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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間革命 28卷
第4章 勝利島 (40~45)
<승리섬 40>
불법(佛法)의 세계에서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서의 말씀대로 박해와 탄압에 맞서 싸우며 열심히 홍교에 힘쓰고 인재를 육성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 지역에 신뢰를 넓히고 광선유포의 길을 묵묵히 연 사람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땀을 흘리고 동고(同苦)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기원하고 행동한 사람이다.
승려라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간부라서 훌륭한 것도 아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이어서 말했다.
“학회의 리더는 자신이 마치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해 회원을 건방진 태도로 대하거나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며 내심 무심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까지 다기지게 투쟁한 동지를 진심으로 존경하지 못한다면 불법자(佛法者)가 아닙니다.
만일 간부가 고생을 피하고 이득만을 취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광선유포를 파괴하는 사자(師子) 신중의 충(蟲)입니다. 학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생명에 깊이 새겨주십시오.”
신이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엄하게 말했다.
1월 25일, 기리시마 연봉 중턱에 자리한 규슈종합연수원에는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었다. 오전 11시 전, 낙도본부 제1회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는 멤버를 태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신이치가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위대한 광포의 영웅 여러분을 진심으로 찬탄하고 환영합니다.”
신이치가 손을 내밀며 악수했다. 섬 동지들도 힘주어 손을 잡았다. 동지들은 신이치의 손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순간 두 눈에 눈물이 어렸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신이치의 마음을, 혼의 고동을 느꼈다. 용기가 솟았다.
이날 대표자회의에서는 각섬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섬 발전에 힘쓸 것을 의결했다. 또 섬의 실정에 맞게 사회성을 소중히 하면서 활동에 도전한다는 기본방침을 확인했다.
<승리섬 41>
낙도본부 제1회 대표자회의에서는 야마미오섬, 기카이섬, 야쿠섬에 새로운 직책인 ‘지역장’ 마련했다고 발표하고 그 인사도 소개했다. 각 섬의 지역장은 그 섬만의 특색을 살리면서 섬의 발전과 광선유포를 책임지는 중심자이다.
신이치는 대표자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멤버들을 배웅했다.
버스에 오르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 혼을 뒤흔드는 심정으로 말을 건네 격려했다.
“여러분에게 섬을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움직인 만큼, 대화한 만큼 광선유포는 전진합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활약 그리고 섬의 번영을 힘껏 기원하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목을 보내겠습니다. 마음만은 늘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을 쭉 지켜보겠습니다.”
“자신이 섬사람들을 모두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사이좋게 상식 풍부하게 큰마음으로 나아가주십시오. 신뢰의 거목이 되어 섬사람들을 포용하기 바랍니다.”
광포는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날 낙도 동지들은 광포 제2장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참석자를 배웅한 신이치는 미쓰시마 세이지를 비롯한 낙도본부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섬에 광포의 기반을 만들 때까지 낙도본부 간부는 낙도를 철저히 방문해 격려에 힘을 쏟읍시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 기회를 통해 낙도에 사는 분들을 격려하겠습니다.”
신이치는 그 말대로 홍콩에서 돌아온 다 다음 날인 2월 2일에는 오키나와를 방문해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섬에도 갔다.
가는 곳마다 멤버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지역 주심들도 참가한 ‘야에야마축제'와 ’미야코전통문화제‘에 참석해 함께 춤도 추었다. ’선조대대 추선법요‘도, 회관 기공식도 열었다. 이리오모테섬의 중학교와 이라부섬의 초등학교에 도서도 증정하고 사람들과 여러 차례 간담했다.
섬사람들과 융합한 여러 행사는 ‘불법즉사회’의 참모습을 제시하는 모범사례가 되었다. 한 가지 본보기가 흐름을 연다.
<승리섬 42>
낙도본부는 당초 본부장과 부본부장 두 사람으로 시작해 이어서 규슈와 오키나와에 방면낙도장이 탄생했다.
이들 간부들이 낙도의 실태를 파악하고 놀란 것은 사람이 사는 약 400개 섬에 대부분 학회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회원이 한 세대나 수 세대밖에 없는 섬도 적지 않았다. 섬 동지는 그야말로 홀로 창가(創價)의 횃불을 높이 들고 일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낙도본부 간부들은 격려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통감했다.
간부들은 에히메현 나카지마섬을 비롯해 구마모토현 고쇼우라섬, 가고시마 아마미 군도, 도쿄 이즈오섬과 하치조섬, 미에현 스가시마섬과 도시섬 등을 돌며 힘껏 격려했다.
섬에 갈 때는 각 현의 간부도 함께 데리고 갔다. 같은 현이라고 해도 섬에 처음 가는 간부도 있었다. 당일로 다녀오지 못하는 경우나 파도가 높으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섬에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섬 저 섬을 뛰어다니는 낙도본부 간부의 모습을 보고 현 간부와 본부 간부의 의식도 바뀌었다. 악조건에서 활동하는 사람일수록 빛을 비추어 칭찬하고 격려해 희망과 확신을 주는 간부의 기본자세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낙도를 방문하는 흐름이 생겼다.
낙도본부장인 미쓰시마 세이지는 신이치가 오키나와를 방문해 지도한 지 한 달 뒤인 3월, 막 완성된 기록영화 필름을 들고 오키나와의 구메섬, 미야코섬, 이케마섬, 이라부섬, 야리오모테섬, 이시가키섬을 돌았다.
‘선생님이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섬을 방문한 상황을 각 섬에 전해 환희의 파동을 넓히자!’며 기세가 대단했다.
각 섬에서 ‘영사회’나 ‘강연과 영화의 밤’ 등 취향에 맞게 회합을 열었다. 우인도 참석한 즐겁고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행동한다. 그 신속한 반응과 필사의 실천이 광선유포의 흐름을 크게 여는 기회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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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도본부 간부들은 각 섬을 방문할 때마다 놀라움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이리오모테섬에서는 방문 첫날 섬 동부의 오하라대블록에서 ‘영사회’ 등을 열었다.
신이치의 오키나와방문 기록영화를 상영했다. 이시가키섬에서 연 ‘야에야마축제’에서 ‘마키오도리(한국의 강강술래)’를 추는 장면이 나왔다. 이 춤은 오하라대블록 멤버들이 추었는데 핫피(상인들이 입던 겉저고리) 차림에 머리띠를 두른 신이치가 자신들과 손을 잡고 춤추는 장면이 나오자 뜻밖에 환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영이 끝난 뒤에도 너도나도 눈물을 글썽이며 그날의 감격과 결의를 말했다.
이튿날은 섬 서부 이리오모테대블록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바니라고 부르는 작은 배를 빌려 타고 가기로 했다.
이리오모테섬장(長)을 맡은 시마리 조에이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는 동부의 오하라항에서 이시가키섬으로 나가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배로 서부의 후나우라항으로 건너갑니다. 이시가키섬에서 후나우라항으로 가는 배는 하루에 왕복 한편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작은 배로 바로 가겠습니다. 조금 흔들릴지 모릅니다.”
이날은 풍랑경보가 내려져 바람이 강하고 파도가 높았다. 모두 우비를 입고 배를 탔다. 그리고 그 위에 방수시트를 뒤집어쓰고는 뱃전을 꽉 붙잡았다.
그래도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밀려 옷은 물보라에 흠뻑 젖었다. 그러나 영사기와 필름만은 젖지 않게 하려고 꼭 끌어안고 한 사람을 버텼다. 후나우라항부터는 트럭을 빌려 회합 장소로 갔다.
길이 울퉁불퉁해 차가 심하게 흔들려 몸이 들썩거렸다. 낙도본부 간부는 생각했다.
‘이리오모테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활동하는구나! 걸어서 10분이며 대블록을 통과하는 도쿄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도쿄에 살면서 활동이 힘들다고 한숨짓는다면 이리오모테 멤버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고생은 불도수행을 하는 최고의 도량이 된다. 힘겨운 만큼 공덕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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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도본부 간부는 4월에는 일본 서쪽 해상에 있는 섬들 중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아도 레분섬과 리시리섬에도 발걸음을 옮겼다. 두 섬에서 영화 ‘인간혁명’을 상영했다. 리시리섬에서는 150명이, 레분섬에서는 300명 이상이 모여 감상했다.
그때 ‘세이쿄신문’ 창간 23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레분초의 레분초등학교에 도서 1000여 권을 증정했다.
그리고 5월, 낙도본부장들은 오가아와라 제도의 지치지마섬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킬로 떨어진 태평양에 위치하는데 지치지마섬을 비롯해 하하지마섬, 이오섬, 미나미토리섬 등 30여 개 섬들로 이루어졌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자 섬에 사는 주민 약 7000명을 본토 등으로 가제 이주시켰다. 그 섬들 중에 이오섬은 미군과 격전을 벌이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수비대 대다수인 약 2만 2000명이 전사했다. 미군도 7000명 가까이 전사하고 약 1만 8000명이 부상당했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시정권 아래에 놓였다가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된 지 24년 만인 1968년 6월에 반환되었다. 그 뒤로 전에 살던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광선유포의 불이 지펴졌다. 그리고 1974년 무렵에는 홍교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1년 내내 따뜻하고 장마도 없다. 고유하게 진화한 생물이 많아 ‘동양의 갈라파고스’라고 부른다.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이 남이 있어 주변 바다에서 고래나 돌고래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에 가려면 도쿄 다케시바산바시에서 일주일에 한번 왕복하는 배편밖에 없었다. 편도 38시간, 사흘 걸리는 여정이었다.
신이치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방문한다는 낙도본부의 보고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저를 대신해서 다녀와주십시오. ‘회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늘 머리에 새기고 확신에 찬 격려를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사제불이(師弟不二)의 마음으로 행동해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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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도본부의 보고로는 오가사와라 제도에 30세대가 넘는 멤버가 있다고 했다.
신이치는 수뇌간부를 통해서 오가사와라 제도를 방문하는 낙도본부 간부에게 전언을 보냈다.
“이번 기회에 오가사와라 제도에 대블록을 결성하면 어떻겠습니까. 학회본부와 잘 상의해서 인사 등도 구체적으로 검토해주십시오. 또 섬 여러분에게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 마음은 어본존을 통해 이어져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여러분의 건강과 가족의 번영을 진지하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섬 동지에게 보내는 기념품을 맡겼다.
미쓰시마 낙도본부장 일행은 5월 4일 아침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지차지마섬에 도착했다. 뱃멀미로 고생하다 배에서 내리자 몇 사람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하하지마섬에서 온 일흔두 살 남성도 있었다. 지치지마섬과 하하지마섬은 약 50킬로 떨어져 있다.
“본부에서 간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틀 전부터 지치지마섬에 와서 기다렸습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건강하십니까?”
이 남성은 본토에 있었을 때 어느 회합에서 신이치가 말한 “평생 나와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기 바랍니다” 하는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지금까지 하하지마섬에서 일심으로 신심에 힘썼다고 한다.
‘사제의 맹세’를 위해 살고 ‘사명’을 자각한 동지가 ‘광포의 대도(大道)’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쓰시마 일행은 구도심 넘치는 순수한 모습에 생명이 깨끗해지는 듯했다.
오가사와라 제도 광포는 1968년에 오가사와라 제도가 일본에 반환되자 본토 등에 강제 이주한 사람들이 지치지마섬에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사사모토다쿠야와 아사이케 다카오라는 학회원이 있었다.
사사모토는 어업을 하기 위해 어업협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장을 맡고 아사이케는 도쿄도 오가사와라 어업사선의 선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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