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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도시국가 특별구역 또다른 나라 바티칸 08.07(일, 맑음) 호텔출발(06:30)→바티칸보안(07:20~)→베드로성당(10:30→12:00)→중찬(~13:00)→Pantheon(13:20~40)→Trevi분수(13:50~14:30)→스페인광장(~14:50)→성당(15:00~15)→중세유적(15:20~50)→Colosseo경기장(16:00~20)→Ariston2박(19:00~)
바티칸 시국(Vatican 市國, 라틴어: Status Civitatis Vaticanæ 스타투스 키비타티스 바티카나이[*], 이탈리아어: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 스타토 델라 치타 델 바티카노[*], 문화어: 바띠까노 시국), 약칭 바티칸(라틴어: Civitas Vaticana 키비타스 바티카나[*], 이탈리아어: Città del Vaticano 치타 델 바티카노[*])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의 면적에 약 4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녔으며 면적과 인구로 보아 매우 작은 독립 국가이다. 이전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했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 교황령의 회복을 목표로 한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의 체결로 독립을 성취하여 오늘에 이른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 국가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본부이다. 바티칸 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는 성좌(聖座, Sancta Sedes)로 호칭된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토스카나 지방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카노사 출신의 귀족으로, 카프레세의 치안판사였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로, 로도비코의 둘째 아들이었다. 6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죽으면서 유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터라 채석장에 드나들면서 조각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초의 작품을 따라 그리는 등 그림에 관심을 보여 아버지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다. 아버지는 미켈란젤로를 공부시키고자 프란체스코 다 우르비노가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 문법(라틴어)을 배우게 했으나 미켈란젤로의 관심은 온통 그림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아버지의 임기가 끝나자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올라왔다. 이곳에서 그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를 알게 되었고, 그 제자가 미켈란젤로의 데셍을 기를란다요에게 보여 주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도제가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어린 나이임에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 스승을 놀라게 했다. 기를란다요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벽화를 제작하던 무렵의 일이다. 미켈란젤로는 스승과 선배 도제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 기를란다요가 “이 소년은 나보다 아는 게 많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던 미켈란젤로는 1년 후 도나텔로의 조수였던 조각가 베르톨도 디 조반니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메디치 가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띄었다. 메디치 가는 고대 조각과 인문주의에 큰 관심을 갖고 피렌체의 문화, 예술을 후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가문이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집에 기거하며 그가 수집한 고대 로마 조각들을 모방하고, 고대 사상과 신화 등을 연구하며, 로렌초의 정원에 놓일 조각상들을 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헤라클레스와 켄타우로스 간의 전투를 묘사한 〈켄타우로스족의 전투〉로,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어린 나이임에도 거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21세 때 그를 지극히 총애한 로렌초가 죽자 미켈란젤로는 깊은 슬픔에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크기가 너무 커서 누구도 사지 않아 방치되어 있던 대리석 조각을 사들여 〈헤라클레스〉를 조각했다. 여기에는 메디치 가의 후원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만들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실제 인체 해부를 시도했다고 한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가 몰락하며 미켈란젤로의 인생에 전환기가 찾아왔다. 그는 전란을 피해 베네치아를 거쳐 볼로냐로 가 약 1년 여간 조반 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의 후원 아래 미완성이었던 성 도메니코의 묘지에 놓일 조각상들을 제작했다. 〈성 프로클로스〉, 〈성 페트로니우스〉, 〈천사〉가 그것이다. 1496년, 미켈란젤로는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서는 〈잠자는 큐피드〉를, 로마에서는 고대 조각상들을 연구하면서 〈바쿠스〉를 제작했다. 〈바쿠스〉는 추기경 라파엘레 리아리오의 주문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1499년,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완성했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 어로 ‘슬픔’ 혹은 ‘비탄’을 뜻하는 말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비애를 표현하는 주제이다. 프랑스 추기경 장 빌레르 드 라그롤라가 주문한 것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1501년, 피렌체에 공화정이 수립되고 정국이 안정됨에 따라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시의 위탁으로 〈다비드〉의 제작에 착수했다. 35년간 피렌체 대성당의 소유였으나 성당의 정책 변화와 작업상의 난점으로 다른 예술가들이 손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커다란 대리석이 그에게 주어졌다. 3년여에 걸쳐 완성된 대작은 많은 논의 끝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베키오 궁전 앞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되었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전 다윗의 모습을 묘사한 이 조각상이 피렌체 공화국의 상징으로 쓰이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미켈란젤로는 한 사람의 후원자에게 의존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피에타〉와 〈다비드〉로 그는 거물 예술가가 되었고,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도 작품 의뢰가 밀려들었다. 미켈란젤로는 예술가가 천시받던 시대에 스스로 작품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유와 독립성을 인정받았던 최초의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 역시 작품을 명예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권력자들로 인해 고난을 겪었다. 그중 미켈란젤로를 가장 괴롭힌 동시에 명성을 드높여 준 일은 교황 율리오 2세와 관련 있다. 율리오 2세는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라파엘로에게 바티칸의 교황 집무실 인테리어를 맡기는 등 전성기 르네상스를 꽃피운 인물이다. 1505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영묘를 조성해 줄 것을 의뢰받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자재 구입, 비용, 설계안에 대한 갈등 등으로 작업이 지연되자 미켈란젤로는 1년 반 만에 피렌체로 돌아갔다. 율리오 2세는 피렌체 시의회에 그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고, 영묘 작업이 지연되는 동안 다른 일들을 맡겼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생애 최고의 역작인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의 천장화이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에게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며 거듭 거절했다. 수많은 조각상에 대한 야심 찬 계획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도제 시절 이후 프레스코화를 그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묘 조성 계약 때문에 교황에게 묶인 그는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높은 비계 위에 서서 익숙하지 않은 천장화를 그리느라 허리가 꺾이는 듯 고통스럽다고 불만을 토해 냈고,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바로 이 천장화, 즉 〈천지창조〉로 미켈란젤로는 37세의 나이에 당대 가장 위대한 화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천지창조〉가 완성되고 1년 후 율리오 2세가 죽고, 후임 교황들도 그에게 여러 가지 작품을 의뢰했다. 율리오 2세의 영묘 조성 작업이 지연되는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대규모 일들을 의뢰받았다. 미켈란젤로는 그중 산 로렌초 대성당의 파사드 조각에 흥미를 느끼고 율리오 2세의 영묘 조성이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피렌체로 돌아와 분란을 일으켰다. 그는 3년간 이로 인한 분쟁으로 시달렸다. 미켈란젤로는 이후에도 야심 차고 흥미로운 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성격으로 수많은 작품을 중도에 포기하곤 했다. 이런 분란 속에서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 예배당의 조각상 조성,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 건축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529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가 피렌체를 침공했을 때는 방위위원이 되어 성을 쌓았다. 1534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의 알레산드로와 불화를 겪고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다. 로마로 향한 것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몇 년 전부터 ‘자네가 꿈조차 꾸지 못한 일’을 주겠다고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클레멘스 7세가 죽고 바오로 3세가 즉위했으나, 그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아끼는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되었고,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 대벽화를 의뢰받았다. 손상된 예배당이 복원되고, 그사이 미켈란젤로는 다시 한 번 율리오 2세의 영묘 조성 때와 같은 분란에 휩싸였다. 이후 미켈란젤로가 벽화 제작에 착수한 것은 61세가 되어서였다.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미켈란젤로는 노년의 몸으로 잠도 자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반개혁적이라는 교회의 비난에 직면했고, 교회는 후일 몇몇 예술가들에게 이 그림에 대한 수정을 의뢰했다.
1542년,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의 영묘 조성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그러나 초기 설계보다 많은 작품이 빠져 있고, 조각상들의 배치가 바뀐 상태였다. 미켈란젤로는 불만 속에서도 작업을 완성했다. 1550년에는 바티칸 파울리나 예배당의 벽화 〈사도 바오로의 개종〉, 〈성 베드로의 순교〉를 그렸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 돔, 피렌체 성당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 왕성하게 작업했다. 젊어서부터 거장으로 명망을 떨친 미켈란젤로는 하나의 ‘화파’라고 불릴 만큼 로마와 피렌체 미술가의 중심에서 존경을 받았다. 1564년 2월 18일 81세를 일기로 죽었을 때, 그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조카가 고향인 피렌체에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로마와 피렌체 사이에 그의 시신 쟁탈전이 벌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소동 끝에 장례식은 22일이나 지나서야 그의 옛 교구인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삼아 고대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초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은 다신교의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지어졌었다. 이러한 고대의 잔재들은 수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사를 할 때 빈번하게 발견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적인 발굴작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고, 5세기 초에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커져갔으며 19세기 중반 신흥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 동안 로마와 그 주변 지역들을 장악해 교황령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는 바티칸이 아닌 라테라노 궁전이었으며, 아비뇽 유수기(1309년 - 1377년)를 제외한 최근 세기 동안에는 퀴리날레 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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