘굴헝’이란 단어는 바로 요즘의 골목길을 말한다.
원래는 ‘헝’의 받침 이응은 꼭지가 있는 옛이응으로 발음이 확실한 이응이다.
우리가 흔히 ‘이응’이라 하지만 받침을 제외한 이응은 비어있다는 영(零)의 개념이고 받침의 이응만
제대로 음가(音價)를 가진 이응이었다. 그런데 한글자모 28자가 한자만 최고로 치는 양반들 사이에서 괄시 당하고 게다가 임진 병자 양란 등을 겪으며 24자로 줄어드는 과정에서 옛이응의 형태는 사라지고 발음만 남은 것이다.
굴헝에서 히읗이 탈락하고 굴엉이 되었다가 다시 리을이 탈락하여 구렁이 되는 과정에서 일부 지역이나 계층에서는 구멍이라 변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굴헝가게’가 변한 ‘구멍가게’는 주택가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가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가게’라는 단어도 중국어 가가(假家)에서 온 말로 원래는 5일장 등의 장터에서 임시로 벌려 놓은 가짜 집 혹은 임시 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보다 더 고정적인 형태의 가게는 전(廛)이란 단어가
있다. 조선시대 종로의 육의전(六矣廛) 등에 쓰이는 단어이다.
그 전 앞에 펼쳐 놓은 노점을 어지러울 난(亂)자를 써서 난전(亂廛)이라 하여 예나 지금이나 단속을
하곤 했던 것이다. 이 전(廛)만을 쓰다 보니 그 뒤에 방(房)을 붙이는 경우도 생겨났다.
중국에서 방(方)은 원래 사각형 공간을 가리키는 말인데 거기에 출입문을 의미하는 호(戶)가 붙은 것이니 아마 우리가 ‘점빵’이라 부르는 ‘전방(廛房)’은 가게에 물건 전시공간 외에 주인이 앉아 쉴 수 있는 방 하나가 붙어 있는 형태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부록으로 앞에 소개한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보면 요즘 표현법과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금나라 태조든 조선 태조든 두 사람 다 말을 탔는데 꼭 “지나가게 하시어”, “올라가게 하시어”라는 표현을 써서
요즘의 “말을 타고 지나갔다”는 표현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나가거나 올라간 것의 주체(主體)는 사람이 아니라 말이다.
사람은 그저 말 위에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고삐를 움켜쥐었을 뿐이지 실제 행동한 것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말을 부린 자에 불과하기에 사동(使動) 표현을 쓴 것이다.
그래서 존칭의 뜻인 ‘시’는 말을 부린 사람에게 붙인 것이다.
이 정도면 현대인인 우리가 15세기 사람들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추신-
글을 올린 뒤에 한 가지 더 생각나서 추가합니다.
가게를 전(廛)이라 했다는 것은 앞에 말했는데 남의 가게나 다른 가게를 ‘딴 전’이라 했다.
우리가 흔히 ‘딴전 본다’ 혹은 ‘딴전 피운다’ ‘딴전 부린다’ 등의 표현을 한다.
‘딴전 피우지 말고 그 얘기나 똑바로 해’ ‘신발가게에 왔으면 신발이나 고르지,
웬 딴전이야’ 등의 용법으로 사용한다.
딴전을 본다는 것은 이미 벌여 놓은 자기 장사는 제쳐 두고 남의 장사를 봐 준다거나,
다른 곳에 또 다른 장사를 펼쳐 놓은 것을 이르던 말이 바로 “딴전 본다”는 말의 어원인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