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랑 산다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이 끝났다. 이 드라마는 일타 강사와 반찬가게 사장의 로맨스이기도 하지만 더 눈에 갔던 건 반찬가게 사장과 조카 이야기다. 조카 해이는 어려서부터 이모와 살았다. 어린이집에서 이모와 산다고 놀리는 아이들 때문에 이모를 엄마로 부르며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소문이 퍼지고 상처받았다. 그러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친한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못 한다.
드라마 속 이모가 조카를 키우는 가정을 가정위탁지원센터에서는 일반위탁가정(친인척)이라 부른다. 친부모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키울 수 없을 때 시설이 아닌 가정 안에서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가정위탁보호제도이다. 민법상 8촌 이내 친인척인 이모가 키우는 경우도 가정위탁에 포함된다. 실제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 가운데 이모 고모 작은엄마 외숙모 때로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갖고 있고 다 부르는 “엄마”를 자기도 불러보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다른 친구들에게 엄마 없다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기를 낳지는 않았지 진짜 엄마로 여겨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위탁가정에도 드라마처럼 위탁보호자와 아이가 엄마와 딸처럼 지내는 가정이 많다. 드라마 속 해이도 친구들에게 놀림받기 싫어서 처음에 이모를 엄마라 불렀지만 살면서 엄마와 딸이 되었다. 낳아 준 엄마만이 아니라 자기를 키워 준 이모도 엄마인 것이다.
<일타스캔들>은 드라마이니 예상대로 낳아 준 엄마가 등장한다. 이 엄마가 제대로 된 엄마이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가 그동안 딸을 동생에게 맡기고 혼자만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이제라도 엄마 노릇 제대로 하겠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드라마 속 엄마는 자기밖에 모른다. 딸이 병원에 누워 있어도 스마트폰에 빠져있고 자기 먹고 싶은 것만 찾는다. 동생네 빌붙어 방 하나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하다 하다 이젠 동생 남자친구에게 돈을 빌리려 한다. 드라마이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싶겠지만, 현실 속 일반위탁가정(친인척)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모두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해이 : 엄마가 내 앞에 나타나는 상상 나 정말 몇천 번도 더 했었거든? ‘복수해 줘야지.’ ‘신경질이란 신경질은 다 내줘야지.’ 그리고 ‘못 이기는 척 받아줘야지.’ 그래도 울 엄마니까. 내내 밉고, 또 그리웠으니까. 근데 막상 보니까 너무 속상해. 날 버렸어도 그래도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아니야. 나 왜 그런 사람한테서 나왔을까?
선재 : 우리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잖아. 내가 좀 더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밖에
아이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버리듯 맡기고 일 년에 몇 번 얼굴도 들여다보지 않는 부모가 많다. 양육비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끔 오는 집에서도 아이를 보기보다는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부모가 많다. 아이들이 전화해도 잘 받지 않고 문자를 해도 답이 없다. 엄마(아빠)가 기분이 내킬 때나 아이들에게 연락한다. 심란한 부모다. 차라리 연락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 명의로 전화를 개통하고, 이를 보증 삼아 돈을 잔뜩 끌어다 쓰는 부모도 있다. 아이들에게 빚만 남겨준다. 아이들에게 나오는 수급비 통장에 손을 대서 사용하는 부모는 솔직히 정말 최악이다. 그건 아이들이 위탁가정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게 지원하는 생계비인데 그것마저⋯. 아이를 때리는 부모는 어떤가. 말로 상처주기도 하지만 신체학대 때론 성학대까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겠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게 좋은 것일까?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페인트」는 아이가 부모를 면접보고 선택하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출산율이 점점 떨어지고 낳은 아이를 부모가 원치 않을 때 정부가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 방식으로 NCNation’s Children센터가 세워졌다. 아이들은 의사표현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부모 면접을 보고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 입양 절차가 꽤 복잡하여 소설 밖 입양과 가정위탁 절차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아이들은 영상으로 부모 될 사람을 보고 나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1차 부모면접을 시작한다. 1차에서 마음에 들었다면, 2차 부모면접을 할 수 있다. 이때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까지 허용된다. 여기서도 마음에 들었다면 3차 부모면접을 볼 수 있다. 3차까지 통과한 부모들은 아이들과 일정 시간 함께 지낼 수 있다. 이 시간까지 통과하면 아이들은 새로운 부모와 함께 살 수 있다.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적응하지 못하면 아이는 다시 NC센터로 돌아올 수도 있다. 이런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아이들은 부모를 선택한다.
이렇게 열세 살이 넘어 부모를 직접 선택하면 진짜 가족이 되는 것일까? 부모 준비를 하면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과정이 부모 자식 사이 건강한 사랑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박이 말한 준비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맞이할 준비란? 준비를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니까. (⋯)
“프리 포스터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
「페인트」 (이희영, 창비, 2019)
부모와 아이 관계는 만들어 간다는 것처럼, 누구든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드라마 속 이모가 해이를 만나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처럼, 엄마 아빠가 된다는 것은 경험하고 배우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이면 아이들의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위탁가정을 보면 친인척이든 친인척이 아니든 진짜 가족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좋은 부모와 자녀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아이들이 낳아 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키워 줄 부모를 선택하고 가족이 된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아직 세상은 엄마 아빠 없이 자라는 아이들, 위탁부모나 입양부모와 사는 아이들, 미혼모(부)나 한부모 가정 아이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어른들에게 차별과 편견을 경험한다. 드라마 속 해이도 친구에게조차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닐까? 왜 사람들은 NC출신을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까?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페인트」 (이희영, 창비, 2019)
아이들은 낳아 준 부모 없이도 위탁가정에서 드라마 속 해이처럼 잘 자란다. 빈속으로 학교가지 않게 아침을 챙겨주고 학원 수강 신청을 위해 새벽부터 줄 서는 엄마가 있고, 한 달에 한 번 치킨데이 같이할 가족이 있고,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말해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 줄 친구가 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잘 자랄 수 있다. 이제 해이가 “나는 이모랑 산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곳이면 좋겠다.