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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몽의 처음 이름은 최총진(崔聰進)이니 남해 영암군 사람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의 아들이다.
그는 성품이 청백 검박하고 인자 온화하며 총명 예민하고 학문을 즐겼으며 대광 현일(玄一)에게서 배웠다. 경서와 사기를 많이 연구하였고 더욱이 천문과 복술(卜筮)에 정통하였다.
18세 때에 태조가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서 꿈을 해석하게 하였더니 길조를 얻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반드시 앞으로 삼한을 통어하게 되시리다.”라고 하니 태조가 기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게 하고 비단옷을 주고 공봉직(供奉職)에 임명하였으며 항상 종군하여 태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삼한을 통일한 후에는 궁중에서 왕을 모시었고 왕의 자문에 응하고 있었다.
혜종 2년에 왕규가 왕의 아우를 모해하려 할때 최지몽은 사천관(司天官)으로 있으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유성(流星)이 자미(紫微-성좌의 이름)를 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생기겠습니다”라고 하였으며 그 후 혜종이 병에 걸려 신덕전에 누워 있고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고 꾀할 때에도 최지몽이 점을 치고 또 아뢰기를 “가까운 장래에 사변이 있을 터이니 수시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여 왕규를 처단한 후 왕규의 음모를 밀고한 데 대한 최지몽의 공을 표창하고 노비, 안마, 은그릇을 주었다.
광종 때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취하여 예절을 잃은 죄로 강직되어 외걸현에 나가서 11년 간이나 있다가 경종 5년에 소환되어 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 관직과 동래군후(東萊郡侯)의 봉작에 식읍 1천 호를 받았으며 은그릇, 비단, 이부자리, 휘장, 의복, 말, 복두, 서대(犀帶) 등을 받았다.
하루는 최지몽이 아뢰기를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침범하였으니 바라건대 상감께서는 숙위를 엄중히 신칙하시어 불의의 화변을 방비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 왕승(王承) 등이 반란을 음모하다가 처단을 당하였으며 왕은 그에게 의복과 금띠를 상 주었다.
성종 원년에 좌집정 수 내사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를 더 주었고 홍문 숭화 치리 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 칭호를 주었으며 그의 부모에게도 작위를 주었다. 성종 3년에 최지몽의 나이 78세에 이르렀으므로 세 번 글을 올려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또 글을 올려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또 글을 올려 굳이 청하니 조회에 참가하는 것을 그만 두고 전과 같이 내사방(內史房)의 일을 보게 하였다.
성종 6년에 최지몽이 병으로 누으니 성종이 의원에게 명령하여 약을 주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문병하였으며 말 두 필을 귀법사와 해안사(海安寺)에 희사하고 중 3천 명에게 음식을 먹이며 기도하게 하는 등 일체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는 81세에 죽었는데 왕은 부고를 받고 깊이 애도하였으며 부의로서 포목 1천 필, 쌀 3백석, 보리 2백석, 차 2백 각(角), 향 20근(斤)을 주었으며 관비로써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태자 태부를 추증하고 시호는 민휴(敏休)라고 하였으며 또 태사를 더 추증하였으며 성종 13년에 경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최현동(崔玄同), 최회원(崔懷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