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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사랑시인선 107번 정해영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
정해영 시인은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고, 경북여고와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했다. 2009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현재 ‘대구문인협회 회원’ 및 ‘물빛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왼쪽이 쓸쓸하다}는 정해영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며, 인문학적 교양과 그 우아함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꽃 피어난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언어의 절제와 압축을 통하여 여백의 효과는 물론, 시적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그렇고,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묘사와 그 정서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의 허망함과 그 한을 삭히고 있는 것이 그렇다.
표제시로서의 [왼쪽이 쓸쓸하다]는 사회적 제도와 그 풍습 때문에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 ‘왼손잡이의 비애’를 뜻하지만, 그러나 정해영 시집으로서의 {왼쪽이 쓸쓸하다}는 그 ‘왼손잡이의 비애’를 초극하여 “봄의 문자 벚꽃잎”에서처럼 그 “눈부신 길을 낸/ 한 권의 책”([4월의 베스트 셀러])이 된다. 시적 승화의 아주 탁월한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잘 삭힌 “묵은 지 한 포기를 꺼내 징금징금 썰어” 내놓는 넉넉한 품새로 지은 “그늘 한 채”의 그윽한 裝幀 속에는 이름뿐인 옛 왕국의 신민들이 빚었던 즐문토기의 무채색 서러움이 서려 있지만, “모나지 않아 식솔들 둘러앉기 좋았”던 두레 밥상 같은 찰진 봄날의 화아아한 쑥 향기가 감돌고 있기도 하다. ‘오른손 주의’가 “거칠게 엄격”한 세계에서 왼쪽은 늘 “보랏빛 저녁놀에 쓸쓸하게 물든” 그늘일 수밖에 없으니 “물집처럼”, 푸른 멍처럼, “파도치는 슬픔”을 오롯이 견뎌야 했으리라. 하지만 물은 물이라서 그 어떤 모난 돌이라도 둥글게 삼켜 영롱한 진주알로 빚어내느니 그것은 “돌의 무늬”에서 “마른 울음”을 끄집어내는 눈물겨운 과정이기도 하다. 마침내 오래도록 ‘물빛’을 꿈꾸어왔던 시인의 꿈이 “노을 계단”의 “아름다운 60계단”에 이르러 “엷은 소맷귀 같은 달”로 걸렸으니 여기 아득히 눈부시다, 정해영의 시.
----장옥관 시인, 계명대학교 교수
어릴 적 밥상머리 가르침은 손등을 맞아가며 숟가락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세상 문리가 거의 오른쪽으로 트여 있어 오른손 주의는 거칠게 엄격했다 치열하게 오른손을 익히는 동안 본래의 나는 점점 이동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자식의 혼례식장에서 하객들과 악수를 나눌 때 가위 눌렸던 왼손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와 화사한 분위기를 찌르거나 제삿날 조상님께 올리는 눈물 담긴 술잔이 향불 위에서 슬그머니 왼쪽 길을 돌아 나오는 일은 막을 수가 없다 식구들 밥상을 차리다 느닷없이 봄빛 어른거리는 물길을 따라 나서고 싶다든지 한 해의 한 번쯤은 후미진 세계의 한 모퉁이를 후비듯 들여다보고 싶은 왼편의 꿈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나의 왼쪽에는 추억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가끔씩 뼈가 시린 까닭은 원래 나였던, 빈 그루터기에서 나는 바람 소리 때문일 것이다
-----「왼쪽이 쓸쓸하다」 전문
그러나 사회적 일상의 국면에서 낭만적 일탈에 해당하는 ‘본래의 나’는 거의 망각의 영역으로 가라앉는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진다. 가끔 일상의 표면 위로 솟아올랐던 “왼편의 꿈”이 말라버린 지 오래라고 시인은 허탈한 심정으로 읊조렸다. 더 나아가 “나의 왼쪽에는 추억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빈 그루터기만 남은 본래의 나 주위에는 허망한 바람 소리만 들리고 그 때문에 가끔 뼈가 시리다고 고백했다. ‘본래의 나’에서 소외되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자신에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신이 은폐하고 망각해 온 본래의 나, 자신의 분신이자 진정한 바탕에 대한 향수가 마음의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시인만이 아니라 인간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실존의 아픔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나에 대한 아픔을 고백했으나 알 수 없는 의식의 저층으로 가라앉았던 왼손의 능력이 시를 추동하는 힘으로 되살아나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뼈를 시리게 하는 그 바람이 그냥 텅 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월의 연륜에 의해 훈훈한 온기를 머금은 정감의 바람으로 승화되었으니 이것은 세상의 이치를 따라 자신의 본능을 억제한 데서 온 하늘의 축복이라 할 만하다.
----이숭원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그러면 생의 본능을 억제하고 실존의 윤리를 따라 살아온 여성의 내력은 어떠하였을까? 다음 시에 그 단면이 반영되어 있다.
반짝이진 않아도 새소리 감긴
생나무 결 무늬가 좋았다
등을 구부려 차려주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상
모나지 않아
식솔들 둘러앉기 좋았다
가끔 지우개 똥 같은 일이
채색 없는 가슴위에 어지럽게
엉겨 붙으면 거무죽죽하게 울었다
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접었다 펴는 사이
등위의 아이들은 해바라기처럼 자라
도시로 나가고
결이 삭아
접힌 채 펴지지 않는 엄마가
벽에 걸려 있다
「두레상」 전문
이 시도 가족을 먹이고 보살피는 ‘엄마’와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던 ‘두레상’을 동일화하여 비유의 축으로 삼고 시상을 전개했다. 엄마를 제3의 인물처럼 둘러말했지만 허리 굽혀 밥상을 차려주던 엄마는 시인 자신일 것이다. 엄마의 정성과 솜씨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세월이 갈수록 안으로 깊어지는 우물처럼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녔다. 그것은 마치 두레상의 재료가 된, 결 고운 생나무 목질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반짝이는 윤기는 없어도 새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 고운 물결무늬를 드러내고 있다. 모난 밥상이면 가로 세로 변에 따라 상하의 위계가 결정되지만 둥근 두레상은 위아래가 없는 평등의 공간이다. 엄마와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하나가 되어 밥을 나눈다. 어머니가 등을 굽히고 차려주는 밥상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식구들의 밥상을 차려주는 세월을 거치면서 등은 두레상처럼 더욱 둥글게 굽어졌다. 그래도 마음은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만큼 풍요로웠을 것이다. 누구보다 부유했을 것이다. 천하가 내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렇게 뜻대로 흐르지는 않는다. 둥근 두레상에 때가 끼고 금이 가듯이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지우개 똥”처럼 누추하고 지저분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은 흉한 자취로 남아 두레상에 엉겨 붙은 오물처럼 거무죽죽한 상흔을 남긴다. 그러나 애들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그런 “지우개 똥 같은 일”에 타격을 받을 리가 없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자고 역사(力士)다. 세파의 시달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두레상을 펴서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의 잔치가 끝나면 다시 밥상을 접는 동안 세월의 앙금도 사라지고 삶의 그늘도 사라진다. 어느새 아이들은 해바라기처럼 자라 강구(康衢) 대처(大處)로 벋어나간다. 그 사이에 엄마의 등은 갈잎처럼 무너져 허리를 펼 수 없게 된다. 마치 이제는 “결이 삭아”서 “접힌 채 펴지지 않는” 두레상처럼.
두레상은 엄마의 일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적 사물이다. 펴지지 않는 두레상이 말이 없는 것처럼 허리를 굽힌 엄마도 말이 없다. 장성한 자식들이 번화한 도시에서 몰려오면 마르고 금간 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으며 웃음의 눈물만 뿌릴 뿐이다. 천하가 이 손 안에 있었으니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아쉽겠는가. 젖 달라고 보채던 어린 것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자식을 낳았으니 고관대작도 부럽지 않은 것이다. 이 모든 찬연(燦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제는 결이 삭아 펴지지도 않는 저 두레상에서 시작되었다. 저 평등하고 차별 없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대자대비하고 무량무변한 어머니의 은혜에서 비롯되었다. 전생에서 후생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강을 만든 것도 어머니다.
나처럼 밥을 먹는다
나처럼 전화를 받는다
나처럼 그 곳에 간다
비슷한 내가 자꾸 태어난다
나의 전생인지 모른다
‘나’라는 나를 어디까지
찍어내는 것일까
모자를 두고 강을 건넌
여행자처럼
자꾸 뒤를 돌아본다
「아들의 아들」 전문
어느 선사가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80년 전의 그놈이 80년 후의 이놈이고 80년 후의 이놈이 80년 전의 그놈이로다. 여기에 대해 말해 보라.” 제자들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선사는 입적하였다. 어떤 선사는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인생이 무엇인가? 구구는 팔십일이로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심각하게 물을 것이 없다. 나의 자식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앞도 보지 못하고 강보에 싸여 응앙응앙 울며 젖만 탐하던 어린 것이 자라, 기고 걷고 달리고 생각하며 사람 노릇하다가, 늙으면 다시 쪼그라져 강보에 눕는 것이 인생이다. 한창 달리고 생각할 때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이 또 자라 자식을 낳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어머니다. 아버지는 정액 몇 방울을 선사할 뿐 아이를 열 달 동안 몸 안에서 키우고 보호하는 것은 어머니다. 서 말 서 되의 피를 흘리고 출산하여 열 말 열 되의 젖을 먹여 키우는 것도 어머니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인 분도 어머니다. 둥근 두레상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모아 한 상 그득한 생명의 풀밭을 차려준 분도 어머니이며, 자신의 살점까지 바쳐 사랑의 성찬을 차려준 분도 어머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의 아들을 바라보며 전생의 나를 보는 듯한 착각을 갖는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진실의 발견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80년 전의 그놈이 바로 이 손자 놈이고 그 손자 놈이 내가 태어나기 이전 80년 전의 강보에 싸였던 갓난쟁이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은 과학적으로는 유전으로 이어지고 불교적으로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어떤 중생도 이 이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인연으로 이어진 사바세계 중생의 실상이다. 그러니 현재의 나를 알려면 80년 전의 그놈을 알아야 하며 80년 전의 그놈이 알고 싶으면 강보에 싸여 있는 어린 손자 그놈을 보면 된다. 전생의 내가 알고 싶으면 역시 나처럼 밥 먹고 나처럼 전화 받는 손자 놈을 보면 된다. “모자를 두고 강을 건넌 여행자처럼” 인간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돌아볼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이 손자의 닮은 모습이듯, 앞을 내다볼 때 보게 되는 것도 손자의 모습이다. 내가 세상 뜨면 어찌되는가? 저 손자처럼 울음 터뜨리고 태어나 나처럼 젖 먹고 나처럼 걷고 나처럼 자라나 둥근 두레상에 앉아 밥을 먹으리라.
정해영의 시는 생활의 정서에서 출발하여 체험에서 우러난 관찰과 사색에 바탕을 두고 개성적인 비유와 적실한 표현으로 새로운 시상을 표현했다. 세월의 연륜이 담긴 그의 상상력은 여성적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인간 실존의 비밀스러운 단면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존재의 실상과 생명의 이치를 탐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시인으로서의 늦은 출발, 만만치 않은 그의 연치로 볼 때 이것은 매우 탁월한 성취로 평가된다. 환하게 열린 창작의 지평을 따라 푸르른 생명의 기운이 무한히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아득히 눈부신 빛나는 꼭대기’(「가족사진」)에 그의 삶과 시가 남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숭원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지혜사랑 107번 정해영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0.000
첫댓글 축하합니다.
정말 아주 아름답고 훌륭한 시들로 구성된 첫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