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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9권
6. 변현성품 ⑬
6.5. 아라한의 6종성(種性)
4) 아라한과 유퇴론 여설(餘說)
정리론자(正理論者)는 “수도(修道)로써 번뇌를 끊은 경우에는 물러날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34) 이에 대한 성교(聖敎)와 정리(正理)는 앞서 논의한 글 중에서 다른 종의(즉 無退論)를 비판하면서 이미 대부분 논설하였지만, 이제 스스로가 인정하는 종의(즉 有退論)를 성립시키기 위해 앞에서 미처 설하지 못하였을 것을 다시 나타내 보이도록 하겠다.
이를테면 응과(應果)로부터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으니, 『탄유경(炭喩經)』 중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기 때문으로, “다문(多聞)의 여러 성(聖) 제자들은 혹은 가면서 혹은 머물면서 어느 때에 실념(失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악과 불선의 생각을 낳아 탐욕이나 혹은 진에 혹은 우치를 이끌어내어 낳기도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35) 이와 같이 다문의 여러 성 제자들은 정념(正念)을 상실하는 것은 더디지만, 다시 신속하게 물러나 일으켰던 [번뇌를] 능히 다하고[盡] 몰(沒)하고 멸(滅)하여 떠날[離]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으로써 이러한 다문의 성 제자들이 바로 아라한임을 알게 된 것인가?
어찌 수고스럽게 따져 묻는 것인가? 이 경(『탄유경』)에서는 다른 경에서 설한 것처럼 “그러한 성 제자의 마음은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隨順)하였다”는 등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6)
이를테면 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문의 여러 성 제자들은 혹은 가면서 혹은 머물면서, 왕이나 혹은 친지가 그 앞에 와 재물이나 지위를 받아 지니기를 청하여도……(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에 따라 다문의 여러 성 제자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隨順)하며, 원리로 향해 나아가며, 원리에 임(臨)하여 들며, 출리(出離)에 수순하며, 출리로 향해 나아가며, 출리에 임하여 들며, 열반에 수순하며, 열반으로 향해 나아가며, 열반에 임하여 들며, 적정(寂靜, 열반)을 흔락(欣樂)하고 원리와 출리를 흔락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은 번뇌[漏]에 수순하는 일체의 법을 이미 능히 영원히 다하여[盡] 버렸고 이미 청량(淸凉)을 획득하였다’고 설한 것이다.”37)
또한 이 경 앞부분에서는 “그들은 온갖 욕(欲)을 한 덩이의 숯[炭]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한다.38) 이같이 관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욕’ 중의 욕욕(欲欲)ㆍ욕탐(欲貪)ㆍ욕친(欲親)ㆍ욕애(欲愛)ㆍ욕아뢰야(欲阿賴耶)ㆍ욕니연저(欲尼延底)ㆍ욕탐착(欲貪著) 등도 그들의 마음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다.39)
다른 계경 중에서도 이 경과 마찬가지로 “아라한은 여덟 가지 힘 등을 갖추고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다른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리자(舍利子)에게 고하기를, ‘모든 아라한에게는 여덟 종류의 힘이 있다’고 하였다. 무엇을 여덟 가지라고 한 것인가? 말하자면 아라한은 온갖 누(漏)를 이미 다하여 그의 마음이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하며, 원리로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한 그 경(다른 계경) 중에서는 역시 “그(아라한)는 온갖 욕(欲)을 한 덩이의 숯[炭]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하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기도 하였으니, 모두 이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그리고 다시 “그는 [4]념주(念住)와 [4]정단(正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지(覺支)와 [8]도지(道支)를 이미 수습하였고, 이미 능히 잘 수습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40)
또한 『술나경(戌拏經)』 중에서도 “아라한은 출리(出離)와 무해(無害)와 원리(遠離)에 안주하며, 애(愛)가 다하고 취(取)가 다하였으며, 아울러 마음의 해탈성을 망실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며, 『독전유경(毒箭喩經)』에서도 역시 “부처님께서 선숙(善宿)에게 고하기를, ‘열반을 즐기는 자는 그때 비상비비상처의 결(結)을 영원히 끊고 변지를 모두 획득한다’고 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41)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이 경(『탄유경』)에서 설한 온갖 성(聖) 제자들은 바로 아라한임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그 뜻이 결정적인 것이므로 [이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
(1) 경주(經主)의 『탄유경(炭喩經)』 해석 비판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하였다.
“실로 뒤(주36)에 설한 성 제자들은 바로 아라한이다. 그렇지만 그들(주35에서 설한 다문의 성 제자)은 갈 적에나 머물고 있을 적에 아직 능히 잘 통달(通達)하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일(失念하여 불선을 낳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학자는 갈 때나 머물고 있을 때 실념함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 뒤 무학을 성취하게 되면 번뇌를 일으키는 일이 없다. 즉 [『탄유경』의] 전반부에서는 유학위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그같이 설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42)
경주의 뜻을 자세히 살펴 보건대, 그는 말하자면 이 경의 전반부에서는 유학위에 대해 설하였고, 후반부에서는 무학위에 대해 설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결정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세존의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경주의 뜻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만 이 경 안에서 “전반부의 글은 유학위에 근거하여 설하였으며, 후반부의 글에서 비로소 무학위에 근거하여 설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하여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를테면 이 경에서는 먼저 “[성] 제자들은 온갖 욕(欲)을 한 덩이의 숯[炭]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하였기 때문에 이미 온갖 욕(欲) 등도 그들의 마음을 더럽히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한 다음에 “어느 때 실념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였으며, 다음으로 다시 “그들은 [물러나 일으켰던 번뇌를] 신속하게 다시 떠나게 되었다”고 설하였다. 그렇게 설한 후 바로 “그들은 가거나 머무를 때도, 왕이나 [친지가] 와서 청하여도 재물이나 지위를 받아 지니지 않으며, 이에 따라 그들(다문의 성 제자)은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하였다”는 등의 내용을 설하였으며, 나아가 “그들은 번뇌[漏]에 수순하는 법을 이미 능히 영원히 토(吐)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淸凉)을 획득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아도 부처님께서 다른 [내용의] 법(즉 유학의 법)을 설한 것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역시 또한 “그들이 다른 행(즉 유학의 행)을 닦아 별도로 증득한 것이 있다”고 설한 것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 그들 성 제자는 일찍이 유학이었지만 후에 무학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하여 알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경주 등의 이 같은 그릇된 생각을 막기 위해 이 경의 근본[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리라.
[이 경에서는] 먼저 “여러 성 제자들은 온갖 욕(欲)을 한 덩이의 숯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욕(欲) 등도 그들의 마음을 더럽히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미 응과를 증득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다음에 다시 “그들은 실념하여 번뇌를 일으킨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응과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이 경 중의 앞뒤의 두 글은 모두 무학에 대해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가 설한 “그렇지만 그들(주35에서 설한 다문의 성 제자)은 갈 적에나 머물고 있을 적에 아직 능히 잘 통달(通達)하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일(失念하여 불선을 낳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것 역시 이치상 그렇지가 않으니, 이 경 중에서는 “그들 [성] 제자들은 혹은 갈 때도 혹은 머무를 때도 생각[覺]에 따라 통달하였지만,43) 어느 때 망실하여 번뇌를 일으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에서는] ‘능히 잘[善] 통달하였다’는 말을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러한 뜻을 이미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경에서는 “그들 성 제자들은 혹은 갈 때도 혹은 머무를 때도 생각에 따라 통달하였지만, 어느 때 망실하여 다 같이 온갖 세간의 마음으로 탐과 근심[憂]과 악과 불선법을 낳는다”고 설하였으니, 어찌 이미 ‘능히 잘 통달하였다’는 말을 설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통달하였다’는 말이 ‘능히 잘 통달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능히 잘 통달하였음에도 다시금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앞에서 이미 “실념하였기 때문에 온갖 번뇌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능히 잘 통달하지 못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통달을] 망실함이 없는 이는 오로지 세존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에서 “구수(具壽)들이여, 사리자(舍利子)는 6항주법(恒住法)을 성취하였도다”고 설하였던 것인가?44)
이 경설에는 두 가지 뜻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를테면 일체의 아라한과는 모두가 다 6항주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혹은 일체의 [아라한과는] 비록 모두가 다 [6항주법을] 성취할지라도 모두가 다 능히 현전시켜 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이러한 [6항주법을] 방편[門]으로 삼아 그(사리자)의 수승함을 나타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필추중(苾芻衆)이, 사리자가 성문중(聲聞衆) 중의 지혜제일(智慧第一)로서 바로 위대한 법의 장수[大法將]이며, 능히 법륜(法輪)을 일으킨 이임을 알지 못하였을 뿐더러 그가 바로 아라한임을 믿지도 알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모름지기 박가범(薄伽梵)께서 온갖 응과가 공유하는 공덕으로써 찬탄의 말을 설하여 [그 같은 사실을] 알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또한 계경 중에서 “아라한으로서 불시해탈은 세간의 희유(希有)한 이이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만약 보특가라로서 6항주법을 성취한 이라면, 세간에서 참으로 희유한 자이다”고 설하였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아라한이 좋지 못한[匪宜] 경계대상을 보거나 들을 때 일체의 모든 [아라한의] 마음이 다 능히 사(捨)에 안주하거나 능히 정념(正念) 정지(正知)에 항주(恒住)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온갖 응과는 [정]념을 망실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경주)가 설한 “여기(『탄유경』)서는 ‘능히 잘 통달하였다’는 말을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전반부의 글은 유학위에 대해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정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만약 “[‘능히 잘 통달하였다’는 말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다시 말해 필시 유학위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면,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된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다”고만 설하였지 “능히 잘[善] 다하였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이(‘생이 이미 다한 이’)도 바로 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이미 성제를 관찰하였다”고만 설하였을 뿐 “능히 잘 관찰하였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이(‘이미 성제를 관찰한 이’)도 바로 이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유(有)의 길이 끊어지게 되었다”고만 말하였을 뿐 “능히 잘 끊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이도 마땅히 응과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등등의 사실이 이미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가 설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45) 따라서 ‘통달하였다’는 말의 뜻에는 필시 ‘능히 잘[善]’이나 그 밖의 다른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경주는] 이에 대해 다시 확고하게 주장하여 말하였다.
“이 『탄유경(炭喩經)』은 결정코 유학위에 대해 설한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뜻[義]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뜻에 근거하였다는 것인가?
유학의 경우 번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인정되지만, 무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학의 경우 이미 모든 전도(顚倒)를 끊었기 때문에, 번뇌종자[惑種]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필시 물러날 리가 없는 것이다. 또한 [무학위는] 바로 성도에 의해 [증득된] 과위에 포섭되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견소단의 번뇌가 끊어지면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자세히 살펴보건대, 저 구수(具壽, 경주 세친)는 자신에 의해 주장된 삿된 뜻[邪義]만을 근거로 삼을 뿐 도무지 선서(善逝)께서 설한 계경의 올바른 뜻[正義]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대들은 오래도록 자신의 마음[情]을 감추고서 항상 거짓되게 “우리는 경설(經說)을 [지식의] 근거로 삼을 뿐 대법(對法)의 정리(正理)를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니, 대법종(對法宗)에는 경에 위배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인가?
지금 여기서도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경문을 되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거짓된 정의(情意)에 따라 제멋대로 뜻[義理]을 설정하고 있으니, [대법종의] 정리를 배운 자이면서도 이와 같이 “뜻에 근거하여 [『탄유경』에서는] 유학위에 대해 설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뜻에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세존을 ‘우리의 스승’이라고 일컫는 자라면 제시한 뜻이 경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제시된 뜻이] 경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올바른 이치[正理]가 아닐 것이며, 만약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증인(證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토록 쉽게 “뜻[義]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유학의 경우 번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인정된다”고 말하였지만, 이것이 ‘무학이 물러난다’는 사실에 무슨 위배됨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만 이 경에서는 유학에 대해 설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무학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앞에서 이미 분별하여 성취하였다. 따라서 응과도 실념하여 물러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경주는 “뜻이 가장 근거로 삼을만한 것이다”고 설하였지만, 그대가 정의(情意)에 따라 거짓되게 주장한 뜻은 [근거로 삼을만한 것이] 아니다. 만약 “오로지 유학에게만 번뇌가 존재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날 수 있지만(다시 말해 물러날 수 있지만), 무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떠한 까닭에서 교화될 중생들로 하여금 오류가 없는 지혜[無謬智]를 낳게 하기 위해 “실념하여 물러나는 것은 [오로지] 유학위이며, 그 밖의 다른 계위(무학위)는 물러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였어야 함에도] 차별하여 설하지 않은 것인가?
불세존께서는 이미 모든 과실을 초월하였으니, [이같이] 불분명[迷謬]한 말을 설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할 리가 없다.46) 비록 이 경 중에서는 [무학위라고] 차별하여 설한 일은 없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경에 준하여 볼 때, 여기서는 무학위에 대해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바로 자기 방에서 지껄인 말[自室言]일 뿐이다.47)
또한 그는 “무학의 경우 이미 모든 전도(顚倒)를 끊었기 [때문에]”라는 등의 논거[證]를 물러나는 일이 없는 이유로 설하였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비판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도 이를 입증할만한 공용이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무학도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이치상 조금도 경동(傾動)할 수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다.
(2) 상좌(上座)의 『탄유경(炭喩經)』 해석 비판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시 그릇되게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탄유경』은 불환(不還)의 계위에 대해 설한 것이다. 즉 유학위에서는 번뇌의 때[惑垢]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퇴실의] 인연을 만나 실념하는 경우 번뇌를 일으킬 수 있지만, 모든 무학은 [이미 번뇌의 때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킬 리가 없는 것이다. 세존께서 비록 ‘그들은 번뇌[漏]에 수순하는 일체의 온갖 법을 이미 능히 영원히 토(吐)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淸凉)을 획득하였다’고 설하였을지라도,48) 다만 ‘번뇌에 수순하는 온갖 법을 [이미 영원히--]’라고 말하였을 뿐 ‘번뇌를 [이미 영원히--]’라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를 유학이라고] 설하더라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온갖 번뇌 역시 ‘번뇌에 수순하는 법[順漏法]’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번뇌에 수순하는 법’은 유루를 모두[盡] 포섭하는 것으로, 이치상 ‘온갖 번뇌’는 여기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49) [상좌는] “이들 성 제자는 일체의 유루를 이미 능히 영원히 토(吐)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을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아라한과를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성교와 정리를 깨달은 이의 말로서 이 같은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혹 “번뇌는 ‘번뇌에 수순하는 법’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면, 이는 곧 자신들이 주장한 성교나 정리에도 상위하는 것이다.50)
또한 그는 “불환의 성자는 유정지(有頂地)의 온갖 번뇌에 수순하는 법을 이미 능히 영원히 토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을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러한 [유정]지 중의 온갖 번뇌를 끊지 못하였다면, 결정코 이러한 [유정]지의 번뇌에 수순하는 온갖 법에 대해서도 아직 이계를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유정지의 번뇌에 수순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 이계를 획득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법]을 이미 능히 영원히 토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을 획득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말은 [그의] 지혜[慧]가 기이하고 특이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번뇌[漏]와 번뇌에 수순하는 법[順漏法]은 동시에 끊어지기 때문에, 이미 “번뇌에 수순하는 법을 이미 능히 영원히 토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을 획득하였다”고 설하였다면, 그는 이미 온갖 번뇌를 다한 자(즉 무학)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탄유경』)서는 불환에 대해 설한 것이다”는 해석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이 경(『탄유경』)에서는 비록 ‘그들(다문의 성 제자)의 마음은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隨順)하며--’라고 하는 등으로 설하였고, 그 밖의 다른 경에서도 이를 설하여 ‘응과의 힘’이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요컨대 여덟 가지의 [힘을] 모두 갖춘 이만을 바야흐로 ‘아라한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이 원리(遠離)에 수순하며--’라고 하는 등으로 설한 이를 유학이라 하여도]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51)
그러나 무엇을 증인(證因)으로 삼아 “요컨대 여덟 가지의 힘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응과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중] 한 가지의 힘을 갖춘 이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게 된 것인가? 이것의 증인으로 삼을만한 어떠한 성교도 정리도 없으니, 이는 다만 자의(自意)에 따라 꾸며낸 말[莊飾言詞]일 따름이다.
또한 그는 어떻게 “여덟 가지의 힘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응과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중] 한 가지의 힘만을 갖춘 이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인가? 그의 종의에서는 “모든 아라한에게는 여덟 종류의 힘이 동시에 현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52) 따라서 “바야흐로 [여덟 가지의 힘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응과의] 힘을 성취하게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응과에 이러한 각각의 법(즉 힘)이 현전하더라도 온갖 번뇌에 의해 꺾이고 조복되어 그 힘을 결여하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각각의 힘은 [응과의] 힘이 되지 않는다고 계탁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설혹 [여덟 가지의 힘을] 모두 [갖출 때] 비로소 ‘[응과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경에서는] 하나 하나를 열거하고서도 역시 ‘응과’로 나타내었으니, 예컨대 『술나경(戌拏經)』에서 “아라한은 오로지 원리(遠離)와 출리(出離)와 무해(無害)에 안주하며, 애(愛)가 다하고 취(取)가 다하였으며, 아울러 마음의 해탈을 망실하지 않는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53) 『독전유경(毒箭喩經)』에서도 다만 “열반을 즐기는 자는 비상비비상처의 결(結)을 영원히 끊는다”고 설하였거늘,54) 어찌 두루 열거하지 않았다고 해서 ‘응과의 [힘]’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내가 지금 그가 발한 모든 말을 관찰해보건대, 그것은 다만 다른 이로 하여금 자신이 말을 잘 한다[能語]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5) 아라한과 유퇴론 여설(續)
이와 같이 다만 『탄유경』만을 언급하여도 응과에는 물러나는 응과의 종성[應果性]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응과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두 가지 아라한과가 존재하니, 첫째는 퇴법(退法)이며, 둘째는 불퇴법(不退法)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만약 “[퇴법은] 오로지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나는 것이다”고 한다면,55)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이 경에서는 두 종류의 아라한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계경에서는] 오로지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것을 [퇴법이라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오로지 퇴법의 응과 한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니, 일체의 [아라한은] 모두 다 [현법락주가] 현행하는 것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56)
예컨대 계경에서 “나는 이에 따라 증득된 네 종류의 증상(增上)의 심소인 현법락주 중의 어느 한 가지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설하리라. 그러나 획득된 부동심해탈은 몸으로 작증한 것이어서 나는 결정코 이로부터 물러나게 되는 인연은 없다고 설하리라”고 설한 것처럼,57) 만약 “여러 계경 중에서는 오로지 선정의 자재성(自在性)에서 물러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퇴법을 설한 것으로, 모든 응과에 다 이러한 퇴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려가 현전하는 중에 [선정의] 자재성에서 물러나는 이를 일컬어 퇴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사무(事務)로 인해 현전시킬 겨를이 없어 잠시 현전시키지 않은 경우라면 [선정의] 자재성을 상실하지 않으니, 비록 수용퇴(受用退) 즉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이 현전하지 않음으로써 물러나는 일’은 있을지라도 그것은 불퇴법(不退法)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계경에서 설한] ‘응과에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고 한다면, 이러한 해명[救]은 옳지 않으니, 계경에서는 아라한과에 두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8)
또한 앞에서 이미 “‘정려의 자재성에서 물러난다’고 함이 만약 원리(遠離)를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번뇌를 일으킨다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이욕(離欲)하여 퇴실할 일이 없음에도 이생희락(離生喜樂, 초정려의 이명)에서 퇴실한다고 말한 것이니, 어찌 서로 모순되는 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논설하였다.59) 따라서 정려의 자재성에 퇴실하면 이치상 필시 마땅히 번뇌가 현전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라한은 번뇌를 일으키는 일이 없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선정의 자재성에서 퇴실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마땅히 일체의 아라한과에는 오로지 한 종류만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니, 불퇴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시해탈이 응과성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 응과(시해탈과 불시해탈)의 체성은 서로 뒤섞여서는 안 되며, 그래서 나는 “[계경에서] 응과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물러난다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끊어진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방편을 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나는 양의(良醫)와 마찬가지로 대치되어 끊어진 법이 그 후 결정코 생겨나지 않게 하는 방편을 참답게 안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끊어진 번뇌도 다시 생겨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끊어진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방편을 능히 잘 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스스로 참으로 교묘하게 “나는 양의와 같다”고 찬탄하였던 것이다.
만약 세간의 모든 병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찬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오로지 이러한 양의만이 “병이 치유되고서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하는 방편을 능히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뇌를 끊고 나서도 물러나 태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경은 이생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그 경에서는 [번뇌가 끊어진 이에게] [7]각지(覺支)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염각지(念覺支)가 존재하며, 그것이 존재함을 참답게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은] 결정코 이생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계경에서] 응과에는 두 가지 지(智)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아라한에게는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존재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만약 모든 [번뇌가] 끊어지고 다할 경우 그것들은 모두 다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생지를 설정한 것은 쓸데없는 수고[唐勞]가 되고 만다.60)
만약 “이생에 의해 끊어진 것과 차별하여 아라한의 안온(安穩)이 제일(第一)임을 나타내기 위해, 크나큰 이익에 근거하여 무생지를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럴 경우] 오로지 진지만 생겨나면 그대의 종의에서는 이미 제일의 안온을 성취한 것이라고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동법의] 아라한은 모두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을 이미 확립하였으며, 해야 할 일 이미 다하여 더 이상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니, 이와 같은 안온을 어찌 제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온갖 이생이 비록 유정지(有頂地)의 삼마발저(三摩鉢底, samāpatti, 선정의 異名)를 획득할지라도 물러나는 일이 있을 뿐더러 나아가 당래 악취에 태어나는 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진지가 일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나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후생이 없으며, 더 이상 지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알 수 있다. [이는 곧] 아라한이 제일의 안온을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뜻이 이미 성취되었거늘 어찌 무생지를 [이생에] 근거[藉]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겠는가?61)
비록 이러한 제일의 안온(진지를 말함)을 이미 성취하였을지라도 모든 응과는 무생지를 다시 일으키기에 세존께서는 [“응과에는 두 가지 지(智)가 존재한다”고 하여] 진지와 무생지라는 말을 함께 설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결정코 아라한으로서 번뇌를 이미 끊었지만 그 후 다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방편으로 ‘영원히 태어나지 않게 하는 지(智, 즉 무생지)’를 부지런히 추구하는 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무생지를 설정한 데에는 크나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볼 때 응과(應果)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70권
6. 변현성품 ⑭
6) 유학위와 범부위의 6종성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6종성의] 온갖 아라한 등은 유정지의 염오를 떠나 다 같이 후생을 받지 않는 것인가? 그들 중에는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한 이(즉 부동법아라한)도 있지만, 일체의 [모든 아라한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근기[根]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계경에서 “퇴법과 불퇴법은 근기의 품류가 동일하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5근(信ㆍ勤ㆍ念ㆍ定ㆍ慧根)이 두드러지게 맹리하고 지극히 원만하기 때문에 구해탈(俱解脫)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구해탈이면서 퇴법의 종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근기가 수승하기 때문에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종성의 차별로 말미암아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인가?
여섯 종류의 종성은 오로지 응과(應果)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계위에도 존재하는 것인가? 연근(練根)은 오로지 무학위에서만 수습(修習)하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계위에도 역시 수습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학과 이생에게도 역시 여섯 종성이 있지만
견도위에서만은 근기를 단련[練根]하지 않는다.
學異生亦六 練根非見道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과 이생의 종성에도 역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여섯 종류의 응과(應果)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주하게 되는 종성의 차별로 말미암아 단혹(斷惑) 후에도 [번뇌가] 생겨나기도 하고 생겨나지 않기도 하는데, 결정코 어떠한 때에 끊어진 혹에서 불생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종류의 번뇌를 지식(止息)하는 수승한 도를 획득할 때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생법은 바로 택멸로서, 비택멸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바로 비택멸이라고 한다면, 비택멸을 마땅히 도과(道果)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성교에 위배되니, [계경에서] “결과[果法]가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비택멸과 허공의 무[위]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불생법을 택멸이라 하여도 과실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 수승한 도가 일어나는 것은 이것(즉 불생법)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불생법은] 도과가 아니다.
이를테면 수승한 도가 일어나는 것은 택멸을 증득하기 위함이지 비택멸(즉 불생법)을 증득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수승한] 도가 일어날 때 증득하게 되는 불생법을 ‘도과’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예컨대 등불은 본래 어두움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기름을 소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등불이 켜질 때 오로지 어두움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역시 또한 기름도 소진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같이 기름이 소진되는 것은 본래 [등불이] 하고자 하였던 바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등불의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수승한 종성의 수승한 도가 생겨날 때 역시 또한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도과는 아닌 것이다.
지금 여기서 [수승한] 도에 의해 증득된 불생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정코 근기에 의해 [증득된] 것이 아니라--그럴 경우 모든 이가 다 [불생법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다만 수승한 종성의 힘에 의해 증득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부동의 종성에게는 필시 혹(惑)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무학의 퇴법종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기를 [단련하여] 증진하는 자이며, 둘째는 물러나 유학위에 머무는 자이며, 셋째는 자신의 계위[自位]에 머물며 반열반하는 자이다. 사법 등의 네 종성에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네 가지와 다섯 가지와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는데,1) 오로지 무학만이 근기를 [단련하여] 증진하는 것은 아니며, 유학과 이생에게도 역시 이러한 일이 있다.
그렇지만 오로지 견도위에서만은 능히 근기의 단련[練根]을 닦을 수 없으니, 이러한 견도위에서는 가행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견도위는 매우 빠르게 일어나[運轉] 그 중간에 다른 것(연근)을 닦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신해(信解, 즉 수도위)와 이생위 중에서만 무학위에서처럼 능히 근기의 단련을 닦을 수 있을 뿐이다.
7) 물러남[退]의 세 종류
예컨대 [계경에서는] 부동법은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난다고 설하였는데,2) 어떻게 부동법에 대해서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물러남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득(已得)과 미득(未得)과 수용(受用)에 의한 그것으로
부처님에게는 오로지 최후의 것만이 존재할 뿐이지만
이근에게는 중간과 뒤의 것이, 둔근에게는 세 가지 모두 존재한다.
應知退有三 已未得受用
佛唯有最後 利中後鈍三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물러남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첫째는 이득퇴(已得退)로서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며, 둘째는 미득퇴(未得退)로서 마땅히 획득해야 할 공덕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을 말하며, 셋째는 수용퇴(受用退)로서 이미 획득한 온갖 수승한 공덕이 현재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물러남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비득(非得)을 본질로 하는 것이며, 세 번째 물러남은 오로지 그것(획득된 것)이 현재전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러한 세 가지 물러남 중에서 세존에게는 오로지 수용퇴 한 가지만이 존재할 뿐이니,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지어야 할 [그 밖의 다른] 사업(事業)이 그의 마음을 견인함으로 말미암아 비록 그 밖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희유(希有)한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을 지녔을지라도 그것을 일으킬만한(다시 말해 현전시킬만한)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3)
불세존을 제외한 그 밖의 부동법(不動法)은 미득퇴와 수용퇴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수승한 무쟁정(無諍定) 등에서 마땅히 획득해야 할 공덕을 아직은 능히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득퇴가 존재하는 것이며,4) 그 밖의 다른 지어야 할 사업이 그의 마음을 견인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획득한 공덕을 일으킬만한(다시 말해 현전시킬만한) 겨를이 없기 때문에 수용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다섯 종성은 세 가지 물러남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역시 또한 이미 획득한 공덕에서 퇴실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경주(經主)의 6종성 차별설 비판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퇴종(無退宗, 즉 경부)에 의거할 경우 [‘부동법은 현법락주에서 물러난다’는 경설은]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부동법이 현법락주에서 물러난다는 것인가?
[부동법은] 정려에서 물러나고 물러나지 않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경에서는 ‘동법과 부동법의 일체의 모든 응과(應果)로서 무루의 해탈을 모두 부동심해탈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려의 자재성(自在性)을 일으키는 중에 물러나는 일이 있는 이를 퇴법(退法)이라 이름하고, 물러나는 일이 없는 이를 불퇴법(不退法)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사법(思法) 등에 대해서도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퇴법과 안주법ㆍ부동법에 무슨 차별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모두 정려의 자재성을 일으키는 중에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근기를 단련[練根]하지 않고 획득한 이를 불퇴법이라 이름하였으며, 근기를 단련하여 획득한 이를 부동법이라 이름하였다. 이러한 두 종성이 일으킨 수승한 등지(等至)는 설혹 퇴연(退緣)을 만날지라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리고 안주법이란 다만 이미 머물고 있는 온갖 수승한 공덕 중에서 능히 퇴실하는 일이 없을 뿐더러 능히 더 이상 그 밖의 다른 수승한 공덕을 이끌어내어 낳지 못하는 이로서, 설혹 다시금 [다른 수승한 공덕을] 이끌어내어 낳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는 물러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퇴법 등의 세 종성의 차별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과를 설정하는 경우, 물러나고 물러나지 않음의 차별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다. 먼저 현법락주의 자재성을 일으키는 것에서의 퇴실에 근거하여 퇴법을 설정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앞에서 여러 [측면으로] 따져 논파한 바와 같다.6)
[또한] 불퇴법 등의 세 가지는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다.
먼저 그는 불퇴법과 안주법의 두 성자는 상응하며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니, 두 성자는 다 같이 근기를 단련하지 않고 획득한 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며,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에서는 다 같이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아직 획득하지 않은 수승한 공덕을 다 같이 능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안주법은 새로이 일으킨 수승한 공덕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어 불퇴법과는 다르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안주법이라는 명칭은 그 같은 사실(새로이 일으킨 수승한 공덕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은 아니니, 안주법이라는 명칭은 승진하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7) 또한 그의 종의에서는 이근(利根)의 안주법을 인정하였는데, 어찌 “새로이 일으킨 수승한 공덕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마땅히 퇴법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종의에 [의하면], 퇴법 역시 완전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니(다시 말해 과위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니니),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번뇌를 일으킨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말한 “부동법은 근기를 단련함으로써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근기를 단련하지 않고 획득하는] 불퇴법과는 다르다”는 사실 역시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다. 즉 그가 종의로 삼는 바는 “현법락주의 자재성에서 퇴실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근기를 단련한다”는 것인데, 단련에 의해 획득된 근기에서는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마땅히 퇴법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그는 스스로 “정려 중의 자재성에서 퇴실하는 이를 퇴법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면, 물러나는 힘[退力]으로 말미암아 퇴법이라고 이름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마땅히 물러나지 않는 힘으로 말미암아 불퇴법이라고 이름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부동법과 불퇴법은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어떻게 이(불퇴법과 부동법과 안주법)에 대해 차별을 분명하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본성(本性)이 바로 이근인 자를 불퇴법이라 이름하고, 그 후 연근(練根)을 닦아 비로소 이근을 성취한 자를 부동법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러한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 명칭을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 마땅히 안주법ㆍ감달법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니, 그는 “안주법의 본성은 이근으로 근기를 단련하지 않고 획득하였다는 점에서 무퇴법(無退法, 즉 불퇴법)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불퇴법은 능히 수승한 공덕을 새로이 인기할 수 있기에 [다른 수승한 공덕을 인기하지 못하는] 안주법과는 다르다”고 말할지라도,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새로이 일으킨 수승한 공덕에 근거하여 불퇴법을 설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8) 즉 그의 종의에서는 “이러한 종성은 새로운 수승한 공덕을 일으키든 일으키지 않든 자성(性)이 이근이기 때문에 현법락주의 자재성에서 퇴실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퇴법의 상(相)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안주법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양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감당할만한 공능[堪能]이 있어 [부동법에] 도달하기 때문에 ‘감달법(堪達法)’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인데,9) 그의 종의에서는 “이러한 종성으로부터 다시 별도의 다른 종류의 무루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감달법은] 결정코 다만 유루의 근기를 단련한다는 사실만을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런 즉 결정코 이전의 퇴법종성이 연근(練根)의 행(行)을 닦을 경우 이름을 바꾸어 감달법이라 해야 한다. 이는 곧 감달법에게도 역시 연근이 성취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단련에] 의해 성취된 근기에서는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마땅히 퇴법이라고 이름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부동법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감달법과 부동법은] 다 같이 연근에 의해 획득된 것이며, 아울러 물러나지 않는 종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유루의 근기를 단련하여 구경(究竟)에 이를 때, 부동법이라 이름한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이러한 부동법은 바로 응과(應果, 아라한과)의 품성[性]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다소 저열한 현법락주의 자재성을 잠시 획득하기 위해 크나큰 가행을 일으키고 연근을 수습하며 더욱더 수습하여 [마침내] 부동법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10)
그렇기 때문에 경주(經主)의 말은 다만 자신의 정의(情意)를 서술한 것일 뿐이어서 결코 의지할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성교의 이치로 나아간 것은 오로지 대법(對法)의 정리(正理)뿐으로, [이것이야말로] 가히 의지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한의 퇴법 등의 차별은, 말하자면 응과의 소의신 중에 성취된 무루공덕의 승열(勝劣)의 차이에 근거하여 여섯 종류의 종성의 차별을 설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아라한은 이후 점차 수승하고 점차 증진된 무루의 공덕을 획득하기 위해 크나큰 가행을 일으키고 연근을 수습하는 것으로, 크게 힘써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이치에서라고 할 수 있으니, 세속의 썩어문드러진 시체처럼 허물어지기는 쉽지만 성취하기는 어려운 하열한 공덕(즉 현법락주)을 잠시 현기(現起)시키기 위해 크게 힘써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종의(현법락주의 퇴ㆍ불퇴에 의한 6종성 차별설)로 삼는 바는 참으로 의지할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8) 퇴과(退果) 후의 재득(再得)과 그 때 짓는 업
온갖 아라한은 과위에서 물러난다고 이미 인정하였으니, 다시 태어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물러나는 단계에서 혹(惑)을 지닌다고 하였으니, 목숨을 마치고서 마땅히 다시 생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온갖 [아라한은] 과위에 머물 때에 짓지 않았던 일(즉 업)을 물러날 때에는 짓는 것인가, 짓지 않는 것인가? 그는 이미 혹을 일으켰으므로 마땅히 [아라한]과에 위배되는 일을 다시 짓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허물은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과위에서 물러나는 일체의 아라한은
목숨을 마치기 전에 반드시 [다시] 획득하며
과위에 머물 때 짓지 않았던 일도
부끄러움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짓지 않는다.
一切從果退 必得不命終
住果所不爲 慚增故不作
논하여 말하겠다.
[아라한은] 과위로부터 물러나더라도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으니, 물러나서는 잠시 후[須臾]에 반드시 다시 획득하기 때문이다. 만약 목숨이 막 다하려고 하는 자라면, 그는 필시 물러날 리 없으니, 실념(失念)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목숨이 남아있어야 바야흐로 물러날 수 있으며, 물러나서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다시 증득하게 되는 것으로, 계경에서 “이와 같은 다문(多聞)의 여러 성(聖) 제자들은 정념(正念)에서 퇴실하더라도 물러남으로써 일으키게 된 것(즉 번뇌)을 능히 다시 신속하게 다하고[盡], 몰(沒)하고, 멸(滅)하고, 떠날(離) 수 있음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11)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범행(梵行)을 닦더라도 그 과보는 응당 안온하게 맡기고 믿을 만한 것[委信處]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12)
또한 과위에 머무는 단계에서는 응당 짓지 않았던 과위에 어긋나는 사업(事業)은, 부끄러움[慚]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비록 잠시 실념하여 번뇌가 현행하더라도 과위에 머물 때와 마찬가지로 필시 짓지 않으니, 이는 고귀한 족성(族姓)의 사람이 잠시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범속한 사람들처럼 비천한 하등의 업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8-1) 퇴과(退果) 여설(餘說)
또한 누구에게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 누구에게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인가?
부정관(不淨觀)을 닦아 성도에 든 자는 퇴실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지식념(持息念)을 닦아 성도에 든 자는 필시 퇴실하는 일이 없으며, 지관(止觀)을 존중(尊重)하는 자와 무탐(無貪)ㆍ무치(無癡)가 증성한 자도 순서대로 물러나는 일이 있고, 물러나는 일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떠한 계(界), 어떠한 취(趣)에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오로지 욕계 인취(人趣)의 세 주(洲)에서만 물러나는 일이 있다. 그런데 6욕천(欲天)에서 성과(聖果)를 획득한 자에 대해, 어떤 이는 “[그는] 이근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수승한 지(智)로써 능히 마음을 제복(制伏)하고 미묘한 경계를 등지게 하여 성도에 들었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같이] 설하였다. “물러나는 자는 자구(資具)의 연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든지, 혹은 소의신이 평등(平等)하지 않기 때문이다.13) 그러나 6욕천에는 이러한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아 비록 둔근일지라도 수신행(隨信行)의 성품[性]이 그에게 생겨나 성[과](聖果)를 획득하였으면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물러나는 일이 있는 모든 이는 혹(惑)을 일으키고서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먼저 물러나고서 비로소 혹이 현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혹 어떤 이는 혹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고 하였다.14)
[그럴 경우] 『품류족론』과는 응당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욕탐수면은 세 가지 경우에 의해 일어나니, 첫째는 욕탐수면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변지(遍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러한 전(纏, 즉 욕탐)에 수순하는 법(즉 경계대상)이 바로 현전하였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것에 대해 비리작의(非理作意)를 바로 일으켰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15)
[어떤 이의 말과 『품류족론』의 설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번뇌의 현전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이미 끊어진 것과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16) 여기(『품류족론』)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일어나는 것에 치우쳐 설하였다.
또한 번뇌가 일어나는 데에는 간략히 두 가지 갈래[門]가 있으니, 염오의 마음이나 염오하지 않은 마음과 무간에 일어나기 때문으로,17) 여기서는 염오한 마음과 무간에 일어나는 것에 치우쳐 설하였다.
혹은 번뇌가 일어나는 데에는 모두 세 가지 연(緣)이 있지만, 번뇌가 생겨날 때 근거[藉]가 되는 것은 일정하지 않으니, 혹 어떤 경우에는 오로지 경계대상의 힘에 근거하여 생겨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경계대상의 힘과 원인의 힘에 근거하여 [생겨나기도 하며], 혹은 이와 아울러 가행의 힘에 근거하여 일어나기도 한다.18) 그러나 이것(욕탐수면)은 [세 가지 연에] 모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경우에 의해”라고 설한 것이다. 혹은 혹(惑)을 일으킬 때 필시 세 가지 연이 갖추어지니, 비리작의가 바로 일어나 현전하면 끊어진 수면은 반드시 다시 성취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마음과 무간에 혹(惑)을 일으켜 물러나게 되는 것인가?
먼저 무학위(無學位)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로서, 만약 색전(色纏, 즉 색계 번뇌)이나 무색전(無色纏)을 일으켜 물러나는 경우라면 오로지 자지(自地)의 순퇴분정(順退分定)과 상응하는 선심(善心)으로부터 무간에 [혹을] 일으킨다. 그러나 욕계에 머물면서 상지에 포섭되는 무부무기심이 현재전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 오로지 통과심(通果心)만은 제외된다. 즉 그것(무학위)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없다면, 어찌 순퇴분정도 각기 자지에 대한 염오를 떠날 때 버렸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무학의 성자가 아직 물러나지도 않았으면서도 혹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 같은 [무학의] 마음이 현전하는 것은 이치상 실로 이와 같다. 즉 순주분(順住分, 머무는 상태에 수순하는 마음)의 품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순퇴(少順退, 물러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이며, 둘째는 소순진(少順進, 승진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이며, 셋째는 수자위(守自位, 자신의 과위를 지키려는 마음)인데,19) 앞에서 말한 ‘자지의 순퇴분정’은 바로 순주분 중의 소순퇴로서, 물러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순퇴(順退)’라고 하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20) 그렇지만 이러한 선정의 마음(順退分定과 상응하는 善心)은 수자위와 대개 상섭(相涉)하기 때문에 순주분에 포섭된 것이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아직 순퇴분정을 상실하지 않은 자라면 그러한 마음과 무간에 번뇌가 현전하지만, 만약 그러한 [순퇴분정의] 마음을 버린 자라면 이에 따라 순주분에 포섭된다. [이처럼] [무학의 마음이] 소순퇴(물러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라면 번뇌를 일으켜 물러날 수 있기 때문에 문의(文義) 상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학위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로서,] 만약 욕전(欲纏, 욕계 번뇌)을 일으켜 퇴실하는 경우라면 자지의 선과 무부무기의 두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다.
유학위(有學位)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가 색ㆍ무색계의 번뇌를 일으켜 물러날 때,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이러한 지(地)의 염오를 완전히 떠난 경우라면 오로지 이러한 지의 순퇴분정과 상응하는 선심으로부터 무간에 [혹을] 일으키지만, 만약 아직 이러한 지의 염오를 완전히 떠나지 않은 경우라면 이러한 지에 포섭되는 선과 염오의 두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다.
그리고 [유학위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가] 욕계의 전(纏)을 일으켜 퇴실할 때,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난 경우라면 자지의 선과 무부무기의 두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지만,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나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선과 염오와 무부무기의 세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현전에서 청정(淸淨)한 정려와 무색정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라면, 필시 능히 색ㆍ무색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하는 일이 없으며--그러한 [색ㆍ무색계의] 혹은 그것(정려와 무색정)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욕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뿐이다. 만약 현전에서 청정한 정려를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현전에서 청정한 무색정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라면, 필시 무색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으며, 욕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뿐이다. 만약 이미 현전에서 청정한 정려와 무색정을 획득한 경우라면, 욕계와 색ㆍ무색계의 전을 모두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수 있다.
나아가 온갖 유정이 일찍이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때, 만약 상계의 전(纏)을 일으켜 현전시킴으로써 물러난 경우라면 하계의 선을 상실하지 않으며, 하계의 혹도 성취하지 않지만, 만약 하계의 전을 일으켜 현전시킴으로써 물러난 경우라면 결정코 상계의 선을 상실하며, 결정코 상계의 혹도 성취하게 된다.
다시 어떤 이는 요컨대 먼저 물러나고서 그 후 경계에 대한 혹이 비로소 현전하게 된다고 하였다.21)
[그럴 경우] 『시설족론(施設足論)』의 논설을 응당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무색계의 세 가지 전(纏)이 하나하나 현기하면 무색계의 [단]진(斷盡)에서 물러나 색계의 [단]진 중에 머물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식신족론(識身足論)』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무색계에 계박(繫縛)된 염오한 마음이 현전하면 무학의 선[심]을 버리고 유학의 선[심]을 상속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무학의 마음에서 물러나 유학의 마음에 머무는 것(즉 번뇌를 일으키는 것)으로, 이는 다 같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아는 순간[覺時]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22) 이를테면 비록 일찍이 [번뇌를 일으키기] 전에 물러났을지라도 [그때는] 아직 [물러난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그 후 혹(惑)이 일어날 때 비로소 물러났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으로, 마치 어떤 이가 일찍이 네 『아급마(阿笈摩)』를 외우던 중에 오랫동안 그만두었을 경우 비록 잊어버렸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며, 그 후 [다시] 외우려고 하였으나 외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잊어버린 것을 자각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본론(本論)의 설과]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마음에 머물러야 물러난 이후에 혹을 일으키게 되는 것인가?
욕계 중의 무부무기(無覆無記)인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와 이숙생(異熟生)의 마음에 머물러야 물러난 이후 비로소 능히 혹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욕계계인 무부무기의 마음이 3계의 번뇌 모두와 상위하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더라도 물러나 3계의 혹(惑)을 획득하는 일은 없다. 혹은 다만 욕계와 색계의 번뇌와 상위하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면 물러나 무색계의 혹을 획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혹은 다만 욕계의 번뇌와 상위하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면 물러나 2계(색ㆍ무색계)의 혹을 획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혹은 3계의 번뇌와 상위하지 않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면 물러나 3계의 혹을 획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즉 [이러한] 일체의 모든 경우에서는 물러난 이후에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혹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의 전 [찰나]의 마음은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설 중에서 앞의 설(제1설 즉 ‘혹을 일으키고서 물러난다’는 설)이 보다 선설(善說)이라고 할 수 있다.
6.6. 연근(練根)의 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기를 단련[練根]하여 [뛰어난 무학과 유학의 종성을] 획득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성자의 연근에는 몇 가지의 무간도와 몇 가지의 해탈도가 있는 것인가? 유루도로써 [닦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무루도로써 [닦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소의신에 의지하고, 어떠한 지(地)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위에서의 근기의 단련은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해탈도이니
오래 익힌 것이기 때문이며, 유학은 한 가지인데
무루이며, 인취의 세 주(洲)에 의지한다.
練根無學位 九無間解脫
久習故學一 無漏依人三
무학은 9지(地)에 근거하고
유학은 다만 6지에 근거하니
과도(果道)와 승과도를 버리고서
오로지 과도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無學依九地 有學但依六
捨果勝果道 唯得果道故
논하여 말하겠다.
뛰어난 종성을 추구하여 연근(練根)을 닦는 자가 무학위 중에서 각각의 종성을 바꾸는 데에는 각기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아홉 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니, 이는 응과를 획득할 때와 같다.23)
그러한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한 [무학의] 둔근의 성질은 오랫동안 익힌 것이므로 적은 공력으로 능히 근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유학도와 무학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
유학위 중에서 각각의 종성을 바꾸는 데에는 각기 한가지의 무간도와 한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초과(初果)를 획득할 때와 같은 것으로, 오랫동안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연근)의 가행도는 온갖 계위(유ㆍ무학위)에 각기 한 가지가 있다.
유학위와 무학위가 연근을 닦을 때에는 다 같이 점차로 뒤의 종성으로 닦아 나아가며,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바야흐로 앞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게 된다. 따라서 온갖 무학이 연근을 닦을 때 가행도와 무간도와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는 상응하는 바대로 모두 퇴법 등에 포섭되며, 아홉 번째 해탈도는 바로 사법 등에 포섭된다. 또한 온갖 유학의 성자가 연근을 닦을 때 가행도와 무간도는 바로 퇴법 등에 포섭되며, 해탈도를 닦을 때는 사법 등으로 일컬어진다.
우리가 계승한 여러 위대한 논사(論師)들은 모두 말하기를 “연근은 다 견소단과 수소단의 번뇌[惑]의 힘에 의해 인기되어 낳아진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무지(無知)가 현행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유학위 중에서 연근을 닦는 것은 바로 견혹(見惑)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를] 막기 위해서이고, 무학위 중에서 연근을 닦는 것은 바로 수혹(修惑)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를] 막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이 능히 일으킨 [견ㆍ수]혹을 여여(如如)하게 끊을 때 일어난 무간도와 해탈도의 많고 적음이 이러하였으니, 그것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가 현행하는 것을 끊는 도의 수(數)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학이 연근을 닦을 때에는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아홉 가지의 해탈도로써 닦고, 유학위가 연근을 닦을 때의 두 도(무간도와 해탈도)는 각기 한가지라고 하였던 것이다.24) 즉 견혹과 수혹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는 장애하는 정도에 따라 다수의 품류가 있기 때문에 퇴법 등을 사법 등으로 바꾸어 성취할 때에도 온갖 도가 현전하여야 각각의 [무지를] 막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어떠한 경우에도 뛰어난 종성을 초월하여 획득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일체의 연근에는 모두 한가지의 가행도와 무간도와 해탈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설한 것이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이치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무간도와 해탈도는 모두 오로지 무루의 성질에 포섭된다. 즉 성자는 필시 유루도로써 근기를 바꾸는 일이 없으니, 세속법(世俗法)의 체성은 증상(增上)이 아니어서 [연근을] 감당할만한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25) 그리고 일체의 가행도는 다 두 종류(유루와 무루)와 모두 통한다.
이상과 같은 논설은 단지 현행하는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며, 이와 아울러 미래에 닦을 것에 의거하여 설할 경우, 여기에는 다시 차별이 있다. 즉 무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 가행도는 미래에도 역시 두 가지(유루와 무루) 모두를 닦으며, 아홉 가지 무간도와 여덟 가지 해탈도의 경우도 미래에 닦아야 하는 것은 역시 오로지 무루이지만, 아홉 번째 해탈도의 경우는 미래에 두 가지를 닦으며, 아울러 3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공덕도 함께 닦으니, 진지(盡智)의 첫 찰나에서 닦아야 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유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라면, 가행도의 경우는 미래에도 역시 두 가지 모두를 닦으며, 무간도와 해탈도의 경우도 미래에 닦아야 하는 것은 역시 오로지 무루로서, 이는 초과(初果)를 획득할 때와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 『광론(廣論)』과 상위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광론』에서는 “신해(信解)의 성품으로부터 연근의 행을 닦아 견지(見至)를 획득할 때 열네 가지 변화심[化心]도 그 때 역시 획득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유학의 해탈도 중에서도 역시 미래 유루도를 닦는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유학위에서는 미래 오로지 무루의 해탈도를 닦는다는 앞서의 논설)에는 [『광론』에] 어긋나는 과실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논(論)에서는 다만 ‘획득한 것’에 근거하여 ‘함께 생겨난다[俱生]’고 설하였을 뿐으로, 이는 마치 하지(下地)의 도가 현전할 때 상지의 변화심에 대해서도 역시 ‘획득하였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이미 세 정려의 염오를 떠나 초정려에 근거하여 견제(見諦)에 든 자에 대해서도 역시 “그는 네 선정의 변화심을 획득하였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치상 “하지의 견도가 현전함으로 말미암아 상지의 법(변화심)을 닦았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저 [논의] 글은 다만 견도와 그것(변화심)이 획득된 것에 근거하여 ‘함께 생겨난다’고 설한 것일 뿐이니,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갖 미래법이 획득되었을 경우,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로 ‘닦았다’고 말한 것으로, 이미 그것(변화심)의 획득과 함께 하는 이라면 어찌 ‘그것을 닦았다’고 하지 않겠는가?26) 따라서 온갖 유학이 연근을 닦을 때, 해탈도[를 닦는] 중에서도 역시 유루를 닦는다. 그렇지만 일체의 [유학이] 다 [유루와 무루를] 모두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예류과로서 아직 다음의 과위[後果]로 나아가지 못한 자가 연근의 행을 닦는 경우라면, 해탈도 중에서--과위를 획득할 때처럼--오로지 무루를 닦으며, 견도에 의해 일래과와 불환과를 획득한 자로서 아직 다음의 과위로27) 나아가지 못한 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유정지 중간에서 [닦는] 연근을 분리(分離)하여 해탈도로서 닦아야 하는 것 역시 오로지 무루이다. 그 밖의 유학위가 연근을 닦을 때 해탈도로서 닦아야 하는 것은 다 두 종류 모두와 통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한 것(유학위에서는 미래 오로지 무루의 해탈도를 닦는다고 설한 것)이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가 획득한 것(열네 가지 변화심) 모두에 대해 다 같이 ‘그것을 닦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능히 일체 모든 것을 [함께] 닦을 수 있는 일체의 법은 없다. 또한 유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에는 바로 견혹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를] 막기 위한 것으로, 견혹을 끊는 도(道)의 수(數)와 이미 같다고 하였거늘28) 어떻게 닦아야 하는 것(즉 연근의 행)이 견도의 과위에서 [닦아야 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만약 다른 계위로 나아간 후의 중간의 연근은 해탈도 중에서도 역시 유루를 닦는다고 한다면, 무간도의 단계에서는 어찌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예컨대 이염(離染)할 때의 경우에서 보듯이 [무간ㆍ해탈의] 두 도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무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의 도의 수(數)와 닦아야 하는 것[所修, 즉 유ㆍ무루]은 유정지(有頂地)의 [수혹을] 끊을 때와 같다. 그러나 만약 유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라면 도의 수와 닦아야 하는 것은 상계의 견도소단(見道所斷)을 끊을 때와 같은데, 그것들은 다만 인근(隣近)의 것과 더불어 과위를 획득할 때의 도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유학위와 무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의 가행도는 모두 일찍이 획득한 것과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것 모두와 통하지만, 무간도와 해탈도는 오로지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연근의] 도(가행ㆍ무간ㆍ해탈도)는 법지(法智)와 유지(類智) 모두와 통한다.
연근은 오로지 인취의 세 주(洲)에서만 닦는 것으로, 오로지 이러한 세 주의 몸에 의지할 때에만 물러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29)
어떠한 까닭에서 연근(練根)이라 이름하게 된 것인가?
온갖 근기를 조련(調練)하여 증장(增長)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도(道)의 힘에 의해 근기를 상속시키려는 것으로, 하품의 근기를 버리고 중품의 근기를 획득하며, 중품의 근기를 버리고 상품의 근기를 획득하여 점차 더욱 뛰어나게 되는 것을 ‘연근’이라 이름하였다. 따라서 연근이라고 하는 명칭은 ‘근기를 바꾼다’는 전근(轉根)의 뜻에 근거한 것이다.
비록 여덟 가지 해탈도가 점차로 뛰어난 근기를 획득하는 것일지라도 본심은 뛰어난 종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전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마치 다음의 과위[後果]를 획득하여야 비로소 이전의 향(向)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자위(聖者位)의 종성에 여섯 가지가 있어 능히 연근을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견도에 들기 전의 난법(煖法) 등의 가행위(加行位)에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성자위 중에서는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반드시 이전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지만, 난법 등의 가행위 중에서 연근을 닦을 경우 다만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저열한 종성은 [현]행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이를 ‘전근(轉根)’이라고 이름할지라도 저열한 [종성의] ‘득(得)’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무학의 연근은 모두 아홉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려와 아래 세 무색정의 지가 바로 그것으로, 오로지 이러한 아홉 지에만 무루도가 존재하며, 그 밖의 지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학의 연근은 오로지 여섯 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앞의 아홉 지 중에서 세 무색정의 지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제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근기를 바꿀[轉根] 경우 [지금까지의] 과도(果道)와 승과도(勝果道, 즉 向道)를 버리게 되는데, 획득된 것은 오로지 과도일 뿐 승과도가 아니며--마음은 과도를 흔락(欣樂)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과도는 무색지(無色地)에 포섭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학의 연근은 다만 여섯 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30) 설혹 유학위가 무색정에 근거하여 근기를 단련[練根]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결정코 이러한 이는 바로 승과도의 단계에 머무는 불환과이니, 불환과로서 무색지에 포섭되는 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색정에 근거하여 연근을 닦으면 과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으로(다시 말해 승과도를 획득할 뿐으로), 처음의 두 과위(예류과와 일래과)는 오로지 미지정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불환과는 오로지 여섯 지 모두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오로지 과위(果位)에 머물 때에만 근기를 단련하니, 많은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획득하는 과실을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과위에서 단련할 경우] 이와 같은 과실이 없으니, 근기를 단련하는 자는 마음으로 승과도를 기약하여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학위로서 연근을 닦는 자가 만약 과도에 머무는 경우라면 가행도 등의 세 가지 도는 모두 과도에 포섭되지만, 만약 승과도에 머무는 경우라면 가행도와 무간도는 승과도에 포섭되고, 해탈도는 과도에 포섭된다. 또한 무학위에 머물면서 연근을 닦는 자라면 가행도 등의 세 가지 도는 오로지 과도에만 포섭된다. 즉 과도의 단계에 머물며 연근을 닦을 때에는 [지금까지의] 과도를 버리고 [증상의] 과도를 획득하게 되지만, 승과도에 단계에 머물며 연근을 닦을 때에는 두 가지(과도와 승과도)를 버리고 과도만을 획득하는 것이다.”31)
또한 온갖 성자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의 [소의]지(地)는 본래의 [사문]과를 획득할 때의 [소의]지와 동일한 것인가, 혹은 다른 것인가?
이를테면 처음의 두 [사문]과는 소의지(所依地)가 반드시 동일하니, 그것(예류과와 일래과의 소의지)과 이것(두 과위에서의 연근)은 다 같이 미지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환과와 응과의 소의지는 일정하지 않은데, 혹 어떤 경우 본래의 [사문과를 획득할 때의 소의]지에 근거하여 [연근을 닦기도 하고], 혹은 상지에, 혹은 하지에 [근거하여 연근을 닦기도 한다]. 다만 차별이 있다면, 하지에 근거하여 근기를 단련한 모든 불환과는 상지의 [불환]과를 획득하지 않지만, 아라한은 그렇지가 않으니, 본래 획득한 [응]과와 같기 때문이다.32)
그리고 유정지의 결(結)을 나누어 끊고[分斷] 근기를 단련하여 [사문]과를 획득하였을 때, 비록 그러한 [결의] ‘끊어짐[斷]’을 버렸을지라도 그러한 결을 성취하지 않는다. 이는 이생이 위의 7지(地)에 태어나 상응하는 바에 따라 하지의 ‘끊어짐’을 버렸을지라도 하지의 결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다 같이 [그때는] 바로 승진하는 때이지 물러나는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6.7. 무학위 총결: 9무학(無學)
온갖 무학위의 보특가라에는 모두 몇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차별에 의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곱 가지 성문과 두 가지 부처가 있으니
이러한 차별은 9품의 근기에 의한 것이다.
七聲聞二佛 差別依九根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위에 머무는 성자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곱 가지의 성문과 두 가지의 각자(覺者)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일곱 가지의 성문이란 퇴법 등의 다섯 종성과 부동법을 후(後)와 선(先)의 둘로 나누어 차별한 것을 말하며,33) 두 가지 각자란 독각(獨覺)과 대각(大覺)을 말하는 것으로, [근기에] 하하품 등의 9품의 차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학의 성자에 아홉 가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