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벽루 시판涵壁樓 詩板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대야성 아래

南亭次許公簡韻 남정에서 허공간 시의 운을 빌리다.
北來山陡起 북에서 온 산은 험하게 솟아 있고
東去水漫流 동으로 가는 물은 넘쳐흐르네.
鴈落蘋州外 기러기는 강가에 내려앉고
烟生竹屋頭 연기 나는 대나무집은 우뚝하다.
閒尋知意遠 틈을 내어 찾으니 앎의 뜻은 멀고
高倚覺身浮 높이 의지하여 터득하니 몸은 떠 있네.
幸未名韁絆 다행이 이름 모를 고삐 줄을 잡으니
猶能任去留 떠나고 머무름을 내맘대로 할 수 있네
[原詩 ; 退溪先生全書遺集外篇 卷二]
선생께 33세(1533년)시 남행길에 2월 4일 처남의 시를 차운하여 「협천남정운陜川南亭韻」과 「남정차허공간운南亭次許公簡韻」의 시를 지으시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신 듯하다 고 한다. 당시에는 남강원을 남정으로 표현하셨다. 그 후에 여러 번 중수를 하면서 함벽루라고 한 듯하다.
누각은 고려 충숙왕 8년 합주지주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 요충지로 요즘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야성 아래 황강가에 세워져 있다.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유명하다.
2007.3.17.에 누에 올라보니 내부에 퇴계선생을 비롯한 조식曺植( 1501~1572, 號 南冥), 송시열宋時烈(1601~1689, 號 尤庵)의 시판이 걸려있다고 안내판에 써져 있으나 퇴계선생과 남명선생의 시판은 찾을 수 없었다. 퇴계선생의 처남이신 허사렴許士廉 공의 시를 이원태李源台(1899~1964,字 斗若, 號 圓坮)공이 쓴 시판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가을에 갔을 때는 시판을 다시 제작하여 걸려있었다.
첫댓글 先生此詩,至今,遺在稿,近自溪上,謄來,謹揭,時,斯樓重建之翼年,壬戌淸和節也
선생의 이 시는 지금까지 문집 원고에 남아있었는데 계상으로부터 베껴와서 삼가 걸었으니 때는 이 누각을 중건한 다음해인 임술년(1982) 청화절(4월)이다
閒尋知意遠 한심지의원
틈을 내어 찾으니 앎의 뜻은 멀고
틀을 내어 찾으니 뜻이 원대함을 알겠고
高倚覺身浮 고의각신부
높이 의지하여 터득하니 몸은 떠 있네.
높이 기대니 몸이 떠있다는 걸 깨닫네.
幸未名韁絆 행미명강반
다행이 이름 모를 고삐 줄을 잡으니
다행히 아직 이름이 관리 명단에 없으니
猶能任去留 유능임거류
오히려 가든지 머무를 수 있네.
떠나고 머무름을 내맘대로 할 수 있네.
감사합니다. 원고는 수정했는데, 이곳에는 수정이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