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 25~37
본문의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비유로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선한 사마리아 법'까지 있을 정도이다.
'선한 사마리아법'이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시 자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는데도 외면할 경우, 구조불이행죄로 벌금이나 징역등,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조하면 살수 있었던 것을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담으로 지나쳐 죽었으면 이런 법까지 생겨났을 까 싶다.
본문의 예수님이 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잠깐 줄거리와 부연설명을 쓰면,
어느 날 한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예기치 않게 강도를 만나는데, 강도들은 이 남자의 물건을 약탈하고 거기다 옷까지 벗겨 거반 죽을 정도로 때리고 버리고 간다.
이때, 한 제사장이 내려가다가 이 남자를 본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사장이 '내려가다가' 란 표현을 썼는데 이는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이 넘는 고원지대였고 여리고는 지중해 해면 보다 250m 낮은 지대라 그 내려가는 길이 급경사로 굴곡이 많고 근처에 계곡과 숲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길에 강도들이 실제로 많이 출몰했고, 근래까지도 이 길에서 유명인사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아랍강도들에게 죽었다고 한다.
제사장은 그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를 만나지만 그냥 피해 지나간다.
아마도 갈등은 했겠지만,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동안 부정하게 되는데, 그 남자가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았다한들 구조하다가 죽게 되면 자신이 부정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다 구조하다 죽으면 자칫 자기가 누명을 쓸수도 있고, 또 집에는 자기를 기다리는 처자식이 있어 자기가 늦으면 걱정할터이라, 여러 마땅한 이유로 그 남자를 지나친다.
그리고 그 뒤로 한 레위인이 지나간다.
그런데 이 레위인도 똑같은 이유로 그 남자를 지나쳐 피해간다.
아마 남자도 방관자 심리로 다른 사람이 또 지나갈테니 그 사람에게 책임을 떠 맡겼을 것이다.
이때쯤, 예수님의 말을 듣던 울법학자와 청중들은 그 다음에 지나갈 사람이 유대인 평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예상을 엎고 다음 인물로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달리 이남자를 불쌍히 여겨 갖고 있던 포도주와 기름으로 남자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치료를 해준다.
이 당시엔 달리 의약품이 없어 알콜성분이 있는 포도주로 상처를 소독하고 올리브기름을 연고삼아 상처에 발랐다고 한다.
이렇게 응급처치를 한 사마리아인은 자기 짐승에 남자를 태우고 주막으로 가서 남자를 극진히 돌보아준다.
그리고 다음날 주막주인에게 두데나리온을 준 후, 잘 돌봐달라며 경비가 더들면 자기가 돌아와 갚겠노라고 말을 하고 떠난다.
두데나리온은 지금 돈으로 이십만원정도 되는 돈으로 이때 여관비가 반앗사리온으로 열앗사리온이 한데나리온이니 하루 오천원씩, 무려 40일의 숙박비를 지불하고 간것이다.
이당 시의 숙박비와 지금의 모텔비와 열배도 넘게 차이나지만 이 당시의 외진 곳의 주막이라 땅값도 쌌고, 또 시설이 허름해 그랬을 것이다.
지금 이곳엔 선한사마리아란 주막이 실제로 있어 성지순례인들의 즐겨 찾는 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시고,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 강도맞은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는다.
율법학자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율법에 목을 매는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됐을 때 이 사람도 똑같이 피해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 예수님이 율법에 어긋나는 말을 하나 안하나 시험하고자, 또는 율법을 잘지키는 자기의를 드러내고자 질문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차마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이웃이라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자 ,즉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울법학자에게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유대인이 멸시하고 적대시했던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 또한 유대인들과 비기독교인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강도맞아 예수님께 구원받은 자만이 예수님을 이웃이며 친구가 되기에 그렇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울법이나 가족등, 어느것에도 매이지 않고 남자를 구한것 처럼 예수님도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오직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우릴 구원하셨다.
또한, 사마리아인은 남자를 주막에 그냥 맡긴것이 아니라 손수 피를 닦아주고 음식을 먹이며 극진히 돌봐 준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개인적으로 직접 치료하시고 돌봐주셨다.
예수님은 그냥 하늘에서 계신 채, 성경 말씀으로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는 모두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고 직접적인 보살핌을 받은 경험이 있다. 기독교는 체험신앙이다. 그게 우리 기독교와 타 종교가 다른 점이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에게 다 털려 갚을 길 없는 남자에게 아무 댓가없이 그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경비가 더들면 돌아와서 갚겠노라고 한후, 떠난것처럼, 예수님도 아무댓가없이 우릴 구하시고 다음에 오겠다는 재림에 대한 기약을 하고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맞은자를 치유해준 포도주와 기름은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을 상징한다. 우린 모두 강도 맞은자로서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으로 나음받은 사람들아닌가.
세상엔 환란으로 가득하다.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수가 강도라는가, 또는 은행직원인줄 알았는데 보이스피싱범이라 전재산을 날린다든가, 이런 생활속의 강도는 너무도 많다.
주기도문의 '악에서 구하옵소서' 란 기도가 악한 상황,악인에게서 구해달라는 뜻이라는데 이처럼
우린 지금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가 절실한 무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거시적이며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 인류는 모두다 사단에게 강도 맞은 자들이다.
강도 맞은자도 일어나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고 훌훌 털고 일어나 집을 가거나 주막으로 가고 싶지만, 너무 깊은 상처를 입어 움직일수도 없었듯이, 세상사람들도 너무 깊은 상처를 입어 자기도 빠져나오고 싶지만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술, 마약, 도박, 동성애, 성 중독, 또는 다른 악습등, 모두 영혼을 약탈 당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수 없는 상태가 된것이다.
간증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에 이렇게 강도 맞았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복하고 새생명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일곱살때, 이웃집 대학생 오빠에게 성폭행 당해 자신이 여자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 계속 호르몬주사를 맞아 수염난 남자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다시 여자로 산 이야기, 또는 마약중독에 빠져 그 늪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복해 새삶을 산 이야기 등등..
모두 강도 맞아서 처참하게 죽을 정도의 해를 입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 살아난 경우이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인가?
그들은 율법과 종교의식에 매여 영혼을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고 외면하는 그런 껍데기 종교인들이다.
그런 껍데기 신앙인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마녀사냥, 종교재판, 등 역사속의 수많은 기독교 죄악사를 보라.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보다 한술 더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억울하게 한 사람을 용서치 못하니 그냥 생각을 안하고 멀리했다. 그게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강도맞은 사람들로 처참하게 상처입은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긍훌한 마음이 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남자의 상처를 포도주와 기름으로 붓고 싸맬 때 쓴 상처란 말이 헬라어로 '트라우마'이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쓰는 '트라우마'인것이다.
범죄자나 성격파탄자들은 어릴 때의 트라우마로 그런 이상 성격을 갖게 된다고 한다.
즉 강도 맞아서 자기도 어쩔수 없게 그런 깊은 트라우마로 성격이 그리 된 것이다.
난 가끔 '영이 탄다'란 표현을 썼다. 즉, 나쁜 영의 에너지가 나에게 옮겨 타격을 받을 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난 부정적인 사람을 멀리하고 내 영을 보호하려고도 그런 괴팍한 성품의 사람을 멀리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내가 부정해지지 않기 위하여 강도맞은자를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라 깨달아 졌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우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도맞은 자로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자는 같은 처지의 사람을 외면하고 피한다면 그건 사람으로서도 마땅한 도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 선한사마리아이신 예수님이 한것처럼 그런 강도맞은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도움을 줄수 있는 그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