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석란도 (1892년작)
1892년, 대원군, 석란도
괴석을 사이에 두고 난을 배치한 이 작품은
이하응 석란화(石蘭畵)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73세의 노년작임에도 불구하고 간결한 구성과
힘찬 필력이 그의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젊은 시절에 비하여 괴석의 형태와 필묵법은
더욱 간일해 지고, 난은 풍성하게 표현되었다.
난의 이파리는 가늘고 긴 곡선으로 표현하는
이하응 특유의 운필(運筆)이 보이는데,
속도감과 힘이 충만하여 그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난다.
괴석은 상대적으로 빠른 필치로 그려
비백(飛白)의 효과가 나타나며,
담묵으로 그린 돌의 표면과 농묵으로 그린
윤곽선이 겹치거나 교차하면서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절제된 형태와 필치로
세련된 격조와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사무실 그림을 재배치 하면서 그림을 자세히
보니 대원군 이하응이 73세(1892년) 임진년에
그린 석란도다.
이하응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을 배워,
추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서는 따를 자가 없다"
는 평을 받았다.
(물론 왕족이니 립서비스가 포함되었겠지만..ㅎ)
그는 이미 67세에 수전증이 있어서,
왼쪽 그림에는 손 떨린 흔적이 있다는데
내눈에는 다 잘 그린 것같다.
外山大雅淸覽(외산대아청람)
산밖에서 크고 맑은 마음으로 바라본다.
壬辰末庚節 石坡 七十三歲 病夫作
(임진말경절 석파 73세 병부작)
1892년말 庚(경)자 간지 날 석파가
73세의 병든 몸으로 그렸다.
이어서 대원군장(大院君章)
석파(石坡)라고 낙관하였다
그 아래 好花看到半開時(호화간도반개시)
도장이 찍힘
"예쁜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러간다"
소강절의 시귀다..
美酒飮敎微醉後 (미주음교미취후)
好花看到半開時 (호화간도반개시)
這般意思難名狀 (저반의사난명상)
只恐人間都未知 (지공인간도미지)
맛있는 술 마시고 약간 취한 뒤
어여쁜 꽃 반쯤 피었을 때 보러간다
지난 번 뜻은 형상을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데
다만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할까봐
두려울 뿐
왼쪽 그림 아래에는
일실지내유이자오(一室之內有以自娛)라는
도장이 찍힘
"방안에서 하는 내 오락거리"
라는 의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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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림을 그린 1892년 그는 병든 몸이라
겸사를 하지만, 마음 속에는 불이 타고 있었다.
그해 봄 운현궁에 폭탄테러가 있었다.
그는 민비 세력의 자객과 폭탄테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고종과 민비를 쫓아내고 장남 이준용을
왕으로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890년 - 1892년에 전봉준이 운현궁에
식객으로 잇었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실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장악하자,
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봉기하여 상경하라고
밀지를 보낸다..
그러나 우금치에서의 패전으로 대원군의
꿈은 사라졌다..
이하응(李昰應),(1820~1898)
석란도(石蘭圖) 대련1892년, 비단에 수묵,
각 123.0 × 32.2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73세 때
그린 노년기의 작품이다.
70대 노인의 솜씨로서는 매우 힘차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어서 놀랍다.
난초와 괴석을 결합시킨 석란화는 19세기
중엽 이후 유행했다.
이하응은 석란과 묵죽을 잘 그린 청나라 화가
정섭(鄭燮)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 작품에서
보이듯이 말년에는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이하응은 젊은 시절 추사 김정희에게서
난초 그리는 법을 배웠다.
까다로운 감식안으로 유명한 김정희는
이하응의 난초를 최고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난초그림 하나에 매달린
때문인지 이하응은 장년기 이후 석란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석파란(石坡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노년에는 석파란의 인기가 높아졌으나
일일이 응대하기 어려웠고, 그래서인지
시중에는 가짜 석파란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시부터 그러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이하응의
난초그림은 진작과 가작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작품을 대할 때는 늘 신중히
관찰하는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